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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 여행의 로망 고선영 글/김형호 사진 | 시공사 |
이 책은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자신을 다독이고 위안하는 여행을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잘 꾸며진 관광지가 아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의 ‘소도시’들이다. 그곳에서 푸근한 동네 사람들의 노변정담에 끼어 보고, 맛나는 지역 음식도 맛보고, 역사를 품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도 둘러보면서 여행자는 일상에서부터 가져온 묵직한 스트레스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놓아 버린다. 녹록지 않은 일상에 갑자기 찾아온 휴식같은 시간. 여행자는 길 위에서 새삼 인생의 ‘소소한 행복’을 깨닫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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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괜찮아
작은 마을을 휘감은 구불구불한 돌담길을 따라 걷자니 발걸음이 절로 느릿느릿해진다. 슬로우비디오를 틀어 놓은 듯한 걸음새다. 물론 이 길에서 어정버정 걷는다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낮볕도 어찌나 포근한지 온몸이 기분 좋게 노곤노곤해진다. 어디 바람 잘 부는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봄잠이나 청하면 딱 좋겠다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마을 안내를 청하고 나선 김철중 씨가 이미 눈치를 챈 듯싶다.
“이 마을에 오면 사람들이 다 그래요. 걸음도 느려지고 말도 느려지고 목소리도 작아지죠. 그런데 괜찮아요. 어차피 이 마을은 느려도 괜찮은 슬로시티니까요.”
그렇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아름다운 돌담길을 품고 있는 이 마을은, 100년 된 돌담 사이로 시간도 쉬어간다는 담양 창평면의 삼지내 마을이다.
시원한 나무향이 코를 찌른다. 새로 지은 한옥 민박집의 구들장을 끼고 앉아 창호문을 열어 놓으니, 노란 꽃을 피운 너른 유채밭이 펼쳐진다. 논으로 따지면 한 마지기쯤 되는 넓은 땅이 온통 유채꽃 투성이다. 멋진 풍경이다.
“내가 이 집에 일부러 담장을 안 했는디 워떠신가? 저 유채밭이 이 집의 정원인 셈이지.”삼지내에서 농사도 짓고 캹박집도 운영하며, 쌀엿도 만들고 슬로시티 주민위원회 위원장까지 맡고 있는 바쁜 양반 송희용 씨가 웃으며 말한다. 밭일을 끝냈으니 자신과 마을 구경을 다니자며 이끈다. 삼지내에서 바쁘기로 치자면 으뜸일 텐데도 마을 구경 온 외지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써 주니 참으로 고맙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토석담 길을 따라 함께 걷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저만치에서 송희용 씨가 손짓을 한다. 돌담을 한번 들여다보란다. 돌담은 울퉁불퉁한 돌 사이를 흙으로 메워 만든 것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돌들의 색깔이 모두 달랐다. 붉은 기가 돌거나 노르스름하거나 푸른빛을 띠거나 한다.
“이 마을 돌담길은 사실 세 종류인디, 황토로도 쌓고 진흙으로도 쌓고, 아주 일부지만 근래 들어 시멘트로 쌓은 것도 있지. 이렇게 진흙으로 돌을 쌓은 게 진짜여. 원래 옛날에는 영실강 상류 지역의 모난 돌을 지게로 져다가 마을의 논흙을 개어 쌓았거든.”100년 전 마을 사람들이 직접 인근 강의 상류 지역에서 돌을 주워 와 흙을 섞어 담을 쌓았는데, 비가 내릴 때마다 담장 아래쪽 흙이 조금씩 녹아내리면서 하부로 갈수록 돌들이 더 드러나게 됐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이제는 강에서 돌을 주워 올 수가 없으니, 새로 보수하는 담장은 일반 차돌도 사용하고 황토도 사용하지. 시멘트 담도 일부 있지만 조만간 원래의 흙담으로 바꿔야지.”
