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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없는 시대의 교과서들

교과서는 국민의 텍스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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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나는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흐릿하다. 내가 워낙 늦둥이로 태어난 데다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시절 자리에 쓰러져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까지 정신을 놓은 채 내내 병석에 누운 모습으로 계셔야 했다.

번호를 가진 사람

슬프게도 나는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흐릿하다. 내가 워낙 늦둥이로 태어난 데다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시절 자리에 쓰러져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까지 정신을 놓은 채 내내 병석에 누운 모습으로 계셔야 했다. 그 탓에 아버지는 내 성장기 동안 그냥 풍경처럼 우두커니 말없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별나게 기억에 남아 있는 한 토막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에 강제징용을 당해 군대에 다녀온 일을 두고 향수에 젖는 일이었다. 일제징용을 다녀왔으니 분명 고역스럽고 분이 치밀었어야 마땅할 터인데, 아버지는 마치 대단한 일이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그것도 강제징용을 당한 일을 듣기 좋은 이야기인 양 둘러대는 것이 나는 의아했다. 더욱이, 나는 군대에 다녀온 일을 인생의 무슨 큰 사건인 양 너스레를 떠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군사독재가 서슬 푸르던 시절이었고, 나는 군인들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며 세상을 단속하고 다스리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군대 이야기는 그다지 유쾌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꽤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아버지의 그런 군대 이야기를 어렴풋이 이해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상북도의 어떤 시골 마을에 살던 무지렁이 청년에게 군대는 대단한 삶의 세계를 보여주었을 것이란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 무엇보다 아버지는 자신의 이름 석 자만이 자신이 가진 모든 정체성이었던 세계에서 벗어나는 엄청난 도약을 체험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 그 고유명사를 통해 아버지는 뉘 집 아들, 뉘 집 자손, 어느 마을 사람이란 정체성에 붙박인 채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군대는 그에게 처음으로 아마 군번(軍番)이란 것을 주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 엄마와 아버지의 아들, 딸이란 세계에서 불리던 그 이름을 버리고 번호(番號)를 배정받듯이 말이다.

자신에게 하나의 숫자가 배정되고, 그것이 말뜻 그대로 자신을 부르는 이름을 대신하게 되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현대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나타났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번호를 단 사람의 이름은 달리 부르면 바로 ‘개인’이라 일컬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군대에 갔던 아버지는 자신을 더 이상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번호로 부르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 자신이 한 명의 개인이 되어보는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번호를 단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 개인이 탄생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우리가 품고 있는 믿음과는 많이 다를지 모른다. ‘개인’을 떠올리면 우리는 이런저런 고유한 특성을 가진 풍부한 인격체를 떠올린다. 개성 있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지닌 인물을 우리는 흔히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는 실은 생각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음으로써 할 수 있는 발상이다.

이를테면 나는 남자이고, 고등학생이고, 밀양 사람이고, 교회에 다니고, 키가 175센티미터, 체중은 70킬로그램이며, 농구를 잘하고, 축구선수 정대세를 좋아한다는 등등의 특성은 개인이란 사람이 이미 등장하여 자리를 잡고 있을 때나 가능한 말하기의 방식이다.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나는 먼저 아무 특성 없는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있을 때,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어떤 학자의 개념을 빌려 “개인의 개인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인권과 시민권의 원리에 바탕하여 만들어진 사회라고 부를 때, 그 사회는 실은 그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번호로 부르는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선거에서 모두 한 명당 한 표를 던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때 1인 1표 원리는 말 그대로 나는 하나로 셈해지고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특징을 말하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한 명당 1의 숫자로 셈에 넣는 사회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당연한 이야기가 개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나는 양반가문인 이씨 자손이기 때문에 평민가족 출신인 김씨네보다 둘이나 셋으로 쳐줘야 한다면,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세상물정도 어둡고 큰 나랏일에 관해서는 관심도 크지 않은 여자보다 둘이나 셋으로 셈해줘야 한다면, 나는 기독교도이기 때문에 미신을 믿거나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보다 더 큰 숫자로 꼽아줘야 한다면, 나는 토종 한국인이기 때문에 1표를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줄 수 있지만 혼혈이거나 베트남 사람, 태국 사람, 몽고 사람들에겐 표를 던질 수 있는 권리를 줘서는 안 된다면, 즉 그 사람들을 0으로 셈한다면…….

