쉼표야, 좀 쉬면 안되겠니
한 문장에선 하나만…두 개 이상 쓰면 엿가락처럼 늘어질라
쉼표는 흉기다.
떴다 하면 공포다. 슬슬 피해야 한다. ‘쉼’자가 들어갔다지만 독자를 쉬지 못하게 한다. 만날 쉰다고 자랑하면서도 실제 알고 보면 일중독 환자 같은…. 쉼표는 조용히 다가와 내 숨통을 조인다. 쉼표는 킬러다.
흡입력 높은 문장 위해선 짧게 쓰자
흐흐, 엄살이다. 쉼표의 미덕이 과대평가되었음을 장난스레 과장해보았다. 생각해보자. 쉼표를 보고 독자는 휴식을 취하는가? 차라리 마침표가 진정한 정지 신호다. 물음표와 느낌표도 그렇다. 그 셋이 반짝거리면 일단 멈춘다. 문장부호 중에서 오로지 쉼표만이 정지 신호가 아니다. 쉼표를 보면 편한 날숨을 쉴 수가 없다. 대개 들숨이다. 오늘은 쉼표와 마침표를 통해 문장의 길이와 리듬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나는 중딩 준석에게 늘 이런 권고를 한다.
“한 문장에서 쉼표는 하나 이상 찍지 말아줘.”
사춘기 소년은 당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은 그 트랜스포머를 갖다 놓고 OO마트를 나오는데, 이상하게 ‘만원 찾기 본능(?)’이 각성하여 쓰레기통을 뒤지며 만원을 찾는데, 그건 당연히 아무나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돈, 돈, 돈)
“플루트 말고는 할 게 없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자원이자, 든든하고 빛나는 악기인, 플루트가 제발 은서 곁으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나의 플루트)
앞글의 쉼표는 몽땅 빗자루로 쓸어냈으면 좋겠다. 다음처럼 세 문장으로 나눠야 훨씬 읽기 깔끔하다.
“그 트랜스포머를 갖다 놓고 OO마트를 나오다 이상하게 ‘만원찾기 본능’이 각성했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만원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뒷글의 쉼표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다. 하나만 빼놓고는 하등 쓸 이유가 없다. 그냥
“나의 소중한 자원이자 든든하고 빛나는 악기인 플루트가…”라고 하면 된다. 여기에 붙은 쉼표는 시각적인 혼란스러움만 준다.
나는 ‘단문주의자’다. 간결한 호흡으로 문장을 패스하는 플레이가 정석이라는 지론을 가졌다. 일도양단할 수는 없다. 문장의 길이에 관한 견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스타일이다. 글의 장르나 성격상 단문의 흐름보다는 만연체가 어울리기도 한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이 조화롭게 아웅다웅 섞여야 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그럼에도 짧은 문장이 주도권을 잡아야 글의 흡입력과 가독성이 높아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위한 중요한 실천사항 중 하나는 쉼표보다 마침표의 등용이다. 짧게 쓰자는 이야기다.
준석의 글에서 본 것처럼 쉼표가 득실거리면, 문장이 엿가락처럼 늘어진다.(명사를 나열할 때 쓰는 쉼표는 예외로 친다) 읽는 사람 엿 먹으라는(!) 수작 아닌가? 쉼표 때문에 오히려 호흡이 곤란해지는 역설!
퇴고할 때 읽어보며 리듬감 살펴야
결국은 리듬감이다. 쉼표와 마침표는 글의 음악성에서 결정적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발음의 자연스러움’이다. 대개 글을 마무리하면 퇴고를 위해, 읽는다.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읽는다. 술술술 읽혀야 기분 좋다. 물길을 가로막는 억센 바위처럼 쉼표가 엉뚱한 곳에서 버티면 막힌다. 탁 걸린다.
