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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가 과연 빈 라덴의 소행일까? - 정의란 무엇인가, 무식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무식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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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아니면 악? 웃기는 짬뽕이야
흑도 백도 아닌 무수한 스펙트럼 보아야 논리적인 글쓰기 가능


정의가 통탄할 일이다.
아이들에게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정의란 무엇이니?”(‘무엇인가’라는 심각한 말투가 아니었다 ㅎㅎ) 은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황당한 답을 내놨다.

“음, 오랫동안 쌓인 우정 같은 거.”

맙소사. “정이란 무엇이니?”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정...의!”라고 발음을 확실히 해주었다.

“아하, 남을 용기 있게 구해주는 행동?”

중딩 준석이라고 심오한 대답이 나올리는 만무다. 한참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은 뒤 도깨비 같은 한 마디를 던진다.

“슈퍼맨 같은 거 아닐까?”

진도가 잘 안 나간다는 그 ‘정의’

오늘은 ‘정의’에 관해 생각해본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따위를 들먹일 생각은 없다. 어른도 읽기 힘든 책이다. 주변에 이 책을 산 사람은 많았지만, 완독했다는 이는 만나지 못했다. “머리가 아파 진도가 잘 안 나간다”고 했다. 소년소녀들의 눈높이에서 ‘정의’에 관해 쉽게 설명해줄 방법은 없을까.

나는 ‘선과 악’을 택했다. 이 키워드가 ‘정의’에 관해 중요한 힌트를 준다고 보았다. 매주 일요일 교회를 다니는 준석과 은서에겐 더욱 필요해 보였다. 준석에겐 ‘선과 악, 그리고 9·11’에 관해 글을 써보라고 했다. “9·11이 뭐였더라.” 준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투덜거렸다. “알아서 써.” 은서에겐 상대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주제를 줬다. 그냥 ‘선과 악에 관하여’.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선악과’를 잘못 먹고 원죄의 주인공이 됐다. 아이들이 ‘선악관’을 잘못 소화했다 체하면 이상한 신념의 화신이 된다. 아무리 문장이 빛나도 편협한 글로 전락한다. 정의를 도식적으로 판단하면, 도식적인 글이 나온다.

“지금은 알카에다 측과 이라크 등이 ‘악’이고, 미국 측이 ‘선’일지 모르나, 그들이 테러를 가한 원인을 찾기 위해 과거로 가면 미국이 ‘악’이었고 이라크가 ‘선’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준석은 흑백논리를 뛰어넘는 듯 보인다. 과거 역사까지 따졌지만 촌스럽다. 지금도 나는 알카에다와 이라크가 ‘악’으로 안 보이는데?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미국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전쟁의 깃발로 올렸다. 증거도 없이 9·11을 꼬투리 삼아 알카에다와 이라크를 악마(불량국가)로 몰아세웠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직접 쳐들어가 아작을 내기도 했다. 두 나라가 정말 악마였을까?

악마를 처단한다고 아무나 죽인 악마들

선과 악의 이분법은 ‘웃기는 짬뽕’이다. 세상엔 수백 가지의 빛깔이 있다. 흑과 백 뿐 아니라 노랑, 파랑, 빨강, 회색도 있다. 노랑 하나만 해도 명도와 채도에 따라 수백 가지다. 세상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만 있을까? 그 스펙트럼은 무수하다. 그런데 “너는 무조건 악”이라며 마구 죽였다.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 때다. 교회는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명을 학살했다.
꼬맹이들에게까지 ‘악마적 요소’를 찾아냈다며 살해했다. 마녀로 몰린 자들보다, 지고지선한 척 했던 교회가 더 악마적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악마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인터뷰 한 번 해보고 싶다. 악마로 몰린 사연을 꼬치꼬치 캐물어봤으면 좋겠다. 배경과 상황을 브리핑 받는다면 이해심이 발동할지 모른다. ‘본래 나쁜 사람’은 없음을 재확인할지도 모른다.
한데 은서는 엉뚱한 사람을 ‘악’으로 지목했다. “나에게 악은 아빠이다. 나는 글에 소질이 없다. 아빠는 수준 높은 글을 쓰라 하고, 잘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못 쓰면 화낸다.” 헉. 뒤통수를 맞았다. 선악관 교정이 시급하다~ OTL.

***

선의 비율, 51%면 안되겠니?


100%는 없다.
어쩌면 51%만으로 족하다. 주주의 출자로 이뤄지는 주식회사에서 대주주의 요건이 100%의 지분율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가장 많으면 된다. 51%만으로도 된다.