아마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를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절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18세기 후반에 프랑스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세상은 이런 셈하기의 방식을 가지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곧 개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남녀라거나 한국인, 일본인, 한족이라거나 유대인, 백인, 흑인 같은 태생적인 속성이나 종교나 믿음처럼 자신이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를 정체성/동일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할지, 즉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마을에서 어떤 학교를 다니며 살아야 할지 따위가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개인이 아니다. 그 사람은 현대 이전의 사람으로서 성별이나 인종, 종교 따위의 정체성에 딸려 있는 삶의 운명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개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인이란 무엇보다 내가 여자이고 흑인이고 이슬람교도이고 뉴올리언스 출신이고 등등에 ‘상관없이’ 권리를 가진 한 명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권리를 가진 한 명의 사람은 실은 아무 개성도 없는 사람이다. ‘권리’라는 추상적인 속성을 빼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회색의 존재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개 1이란 숫자를 가진 사람이고, 나라에 따라, 이를테면 한국이라면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번호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학교에서 김개똥이란 이름이 아니라 반 번호나 학번을 가지는 것처럼, 군대에서 이철수란 이름이 아니라 군번을 부여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번호로 불리는 사람은 풍부하고 다양한 개인으로서의 특성을 모두 지운 채 차가운 숫자가 가리키는 아무 색깔도 냄새도 없는 그런 사람으로 탈바꿈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이다. 나는 이런저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방식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1명의 사람으로서 셈해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삶을 마음대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은 개인이고 또 그 개인을 낳은 것이 바로 현대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은 왕이고 거지는 거지인 것이 아니라 왕이나 거지나 한 명의 사람이란 것이 현대 민주주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풍부하다, 다양하다, 다르다’는 것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요즘의 시대적 분위기를 수상쩍게 바라보아야 할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당신네들과 다르기 때문에, 나는 너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것은 자유롭지도 않고 평등하지도 않다. 오히려 우리는 모두 똑같다, 우리는 모두 동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각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쪽이 진짜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다.

국민의 텍스트, 교과서


그렇다면 개인이란 아무런 정체성도 없는, 자신이 속한 어떤 소속도 없는 사람일까. 물론 전연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을 만들어낸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국가이다. 따라서 한 명 한 명의 1표를 행사하는 개인은 오직 국민으로서만 개인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국가는 개인 만들기를 행한 가장 중요한 힘이자 동시에 그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의 한계를 결정하는 대단한 능력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몹쓸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국가의 보건기관이나 치안기관에서 그 사람을 다른 국민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간주하여 그들을 격리하고 출산을 못하도록 단종(斷種)을 하거나 낙태를 할 때 그들은 더 이상 개인으로서 자신의 신체를 돌볼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비국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때 나병이라 불리기도 했던 한센병 환자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1963년까지 격리를 당한 채 살아야 했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수용당한 비(非)국민, 비(非)개인이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을 따른다면 그는 1이 아니라 0으로 셈해졌던 것이다. 가까운 일본은 이것이 더 심해 1907년 ‘나 예방의 건’이라는 법률이 시행되면서부터 시작된 격리정책은 1996년 3월 31일 ‘나 예방법’이 폐지될 때까지 무려 89년 동안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담한 비(非)국민의 이야기는 당연히 지난 세기 최대의 역사적인 비극인 나치즘의 유대인 학살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어느 글에서 유대인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가 필요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때 그녀가 말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란 슬픈 표현은 실은 그 권리가 국민에게만 배당되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럽의 역사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비참한 운명을 겪어야 했다. 1~2세기부터 기독교도들은 유대인들을 특정한 지역에 모여 살도록 하면서 유대인을 차별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유대인은 처음으로 평등한 시민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지만 그것은 그다지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을 박해하던 방식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와 풍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탈바꿈하여 그리고 더 잔인한 방식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종차별주의란 형태로 나타난 반유대주의였다.