본의 아니게 쉼표에게 막말을 했다. 명예훼손감이다. 오해 마시라. 쉼표 무용론은 아니다. 타이밍에 맞게 출현하는 쉼표는 글을 야무지게 한다. 멈칫, 뜻하지 않은 여운을 준다. 사실 문장부호에 무슨 죄가 있나. 남용하는 인간들이 죄지~. 쉼표의 과로를 반대하는 바이다.
***
‘17.2자’를 문장 당 평균 글자 수로 임명하노라
전기톱이 떠올랐다. 불건전해서 미안하지만, 섬뜩한 살인마가 떠올랐다.
내 탓이 아니다. 토막살인 사건으로 뉴스를 장식해온 현실의 범죄자들 탓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참혹한 난도질을 보여준 일부 ‘슬래셔 무비’ 제작자들 탓이다. 아, <텍사몽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구체적인 제목까지 떠오른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전기톱의 전원 코드를 꽂는 살인마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사람인지 물건인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옆에 누워있다. 씨익~ 미소를 날려본다. 시퍼런 전기톱 날이 서서히 돌아간다. 지직, 지지직. 톱날이 어떤 몸체를 파고든다. 두 토막, 세 토막, 네 토막…. 사람이 아니다. 비정상적으로 늘어진 글자들이다. ?기톱 문장 연쇄토막사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이음새를 전기톱으로 자른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어찌하랴. 영양가는 없이 길기만 한 문장을 마주하면, 숨이 막혀 토막충동을 느끼는 걸.
그렇다면 전기톱을 들이대야 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먼저 준석의 글을 보자.
“우웩, 더러워진 나의 플루트여”
| 준석이는 은서가 부는 플루트를 혐오한다. 침이 섞인다며, 은서를 툭하면 구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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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반복해 봤자다. 엄마께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 “글쎄 엄마 플루트는 같이 쓸 수 있는 악기가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결국 동생에게로 가 버린 나의 플루트. 너무나 어이가 없고 비극적이며 “이건 아니다”라고 할 만한 사건이다.
무슨 옛 친구가 떠나간 듯이, 나는 눈물 안 나오는 슬픔을 처절히 느꼈다. “아아, 나의 플루트여!” 엄마는 슬플 것 없다고 하셨다. “네 탓이야.” 플루트를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다고 슬플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하시는 엄마.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는 이런 관념이 있다. “불어야만 악기다.” 이런 식. 그건 전혀 아니다. 악기가 있는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은서에게 빌려달라고? 아직은 물려줄 때가 아닌데? 나는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플루트를 연주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런데 빼앗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엄마는 잘못 생각하신 게 하나 더 있다. “그건 빌려준 거라고.” 전혀 아니다. 플루트는 건반을 두드리는 악기가 아니다. 물론 은서도 내 플루트가 불기 싫었을 것이다. 플루트를 불거나 배우는 사람은 알다시피, 플루트에는 침이나 입김이 반드시 들어간다. 특히 구멍도 깊고 하기 때문에, 닦기도 힘들다. 오래 불다 보면 더러워진다.
이런 악기를 두 명이서 불게 된다면? 냄새가 끔찍할 것이다. 뭐, 한 번씩 빌리거나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피아노도 아닌 플루트를 번갈아가서 사용한다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우웩! 그러니까 이 플루트는 말만 빌려주지, 이미 물려준 셈이다. 그래도 은서가 장하다. 내 입김이 고이 담긴 플루트를 그리 잘 불다니.
그래도 죽진 않으니 다행이다. 은서는 지금도 플루트를 분다. 가끔 은서가 플루트 선생님과 함께 플루트를 불 때도 있고, 혼자 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아 나의 플루트가 저렇게 더럽혀지다니!” 사실 은서가 더러운 건 아니라고 해야겠다. 내 침과 입김과 은서 침, 입김이 섞여지는 순간 더러운 플루트가 탄생한다는 얘기다. 은서가 플루트를 불려 들 때마다 나는 말한다. “안돼~ 불지마! 내꺼란 말야! 더럽혀져!”
