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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에서 오늘을 보면, 오늘이 옛날이다

『시경』이 효용론만 주장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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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인간에게 가르침과 즐거움을 주거나 인간구원의 목적을 구현하는 방편으로 본 것이 효용론이라면, 예술가들이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언어기호와 이미지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표현론이다.

시란 정이 마음에서 일어나 꼴을 이룬 것이다

『시경』이 효용론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예술을 인간에게 가르침과 즐거움을 주거나 인간구원의 목적을 구현하는 방편으로 본 것이 효용론이라면, 예술가들이 자신의 정서와 사상을 언어기호와 이미지를 빌려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표현론이다. 『시경』은 효용론이 지배적이지만 표현론의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시경』을 보자.

“정이 마음에서 일어나 말로 꼴을 이루는데, 말로 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이를 영탄하고 영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길게 노래를 하고 길게 노래를 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춤을 추고 발을 들어 동동거린다. 정이 소리로 드러나 소리가 무늬를 이룬 것을 음이라 한다.”

서양에서 표현론을 주창한 바이런은 “시란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범람”이라고 정의하였다. 내가 들판에 핀 제비꽃을 보자 그를 고이 말려 연서와 함께 전해주던 첫사랑 연인이 떠오르고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홍수가 난 듯이 가슴 밖으로 표출된 것이 시라는 것이다. 그처럼 인간이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간단한 말로 드러내는 것으로 모자라 길게 노래를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춤을 춘다는 것이다.

『시경』이 표현론을 수용하였기에 후대의 시인들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마음껏 시로 드러낼 수 있었고, 『시경』엔 그런 시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남녀의 성애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하였다. 표현론은 있었지만, 유교 이데올로기가 높고도 강하게 울타리를 두른 까닭이다.

17~19세기에 중국의 공안파의 학자들, 주로 원굉도(袁宏道, 1568~1610)와 원매(袁枚, 1716~1797)는 이에 반대하며 『시경』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성애를 표출할 것을 주장하였다.

무릇 시란 마음의 소리로 性情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이다. 성정이 흐르는 대로 지은 시는 연꽃이 물에서 피어나듯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우나 학문을 따라 억지로 지은 시는 마치 천지를 아무렇게나 채색하여 알록달록하게 물들여놓은 것과 같다.

당대의 시단을 지배한 시론은 유가(儒家)의 도리나 이치를 따져 시를 짓고 새로운 시어를 창조하기보다 『시경』의 시, 이백과 두보와 같은 시를 모방하는 시풍을 지지하는 의고론이었다. 원매는 이런 데서 벗어나 성정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시를 연못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비유하고, 반대로 의고론자의 시는 천지를 아무렇게나 채색한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시에 견주었다.

이처럼 성정의 바름(性情之正)보다 성정의 참됨(性情之眞)을 추구하자, 이는 인간 성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이라 할 남녀의 사랑을 긍정하는 논리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나라도 허균과 연암 박지원 등이 이들의 영향을 받아 유사한 주장을 편다.

남녀의 情欲은 하늘의 가르침이고 윤리와 기강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하늘이 성인보다는 한 등급 위에 있으니, 나는 하늘의 가르침을 따를지언정 감히 성인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겠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윤리와 도덕, 곧 성정의 바름보다 하늘로부터 받은 자연스러운 남녀의 사랑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과 성인 가운데 누가 더 높은가. 당연히 하늘이다.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을 느끼고 서로를 욕망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이니 하늘의 도리다. 그러니 남녀가 정욕을 억제하고 윤리를 지켜야 한다는 공자와 맹자의 말씀보다 사랑의 감정과 욕망대로 따르는 것이 더 우위에 있다. 이런 주장은 충효에 관련된 성인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추구할 가치이자 이념으로 강요하던 당시 사회에서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다. 사회변화 등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런 주장에 편승하여 남녀의 성애를 긍정하거나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시도 많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비교적 점잖은 시조 한 수를 소개한다.

춥다 네 품에 들자 베개 없다 네 팔을 베자
입에 바람 든다 네 혀 물고 잠을 들자
밤중에 물 밀려오거든 네 배 탈까 하노?.