유대인들이 쇼아(Shoah, 대재앙)라고 부르는 끔찍한 대량학살은 수백만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죽였고, 동유럽에서도 역시 러시아말로 포그롬(pogrom)이라고 부르는 잔인한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인종차별주의란 것은 국가가 없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란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인종주의란 인간이 가진 생물로서의 특성에 따라 인간들을 분류하고 그 사이에 정상/비정상, 우등/열등 같은 차별을 도입하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인종주의는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루는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가 사회를 다스린다고 할 때, 그 사회란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민들로 이뤄진 공동체가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국민들이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물학적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국가는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전염병 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돌보고, 재해나 범죄 같은 사고들로부터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지켜주며, 나이가 들어 돌볼 수 없는 노인들을 보살피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고살 것을 마련해주는 것 같은 일이 당연히 국가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생각에서 말하는 국민이란 건강, 장수, 안전 같은 기준을 통해 조명하는 사람들, 즉 생물학적인 사실들로 이해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인종주의는 다른 인종에게 배타적인 무리의 사람들이 가진 편견이 아니라 근대의 국민국가(nation state)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또 그렇게 생각하자면 인류 거의 대부분이 함께 믿고 따르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nation)이란 처음부터 인종, 즉 생물학적인 사실로 이해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한국에서도 정부가 미국산 소고기를 엄격한 안전조치 없이 수입하려 하자 시민들이 광우병에 감염되었을 수도 있을 소고기를 국민들에게 먹이려 한다며 거세게 반대하는 일이 있었다. 서울을 비롯한 많은 곳에서 정부의 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을 때, 이것도 사실은 국가란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돌볼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억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역시 국민은 왜 항상 인종인가를 잘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최근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화학적 거세’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다. 화학적 거세란 상습적인 아동 성폭력범이 다시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특정한 화학적인 약물을 주입하여야 한다는 요지를 지닌 법률(‘성충동 억제 약물치료법’)을 가리킨다. 이 법은 1년 정도의 유예기간을 거쳐 내년 2011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고 한다. 여기에서 놀라운 점은 범죄자를 그 사람이 가진 생물학적인 특성에 근거하여 파악하는 생각이 아주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학적 거세가 문제가 많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범죄자 본인의 의사나 합의와 상관없이 강제로 거세를 한다는 ‘명령’이기 때문에 혹은 대관절 어떤 약물을 어떤 부작용 없이 제대로 사용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반인권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곰곰이 생각한다면 문제는 외려 훨씬 더 근본적이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랜 동안 범죄자가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은 자신의 생물학적인 특성과 상관없이 그의 범죄행위와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질 뿐이라고 믿어왔다. 설령 현실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믿음을 고수하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바야흐로 그런 믿음은 무너져내리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범죄자가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신체적?심리적 기질이 있다고, 즉 인종주의적으로 생각하면서 범죄자를 어떤 생물학적인 종(種)인 것처럼 다루는 세계로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 비추어볼 때 앞서 든 것과 같은 우려는 차라리 초라하고 지엽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강력범죄자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등의 일들은 이제 마땅한 일이란 듯이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유대주의를 초래한 인종주의와 전연 다르지 않은 생각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이 특별한 생물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번영과 안녕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박해하는 짓이나 범죄자 역시 어떤 별난 소인(素因)이나 기질이 있어 국민의 안전과 행복에 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여 격리하고 처치하는 일은 모두 생각의 뿌리는 같다.

그렇다면 국민은 참으로 모순적인 성격을 가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국민은 사람들을 일차적인 소속이라고 생각한 것으로부터 떼어내어, 선거 같은 데서 보는 것처럼 모두 한 표씩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개인이 되도록 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 국민은 생물학적인 사실을 통해 이해되고 관리되는 사람이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보태어 이런 국민을 종족이란 모습, 즉 공통적인 언어나 관습, 의례, 상징을 가진 사람들로 만들어낼 때엔 그 국민은 민족주의란 이데올로기를 통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난 월드컵 게임 때 “대한민국은 할 수 있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많은 이들이 열정적으로 나누는 감정 같은 것은 바로 국민이 어떻게 민족이란 모습과 얼마나 깊이 상관있는지 잘 보여준다.