그런다고 안 불 은서겠나. 은서는 플루트를 불며 엄마께 자랑질을 한다. “엄마, 나 아까보다 나아졌지?” 혹은 “엄마, 나 잘했지” 등등, 그럴 때마다 나는 “그걸로 학예회를 나갈 수나 있겠냐?”라고 비판한다. 계속 나는 엄마께 졸라댄다. “엄마, 은서의 플루트 실력으로 학예회를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그냥 피아노 시키시면 안 돼요?”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다. 엄마는 이미 은서의 피아노를 그만두게 했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은서를 타이른다. “야 제발 좀 불지 마!” 특히 “할머니 앞에서는 내가 불 거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 플루트 말고는 할 게 없기 때문에, 나의 소중한 자원이자 든든하고 빛나는 악기인 플루트가 제발 은서 곁으로 가지 않았으면 한다. 또한 제발 엄마는 은서에게 주시든지, 아니면 절 주시든지 하셨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이 글을 마치며 엄마께 강조한다. “플루트는 같이 쓸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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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문장을 보면 충동을 느낀다니까
나는 쪼잔하다. 위 준석 글의 문장과 글자 수를 쌀알 세듯 샅샅이 세어보았다.(눈 빠지는 줄 알았다ㅎㅎ) 그 결과 총 57문장에 1076자였다.(느낌표와 물음표는 한 글자로, 따옴표는 앞뒤 한 글자로 계산) 준석의 문장당 평균 글자 수는 18.9다.
나의 글과 비교해보았다. 맨 앞에 있는 글 중 다섯 단락을 살펴보았더니(준석의 긴 문장을 인용한 대목은 제외) 한 문장 당 평균 15.5자가 나왔다. 단락별로는 평균 22.2자가 최장, 11.5자가 최하였다. 이에 비해 준석의 경우엔 평균 24자가 최고, 13.8자가 최하였다.
가장 긴 문장수도 세어보았다. 준석은 55자였다. 나는 40자였다. 이상의 통계를 통해 ‘이상적인’ 문장 길이를 제시하고자 한다. 얼마나 많은 표본을 기초로 했는지, 과학적이기나 한지는 묻지 마시라. 단순무식 ‘부자()’표본에 기초한 나의 직관일 뿐이다.
1. 17.2자를 전체 글에서의 문장 당 평균 글자 수로 임명한다
나와 준석의 글자 수를 평균한 결과다. 난 기본적으로 짧은 문장을 쓰는 편이다. 준석 역시 단문이 중심이다. 가끔 긴 문장으로 탈선하는데 조금만 바로잡으면 된다. 나와 준석의 중간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다.
2. 한 문장은 아무리 길어도 30자를 넘지 않는 편이 좋다.
내가 쓴 문장 중 가장 긴 것은 다음 40자였다. “그럼에도 짧은 문장이 주도권을 잡아야 글의 흡입력과 가독성이 높아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0자가 넘는 문장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토막 낼 만한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짧은 문장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데 변함이 없다. 글의 흡입력과 가독성을 위해서다”로 말이다. 50자를 기록한 준석의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다. “‘엄마, 나 아까보다 나아졌지?’ 혹은 ‘엄마, 나 잘했지’ 등등, 그럴 때마다 나는 ‘그걸로 학예회를 나갈 수나 있겠냐?’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길 이유가 없다. ‘등등’ 다음에 쉼표 대신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두 개의 글을 샅샅이 분석하다보니 문장 당 30자를 웬만하면 넘지 않아야 좋겠다는 ‘감’이 왔다.
다시 정리한다. 전체 평균 문장당 17.2자와 30자 기준선을 잊지 마시라.