‘선악주식회사‘를 상상해본다. ‘100% 선’으로만 충만한 인간이 있을까. ‘100% 악’의 화신도 없다. 조금 더 선하거나, 조금 더더더 선하다. 조금 덜 악하거나, 덜덜덜덜 악하다. 직장에서는 선한 상사인데, 가정에서는 폭군처럼 행세하는 가장도 있다. 가정에서는 자상한 엄마지만, 직장에만 나가면 후배들을 괴롭히는 여자도 있다. 직장과 가정에서 좋은 상사와 아빠로 살지만 제3의 장소에서 나쁜 짓을 일삼아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이도 있다. ‘선악주식회사’에서 인간의 심리를 간파하고 행동 결과에 점수를 매겨 지분으로 계산한다면 재밌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아, 그 형은 선의 지분율이 63%네. 되게 착하다.” “뭐가 착하긴 착해. 그건 37%가 악하다는 얘기잖아. 무지 악하구만.” 내 선의 지분율은 어떻게 될까.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51%면 된다.

은서는 아빠가 51% 악하다고 보았는가 보다. 그러면서도 49% 선하다고 평가한 것 같아 다행이다. “나에게 악은 아빠이다”라는 폭탄선언을 해놓고 선한 부분도 있다고 감싸주었다.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왜 이렇게 썼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더 착할 때가 많다”고 했다. 아이들에겐 늘 옆에 있는 사람이 천사다.(물론 들볶는 정도가 심하면 악마지만) 은서의 글은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진실을 담았다. 트집 잡을 염치가 없다.

엄마는 선, 아빠는 악

단순하지만 비난할 수 없는 은서의 선악구분. 과자를 주는 천사, 술 마시고 들어와 아이들에게 시비를 거는 악마.

선과 악이라는 것은 착하고 나쁘고가 아니다.
선과 악은 착하게 보이고이고, 나쁘게 보이고이다.
나에게 선은 엄마이다.
어떨때는 나를 막 혼내지만, 어떨때는 나를 사랑으로 감싸주신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 엄마가 착하다고 한다.
쯧… 아직 뭘 모르는군… 그런데 조금은 맞다. 우리엄마도 착한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엄마는 공부를 좀 몇 번 틀리면 소리를 팍팍 낸다.-__-
나에게 악은 아빠이다. 나는 글에 소질이 없다.
게다가 아빠가 수준 높은 글을 쓰라하고, 잘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못 쓰면 화낸다.
하지만, 어떨 때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내가 만화책 사 달라 하면 사주고, 선물도 종종 가져오고,
다른 나라 과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난 아빠의 이런 점이 좋다.
엄마는 착하게 보이고, 아빠는 나쁘게 보인다.
하지만, 엄마의 속에는 조금 나쁘고, 아빠의 속에는 조금 착하다.

순두부와 참기름을 좋아하지만…

은서의 말이 맞다. 아빠와 엄마는 각각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오로지 잘해주거나, 오로지 구박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적인 표현을 즐겨 쓴다. 아, 순두부와 참기름이 생각난다.

‘순두부’를 좋아한다. 보통의 두부보다 콩 단백질이 덜 응고된, 야들야들한 두부다. ‘순복음’은? 야들야들 말랑말랑 순한 복음이라는 뜻일까?. ‘진짜 순수한 복음’이란 의미로 이름을 붙였으리라. 순도 100%의 복음? 내 종교적 취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얘기다. 아집이 스며있는 듯한 이름에 괜히 시비를 걸어보았을 뿐이다.

‘참’도 그렇다. ‘참기름’은 좋아한다. 김치볶음밥에 ‘참기름 한방울’은 필수다. (특정 비스켓을 들먹여 미안하지만) ‘참크래커’도 맛있다. ‘참언론’은? 몇 년 전 어떤 언론사에서 이 말을 캐치프레이지로 내건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언론사였고 그들이 돌파해야 하는 상황을 이해했지만, ‘참언론’이라는 말은 목에 생선가시처럼 걸렸다. ‘참언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과 대비되는 ‘참’의 절대성과 극단적 우월성이 싫다. 세상에 ‘도를 깨우친 사람’이란 없는 법이다. ‘도를 깨우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준석이도 진실을 깨우치려고 노력했다. 글을 보자.

9·11 테러, 그리고 선과 악

단순무식한 선악관. 준석은 오바마를 ‘현재 선’, 오사마 빈 라덴을 ‘현재 악’으로 그렸다.