국민 이후 시대의 교과서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교과서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물론 교과서는 바로 국민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을 압축하는 작은 조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국민의 두 가지 모순적인 모습을 떠올려보자. 먼저 우리는 일차적인 동일성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어 권리를 가진 무조건적인 개인이 되도록 하는 힘이었던 국민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그런 국민 만들기가 언제나 생물학적인 삶으로 이해된 인종으로서의 사람이란 것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에서 국민/비국민 또는 국민/이방인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국민을 찾아보았다. 이런 국민됨의 이중적인 모습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까. 그 가운데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학교’, 즉 교육체계이다. 사람들이 국민이 되려면 혹은 좀 더 학술적인 용어로 표현하여 개인들이 자신을 국민으로 동일시하고자 한다면, ‘수년 동안 하루 몇 시간씩 교실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탓에 에티엔 발리바르(Etienne Balibar)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근대 국민이 일반화하고 재조직한 교육과정(“지식의 교육Erziehung”과 “인성의 도야Bildung”)은 모든 종류의 일차적 동일성(계급, 지역, 언어, 종교, 가족, 성적 동일성들)은 이차적(국민적?시민적) 동일성으로 직접 전환될 수 없으며, 따라서 사내아이나 계집아이, 지식인이나 육체 노동자, 가톨릭 신자나 유대교 신자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프랑스인, 미국인 또는 독일인으로 인지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프랑스인이 되고 미국인이 되는 것처럼 우리 역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체계에 들어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국가로부터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매우 멋있고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은 먼저 자퇴를 하겠다거나 학교를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는 학생이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기란 쉽지 않다. 실은 국민이 안 되겠다고 선언하는 일보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살겠다고 하는 일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국어를 말하고 쓸 줄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일자리를 얻을 수도 다른 사람들과 변변하게 어울려 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학교 역시 앞서 ?민이 가진 이중성처럼 이중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근대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결정적인 힘이 국민의 등장이었던 것처럼 학교 역시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던 주된 제도이다. 모두 같은 교과과정 속에서 같은 교과서를 읽으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졸업장을 얻어 사회로 나가기까지, 학교는 학생들을 모든 일차적인 소속으로부터 물러날 수 있도록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소속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게 된다. 비록 수업이 끝나고 난폭한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기다리는 산동네의 가난한 집으로 돌아가든 아니면 근사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다정한 낯으로 나를 기다리는 엄마가 있는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든, 적어도 우리는 학교에서는 똑같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똑같은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인 것이다. 국민은 바로 그런 학생의 모습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고, 국민은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인 개인적인 시민의 모습을 학생을 통해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국민의 또 다른 모습 역시 교과서에 담겨 있다. 앞서의 학교 모습보다 우리에게 더 익숙한 모습은 사실은 이런 것일지 모른다. 10년도 지난 일이지만 엄청난 인기를 누린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란 노래를 떠올려보자.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이젠 족해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며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라고 노래했던 그 유명한 곡 말이다.

이 노래는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즈음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라는 역사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화라는 것은 감옥에 가거나 처벌을 받을 걱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정치적 지도자를 자신의 손으로 뽑으며, 자신들의 삶의 상태를 보다 좋게 바꿀 수 있도록 단결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학교, 가족은 물론 남녀관계에 이르기까지 삶의 작은 부분들에서도 이뤄져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민주화라는 것이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로 보는 생각에 빠질 수도 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를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유의 으뜸가는 원칙이고 민주화가 이뤄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앞의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는 그런 꿈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일곱 시 반이면 등교하여 머물러야 하는 “시커먼 교실”이자 똑같은 것만 머릿속에 집어넣는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자유로운 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실현시켜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국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그런 ‘국민 되기’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학교’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이 아니면서 개인일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국민국가가 살아 있는 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을 ‘국가의 탈사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적인 대립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이 있다. 그런데 국가는 모두 한 배에 탄 사람들처럼 다시 말해 사회의 일원으로서 함께 서로를 돌보고 살아야 할 생존 공동체로서의 사회란 대상을 다루는 것처럼 활동하고, 이런 대립과 갈등을 조절한다.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국가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에 다름아니다.