글자 수에 관한 이런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OO대의 2012년도 대입 전형계획의 특징은 첫째 ‘외고생을 선발하기 위한 전형’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수시1차 모집의 글로벌리더 전형에서 자연계열은 선발하지 않고 인문계열은 지원자격을 완화, 둘째 수시1차 모집 서류평가에서 교과성적을 배제하고 1시간 동안 심층면접을 실시하면서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없는 ‘창의인재전형’신설, 셋째 수시1차 모집의 사회적배려대상전형에서 ‘다문화가정 자녀, 조손가정 자녀, 장애우부모 자녀, 국내외의 벽지·오지 근무경력이 있는 선교사 및 교역자 자녀에게 지원자격을 부여하고 모집 시기를 수시모집에서 정시모집의 ’기회균등특별전형‘의 사회적배려대상자 트랙에서 선발, 넷째 수시1차 모집의 사회기여자전형에 ’민주화운동관련자 자녀‘의 지원자격이 추가되는 것이다.”
헉헉헉. 숨을 못 쉬겠다. 글쓰기의 테크닉에 무게를 두지 않은, 신문 입시 상담면의 글이라지만 정도가 심하다. 정확히 200자 원고지 기준 두 매 분량의 글에 마침표가 달랑 하나다. 6등분하면 딱 맞춤한 글이다. ‘전기톱 살인마’가 토막충동으로 흥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호흡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플루트는 글쓰기와 닮았다. 물론 준석은 관심 없다. 동생으로 인해 침이 묻는 자신의 플루트가 한스러울 뿐이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네가 플루트의 열정을 다시 한번 불태운다면 한 벌을 더 사줄 용의도 있다. 가망은 없어 보이지만.
다음은 은서의 글을 보겠다. 요즘 오빠의 플루트에 침을 묻혀 지탄을 받는 소녀는 피아노의 추억을 말한다.
나, 피아노로 상 받은 소녀야!
| 아직도 쉬운 곡은 두 손으로 치는 소녀. 글쓰기보다 피아노 실력이 아직도 훨씬 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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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하면 딱 떠오르는 게 피아노다.
난 일곱살 때 피아노를 처음 쳤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잘 쳤다.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2학년이 되자 피아노 연습을 제대로 못했다. 공부 때문에 바쁘기도 했지만, 엄마는 내가 그때 피아노를 귀찮아했다고 하신다. 피아노 앞에 앉아 쿨쿨 잠이 든 적도 많단다. 연습에 부실했던 나는 3학년 때 피아노를 끊고 말았다. 요즘에는 대신 플루트를 배운다. 학교 발표회 때 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플루트일까. 아무래도 휴대가 쉽기 때문이다. 플루트도 어렵다. 입모양을 작게 하고 바람을 세게 하면서 음을 맞춰야 하는데 잘 안 된다. 또 플루트를 두 손으로 들어야 하고, 왼쪽 끝이 올려야 하는데 팔이 아프다. 플루트가 힘들 때면 다시 피아노를 치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한창 피아노를 배울 때는 피아노치기를 참 좋아했다. 학원에서 음표를 배우는 이론이 아무리 쉬워도, 피아노 실기가 더 좋았다. 이론은 재미없는 대신 쉬운데, 피아노는 어려운 대신 재미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피아노에 대한 좋은 기억이 딱 하나 있다. 초등학교1학년 때 피아노 콩쿠르 대회에 나가서 준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 곡을 외운 대로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쳤다. 피아노학원에서 빌린 드레스복을 입고 친 다음,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고은서 학생, ○○○학생, xxx학생 등등 무대로 오세요”란다. 나를 왜 부르지? 나는 옷 갈아입었는데? 엄마는 그냥 집에서 입고 간 옷을 입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방금 전과 똑같이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피아노를 쳤다. 곡목은 잊어버렸다. 끝나고서 내 자리에 와서 앉았는데, 내가 상을 받는다고 했다. “준대상, 고은서”라는 이름이 불린 것이다. 나는 나가서 당당히 상을 받았다. 상금도 5만원이나 됐다.(엄마는 아직도 그 돈봉투를 안 버리고 소중히 간직하고 계신다) 음악신문에도 내 이름이 나왔다.