토석담은 거칠고 투박한 멋을 지녔다. 게다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오묘한 색을 내는 돌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S’자 형으로 자연스레 굽은 마을 안길과 둘레길을 따라 돌담은 3.6km쯤 이어졌다. 돌담 안에는 검은 기와를 착착 얹은 매끈한 곡선의 지붕을 가진 고택들도 잘 보존돼 있다. 집의 나이만큼 늙어 버린 고목들이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치고 여린 새 잎을 잔뜩 틔웠다. 감나무도 있고 밤나무, 느티나무도 있다.
삼지내에는 보존 가옥으로 지정된 역사적인 고택들이 여러 채 있는데 대부분 개방을 해 놓았다. 고재선 가옥과 고재환 가옥, 고정주 고택, 장전 이 씨 고택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삼지내의 고 씨 일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충렬 고경명 장군의 후손들로, 한말 민족 운동을 이끌었던 춘강 고정주 선생이 유명하다.
“일제 때 일본인이 발도 못 붙인 ‘3성 3평’ 고장이 있었죠. 3성은 보성, 장성, 곡성을, 3평은 남평, 창평, 함평을 이르는 말이에요. 창평은 그만큼 민족주의가 강한 곳이자 여러 인물이 난 대단한 고장이지요.”
어느새 다시 나타난 김철중 씨가 설명을 보탠다.
“저그 105년 된 창평초등학교의 시초가 고정주 선생이 세운 창흥의숙이야. 거서 신학문도 가르치고 해서 인물이 많이 났지.”
송희용 씨도 거든다.
뼈대가 굵고 격식을 잘 갖춘 고 씨 고택들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어느 집 은색 대문에 붙은 ‘창평쌀엿’이라고 쓰인 간소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마침 송희용 씨 집에서 3대째 쌀엿을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대화는 자연스레 쌀엿으로 이어진다.
“지난 2007년 창평면이 슬로시티로 지정됐을 때 돌담뿐 아니라 음식 분야에서도 좋은 점수를 얻었죠. 대한민국 음식 명인 35명 중 세 명이 이곳 창평면 출신이에요.”
김철중 씨의 말에 의하면, 창평 쌀엿의 유영군 씨, 엿강정 박순애 씨 그리고 창평 고 씨의 10대손 종부인 기순도 씨가 전통 장류 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쌀엿은 양녕대군과 함께 이 마을에 들른 궁녀가 전수해 준 그 때 그 방식으로 만들고 있어. 원래 서른 가구쯤 쌀엿을 만들었는데, 만드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수익이 나지 않아 지금은 다섯 집 밖에 남지 않았지. 것두 아마 한 6~7년 내에 다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
내내 유쾌하던 송희용 씨의 얼굴이 쌀엿 얘기가 나오자 다소 침울해진다.
그에게서 들은 실제 쌀엿 만드는 과정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한 수고로운 일이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쌀을 불려 고두밥(아주 되게 지어 고들고들한 밥)을 짓고 엿기름을 섞어 발효시키면 식혜가 된다. 이것을 7시간쯤 꼬박 달이면 조청이 되는데, 여기서 서너 시간쯤 조청을 계속 달여 갱엿을 만든 뒤, 여러 번에 걸친 늘리기 과정을 거쳐야만 쌀엿이 된단다. 쌀엿 한 번 만드려면 꼬박 48시간 동안을 잠도 못 자고 장작불 앞을 지켜야 한단다.
“본래 쌀엿이라는 것이 날 더우면 만들 수가 없어 농한기에 쉬엄쉬엄 만드는 거인데, 요즘에야 어디 농한기가 따로 있습디까. 엿 찾는 사람이 계속 줄어드는 것도 아쉽지. 그래도 조부 때부터 3대에 걸쳐 만들어 온 것이라 그저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는 거야.”
엊그제 만들었다며 그가 내어준 엿을 입에 넣자 부드러운 촉감과 단맛이 입 안 가득 번졌다. 잘근잘근 깨물어도 이에 붙지 않고, 적당히 달아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겠다. 그야말로 오롯이 사람의 손으로만 만든 명품 엿이다.
- 본문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