복지국가는 고용정책, 가족정책, 공중보건, 주거, 교육, 직업훈련 정책 등을 통해 일단 국민이라면 누구나 삶을 ‘보장’해준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돌보아야 할 사회 따위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과 능력을 지닌 개인들로 채워진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교과서를 연구하는 어떤 학자는 “학교 교육의 기본 설계도가 ‘교육과정’이라면 ‘교과서’는 그 설계도대로 교육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여러 도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필수도구”라고 말한다. 이 말을 쫓자면 지금 우리가 어떤 교과서의 시대 속에 살아가는지 살피려면 당연히 그 설계도라고 할 수 있을 교육과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될 것이다. 알다시피 흔히 민주화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신자유주의화의 시기라고도 부르는 1997년, 한국은 “제7차교육과정”에 접어들었다. 이것이 기존의 교육과정과 전혀 다르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이를 “신교육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교육체제 어디가 새롭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새로운 교육체제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를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당연히 더 이상 학교는 ‘국민’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개인’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제7차 교육과정”의 목표는 “학생의 자기주도적 학습능력과 창의성 신장”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과 창의성을 가진 학생이란 물론 실은 국민의 다른 모습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고용가능성(self-employability)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스펙을 관리하는 노동자에서부터 더 이상 가계부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재무적인 삶을 설계하는 가장이나 주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우리는 자신을 돌보는 개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이 학교에서는 자기주도적 학습자의 모습으로 되풀이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국민인 한 모두를 사회의 울타리 속으로 집어넣고 그들의 생존을 보장하고 관리하던 국민국가가 사라지면서 우리가 보는 것은 교과서의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수많은 교과서와 그에 딸린 참고서가 있다. 그렇지만 모두 알고 있듯이 내신을 관리하고 수능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 교과서를 소비한다. 소문난 강사가 가르치는 학원 이곳저곳을 전전한다. 논술시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신문을 읽고, 맞춤식으로 나온 문학전집을 독파하고, 논술식 시사토론에 참여한다. 여기에는 우리는 더 이상 교과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많은 책과 자료들을 섭렵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국민의 텍스트였던 교과서의 자리에는 이제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소비하는 다양한 학습자료와 도구들이 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특목고와 외국어고, 명문대에 가기 위한 특별한 상품들, 조기유학 상품들, 영어 학습 프로그램들, 체력단련 패키지 같은 것이 줄줄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교과서가 평등한 국민-개인들의 세계에 있었던 국민의 텍스트였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교과서는 더 이상 국정교과서나 검인정교과서가 아닌 수많은 교과서 아닌 교과서들이다.

이는 더할 나위 없이 개인들의 자유와 재량에 맡겨진 개인들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연 그렇지 않다. 국민이 됨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가능성을 개인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개인이되 더 이상 개인일 수 없다. 어떤 이들이 섬뜩하게 인간 이하(subhuman)라고 부를 정도로 국가로부터의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대규모의 얼굴 없는 빈민들이 아프리카와 남미, 상당수의 아시아에서 살아간다. 이는 먼 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빈곤선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근근이 먹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내일이 불안한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 전 정신질환이 있는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베트남 신부 같은 사람들은 자기 삶을 어쩔 수 있는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한, 국민도 아닌 개인도 아닌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들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개인의 짝에서 떨어져나옴으로써 더 이상 개인으로서 살아갈 길을 잃어버렸다고 말해야 옳다.

우리가 지금 나서야 할 일은 바로 그런 국민-개인의 짝을 대신할 혹은 더 엄밀히 말한다면 개인과 짝이 되어줄 새로운 항(項)을 발견하거나 발명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는 당연히 국민의 텍스트였던 교과서, 자기주도적인 개인 아닌 개인의 교과서 없는 교과서를 대신할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교과서를 부자유와 훈육의 굴레로 간주하는 민주화 시대의 잘못된 환상에서도 역시 벗어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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