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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없는 사회는 왜 정의를 필요로 하는가

정의롭지 않은 사회라는 믿음의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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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에서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원인은 각각 다르다. 미국에서 샌델의 주장은 일정하게 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않은 사회라는 믿음의 근거

샌델의 정의론에서 상품화되고 있는 것은 활자가 인쇄된 종이를 제책한 ‘물건’이 아니다. 이것은 상품성에 포함되어 있는 물질성일 뿐이다. 이 물질성은 정의와 하버드대학 교수라는 ‘요소’가 없다면 상품으로 거듭날 수가 없다. 여기에서 상품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아니라, ‘정의’라는 추상적 범주이다. 이 범주가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 많은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이 ‘정의’를 자신에게 필수적인 품목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원천적으로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말 자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이 책에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도 정의에 대한 정답은 없다. 결국 이 책이 설파하고 있는 정의라는 것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도덕적 분쟁을 인정하라”는 지극히 의사소통적인 결론이기 때문이다. 이런 소통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것, 이 과정이 바로 정의의 첫 단계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다. 물론 이처럼 단순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하지 못해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사서 본 것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도 이 책은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현상이 유독 한국이기 때문에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에서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원인은 각각 다르다. 미국에서 샌델의 주장은 일정하게 정의에 대한 판단에서 공동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자유주의라는 것은 사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이념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시장과 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되, 일정하게 분배와 복지의 문제에서 정부의 개입을 허용하는 정치적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샌델의 책은 이런 정치적 색채를 완전히 탈색한 채 수용되고 있다. 이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선진국 담론’으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곳에서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고, 저명한 하버드대학 교수가 정의에 대해 말했다는 사실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보다 무조건 따라 배워야 할 교본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정치집단에 대한 불신이라는 한국사회 특유의 정서도 한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정치인은 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이라기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집단으로 각인되어 있다.

말하자면,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의민주주의라는 제도에 내재한 근본적인 한계일 수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성찰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의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을 정치 일반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보완하기 위한 합리적 비판을 제기하기보다, 정치 일반을 싸잡아서 비난하고 배제하는 논리가 횡행하게 되어버렸다.

이 지점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정작 그 맥락이나 내용에 상관없이 한국사회에 만연한 정치 일반에 대한 혐오를 치유하기 위한 특효약으로 호출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기독교 복음주의가 전제하는 “세속은 썩어진 장소”라는 명제를 상기시킨다. 한국은 기독교국가가 아니지만, 미국적 가치관의 체화를 곧 ‘근대화’ 또는 ‘세계화’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한국사회가 따라 배우려는 미국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기독교적인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을 발전모델의 이상으로 설정하는 순간, 한국사회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이념을 체제 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국가라는 체제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적 가치체계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를 통해 만들어졌다. ‘시민’이라는 새로운 존재는 ‘만인은 평등하다’는 대전제 위에서 국가와 계약을 맺은 문명화된 인간으로 출현한다. 물론 이 평등은 모든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하는 일정한 자격을 갖췄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일종의 회원권인 셈이다.

야만의 상태를 벗어나서 국가의 운영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시민은 자신의 권리들을 국가장치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국가장치라는 것은 법이나 학교, 또는 병원이나 공장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군대는 이 모든 장치들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국가권력의 ‘도구’로 출현한다.

한국사회가 서구 근대국가와 다른 점은 시민사회의 형성과 발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구 근대국가와 달리, 한국은 시민사회를 거친 부르주아가 국가권력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로또 게임’을 통해, 국민이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불특정다수 집단의 선택을 통해 향배가 결정된다. 한국사회에서 대통령 직선제는 민주주의의 상징 같은 것이다.

국가는 시민사회를 포섭하고 지배하려 하지만 시민사회의 요구는 국가라는 재현장치로 완전히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불완전성에서 정치가 발생한다. 우리가 소위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서구 국가들에 비해 한국 정치가 역동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이른바 시민사회의 요구를 정치인이 대변해주지 않기에 시민이라는 ‘의식 있는 국민’은 한국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를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는 정치인에 대한 반감을 이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고 하겠다.


‘정의 없음’에 대한 무책임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토대로 정리를 해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국 수용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정치성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의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비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정치적이라는 것은 이와 다른 직접민주주의의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부르주아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공포 또는 혐오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서, 삼성 이건희 회장이 비자금 문제로 수사를 받을 때 보여준 태도는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어서 억울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삼성이라는 ‘국민기업’을 위한 일이고, 또 자기만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아닌데, 혼자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비치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없다면 삼성도 없다는 생각이 일종의 상식처럼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호소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과 삼성은 엄연히 다른 범주이고, 이건희 회장이 없다고 삼성이 경쟁력을 잃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면복권 후에 발빠르게 이루어진 이건희 회장의 경영일선 복귀는 이런 가설에 대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건희 회장 없는 삼성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더 나아가서 이건희 회장을 중심으로 한 족벌체제야말로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드는 비결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은 구성원 그 누구에게도 정상적인 국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어떤 이들에게도 정의롭게 이해관계가 조정된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부르주아조차도, 자신들이 국가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고 있는 처지라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까닭은 대의민주주의와 근대국가에 새겨져 있는 근본적인 모순 때문이다. 이 모순은 의사를 대의해서 ‘재현’해야 한다는 근대 정치제도의 문제점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이 제도를 넘어가는 과잉의 요구야말로, 대의민주주의를 통해 구현할 수 없는 정의라는 초월적 차원을 호출하고 있는 춰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대한 뜨거운 한국사회의 반응은 이런 현실원칙을 넘어가는 과잉을 ‘정의’라는 기표로써 드러내고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입법기구라는 장치를 통해 국가에 고정시켜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는 모든 사회구성원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그래서 국가는 개별적인 이익집단별로 이해관계를 구현한다. 따라서 언제나 국가에 대한 개인의 요구는 절제하고 인내할 수밖에 없다.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개인의 요구를 희생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룬다고 하겠다.

원래 정의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제 자신의 할 일에 마음을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되, 외람되게 남의 일을 대신해주겠다는 망동을 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이 말은 플라톤에 이르면, ‘책임’이라는 말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사회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샌델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의견을 인정하고, 도덕적 분쟁을 수용하는 것이 곧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생각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런 정의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정의론을 고민해보는 것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한 권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대두하는 것은 이 현상의 기저에 ‘정의’라는 기표로 지칭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가로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이든, 천박한 포퓰리즘에 대한 개탄이든, 동일한 메시지가 서로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주의를 끄는 일이다. 언제나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정의의 자리는 실제로 그 무엇도 채워줄 수 없는 정치적 과잉의 자리이다.

이 과잉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라는 교환가치의 경제체제가 만들어낸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메커니즘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의를 요구하는 바로 이런 방식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한국사회의 ‘정의 없음(justiceless-ness)’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정의 없는 현실에 대한 책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하버드대학 교수의 책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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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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