난 정말 뿌듯했다. 그건 옛날이고, 지금은 진짜~ 어려운 곡은 두 손으로 못 친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중에 나왔던 「언제나 몇번이라도」라는 곡은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두 손으로 신나게 쳤는데, 지금은 한 손으로만 칠 수 있다. 곡이 어려워 선생님 지도를 받을 때만 두 손으로 간신히 쳤다. 오른손만으론 지금도 디따 잘 친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나 「예스터데이」같은 곡들은 지금도 두 손으로 칠 수 있다. 어렸을 적 엄청 많이 쳤기 때문이다. 음악 콩쿠르에서 준대상을 받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아빠나 엄마가 “피아노를 다시 배울래?”라고 묻는다. 그러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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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녀를 어찌해야 할까요
문장토막 이야기를 할 계제가 아니다. 은서는 본래 사고가 단순하므로, 긴 문장을 쓰래도 못 쓴다. 주어와 술어가 복잡하게 뒤엉키면, 지적 수준이 높아졌다며(!) 차라리 상을 하사해야 할 판이다. 문장의 리듬이나 길이는 글이 어느 정도 레벨에 이른 다음에 논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먼저 문제를 내겠다. 위 은서의 글에서 굵은 활자는 무슨 뜻을 담았을까.
1) 은서가 자랑하고 싶은 내용이라며 강조
2) 은서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다고 빼자고 한 부분
3) 아빠가 “쓸데없는 이야기”라며 빼라고 표시
4) 아빠가 보강해준 사실
정답은 4번이다. 은서를 옆에 앉혀놓고 아빠가 내용을 보강했다. 은서가 모호하게 표현한 내용의 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인 대조해 끼워넣었다. 가령 “예전에 피아노를 잘 쳤다”고 했는데 그 ‘예전’이란 언제인가 . 한 살 때? 두 살 때? 유치원 때? 물어보니 초등학교1학년 때란다. 정확한 시기를 넣어야하지 않겠니?
“피아노를 귀찮아했다”는 부분도 답답하다. 왜? 어땠는데? 이유와 예를 들어야 할 거 아니니?
“플루트가 어렵다”고? 어떤 점이 구체적으로 어렵냔 말이다.
“지금은 피아노를 두 손으로 못 친다”고? 똑 부러지게 적으면 안 되겠니? 조사 결과 두 손으로 치는 곡도 있고 한 손으로만 치는 곡이 있었다.
아빠가 고쳐줬다고 해서 죽었던 글이 벌떡 일어나지는 않았다. 답답해서 복장 터지는 부분만 수리했을 뿐이다. 애초에 설계를 잘못해서 생동감이 없다.
사실 ?의 글은 다섯 번째 버전이었다. 네 번을 퇴짜놓았는데도 이 정도다. 그동안 이 글쓰기홈스쿨 연재를 지켜본 이들은 은서에게 “모진 아빠 만나 고생한다”는 연민을 보냈다. 아이의 기를 지나치게 죽이는 거 아니냐는 비판도 했다.
진실을 밝히자면, 은서는 절대 기죽는 스타일이 아니다. 뻔뻔하기만 하다. 여러 번을 지적한 끝에 쓴 네 번째 글도 한심해 혀를 끌끌 찼지만 소녀의 반성 따위는 없다. 버르장머리 없이 당돌하게 대들 뿐이다.
“어쩌라고. 피아노에 관해 드는 생각이 그거뿐인데 어쩌라고.”
9개월여의 글쓰기 홈스쿨이 말짱 꽝이라는 절망감이 가득 밀려온다. 오늘의 결론은 문장당 평균 글자수 따위가 아니다. 퇴짜를 놓아도, 놓아도 발전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소녀.
이 소녀를 정녕 어찌해야 할까요?
이걸로 결론을 대신한다. 독자 여러분께 현명한 답을 구하는 바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