(4298번)


위 시조는 19세기경 출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박씨본 시가(朴氏本 詩歌)』에 나오는 시조다. 이 시조는 자연의 변화와 성욕의 변화, 사랑하는 사람의 욕망과 애무와 성행위의 과정을 점층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배경은 추운 겨울날 찬바람이 부는 바닷가의 집이다. 시적 화자는 춥다는 핑계로 임의 품에 안기자고 요청한다. 이어 베개가 없다는 이유로 팔을 베자고 하고, 입에 바람이 든다는 사유로 입을 맞춘 채 잠을 자자고 한다. 마침내 밤중이 되어 밀물이 밀려들면 임의 배에 타겠노라고 선언한다.

‘배[bae]’는 ‘배(船)’이자 ‘배(腹)’이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펀(pun)이다. 물이 밀려와야 배를 띄울 수 있다. 물은 욕정의 환유이기도 하다. 물이 밀려옴은 욕정이 가슴에 가득해짐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 시조는 날씨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애무의 강도를 높이고 사람의 배가 선박과 동음이의어인 것을 이용해 그 배를 탈 것(성행위의 은유)이라고 말한다.

훗날에서 오늘을 보면, 오늘이 옛날이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으며 얼마나 많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조국의 독립’, 혹은 ‘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하였는가. 성정의 바름을 추구한 『시경』의 시정신을 누가 비판하겠는가. 문제는 창조를 부정한 데 있었다.

서양의 이상은 미래의 유토피아에 있었지만, 동양의 이상은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모시』 「대서」에서 “시란 것은 뜻이 가는 바다”라고 말한다. 원래 그렇지 않았지만, 여기서 뜻은 개인이 뜻이라기보다 성인과 옛사람의 뜻으로 한정되었다.

시의 전범은 옛날의 시, 특히 『시경』의 시, 이백과 두보에 있었다. 한마디로 말하여, 좋은 시란 시인이 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시의 정신과 형식을 그대로 따르되, 맥락에 맞게 한두 낱말만 바꾸어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동아시아에서 오늘에 새로이 창조하는 것은 전고(典故)를 따르는 것과 옛것에 늘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지금 내가 단풍이 물든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서 종장에 “이 모든 것이 다 MB의 은혜 덕분이로다”라고 한다면 아마 두고두고 조롱받을 것이다.하지만, 조선조에 이런 식으로 끝나는 시조가 500여 수에 이른다. 개혁 군주로 알고 있는 정조도 연암 박지원의 문장 같은 것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문체반정을 일으켰다. 이 모든 주범은 『시경』과 주희다.

이에 대해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이미 고려시대에 이런 시풍을 도적질이라 규정하고 “시란 본 것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 3백 편을 외운다 한들 어느 곳에 풍자하여 보탬이 되리. 스스로 제 길을 걸어감이 옳지 않겠는가. 홀로 부른 노래를 사람들은 반드시 조롱하겠지만” 이라고 말하였다.

공자 이래 『시경』에 실린 3백 편의 시가 시의 전범이었지만, 이규보는 그것보다 가치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이 사물을 본 대로 자신의 뜻을 새롭게 펴는 것이 올바른 시의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규보의 말대로 주류의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중국에서 18~19세기에 공안파의 원매 등이 이런 시풍을 비판하면서 옛것을 토해버리고 새로운 것을 들이쉬자는 토고흡신(吐古吸新)을 주장한다. 연암이 이의 영향을 받아 “진실로 옛 체를 본뜨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창시하면서 전아할 수 있는 것을 안다면, 지금의 글도 옛날 글과 같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론을 편다. 연암의 말대로 오늘도 더 훗날에서 보면 옛날이다. 시대가 많이 흘렀음에도 공안파와 연암의 이런 시론과 시를 짓는 일은 주류로부터 조롱을 받았고 탄압을 받았다.

『시경』의 시들은 경(經)으로 떠받들어질 만큼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시의 전범이었다. 수천 년 전의 작업임에도, 지금도 상당수의 시들은 별처럼 빛나며 우리 가슴에 밀물처럼 번지는 감동을 준다. 현대시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참신한 이미지와 시어가 반짝이는 시들도 많다. 하지만, 『시경』이 진정으로 간과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이었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정해졌다. 동양의 시정신의 전통을 잘 이어받되, 오늘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 맞풰 새로이 변용하고 창조를 이룰 때, 동양의 시와 예술은,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감동시키고 하늘도 움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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