미국에서 소방차 부를 때 쓰는 그 911이 아니다. 기억하는가? 2001년에 일어났던, 그리고 21세기에 최고로 큰 대참사인 9·11 테러를 말이다. 아마 질문한다면 대부분 다 안다고 대충 대답한다. 왜냐하면 세종대왕이 너무 큰 업적을 남겨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9·11 테러도 우리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세히’ 얘기하라 하면 대부분이 못할 듯 싶다. 대부분 ‘9·11’ 하면 ‘알 카에다’ 를 떠올리게 된다. 그럼, 그 알 카에다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알 카에다를 알려면 우선 오바마가 아닌,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가서 테러를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가 지시만 해도 테러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힘쓰지 않고 테러를 일으키는 주범인 빈 라덴은, 대체 무엇 때문에 테러를 일으키는 것일까?

빈 라덴은 주장한다. 9·11 테러를 비롯해서, 지금도 계속되는 테러들은 그들이 수십 년 동안 맛보았던 대량 학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만큼이라고. 그들이 거의 1백 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무슬림 세계가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 저런 이유를 토대로, 결국 빈 라덴이 말하는 이 미국에 가하는 집중적인 테러의 핵심 낱말은, 바로 ‘신성한 행위’ 이다.

하지만 미국은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3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전혀 ‘신성한 행위’ 라고는 받아들여 지지 않는다. 그것은 ‘파괴적인 행위’ 이지, ‘신성한 행위’ 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무고한 미국 시민들을 보복의 의미로 대량 학살하는 것은 정당한 ‘테러’ 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어느 한 쪽’ 이 옳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논쟁이 없다. 다들 충분한 근거와 함께 옳은 반박을 하기 때문이다. 이 테러는 당연히, 무슬림들에게는 ‘선’ 이고, 그 당시, 그리고 지금도 테러를 당하는 미국에겐 ‘악’ 이다. 그런데 국제 테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나라에 대한 ‘원한’ 이 있는 것이다. 대충 말하자면, 미국은 석유로 중동 지역을 꼭두각시처럼 갖고 놀았고, 또 예를 들어서 중동 지역의 적인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의 팔레스타인 인간 학살을 눈감아 주는 미국을 보면, ‘아, 정말 공격할 만하구나’ 한다. 하지만, 다음을 보자.

만약 어떤 일에 대한 보복을 ‘테러’ 라고 치면, 정말 원한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 테러는 정당한 테러다’ 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고? 테러라는 것이 이사람 저사람을 딱딱 집어서 공격할 수 있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행기하고 무역센터가 떨어져 내리므로 인해 무역센터 안에 있던 사람은 물론이며, 비행기 안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몇 개 다른 빌딩과 함께 그 주변에 거리를 드나들던 사람들, 모두 죽었거나 중상, 그리고 실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죽은 사람만 얼마인가? 대략 3000명이 넘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라덴이 제시한 테러의 타겟이 된 사람들이 아닌 무고한 시민들이다. 그런데도, 이 테러 라는 것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는가?

따라서 결론은, 지금은 알 카에다 측과 팔레스타인, 이라크 등이 ‘악’ 이고, 미국 측이 ‘선’일 지 모르나, 그들이 테러를 가한 원인을 찾기 위해 과거로 가면 미국이 ‘악’ 그리고 이라크가 ‘선’ 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무기를 자랑하려는 듯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이라크나 미국이나 결국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나는 이 전쟁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협상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저렇게 사람을 죽이는구나.

준석아, 근거를 대라 근거를

이 글은 공정하지 못한 전제에서 출발했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비행기로 공격한 9·11사건을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이 일으킨 것처럼 묘사했다. 공정한 척 폼은 다 잡았다. 미국이 과거에 공격당할 만한 짓을 했다고도 썼다. 테러를 가한 원인을 찾기 위해 과거로 가면 미국이 악, 그리고 이라크가 선이라는 거다. 그러면서도 보복테러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정당한 테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복잡하다. 헷갈린다. 도대체 결론이 뭐냐?

9·11 테러가 알 카에다 또는 오사마 빈 라덴과 관련됐다는 설은 미국의 추정일 뿐이다. 명명백백 밝혀진 사실은 없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를 침공했고,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체포한 뒤 사형장에서 죽였다.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이라크로 쳐들어갔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끝내 찾지 못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9,600여명의 이라크 정규군과 경찰이 전사했고, 무려 10만여 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생명을 잃었다. 미군도 4000명이 넘게 죽었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선악주식회사 프로그램’에 역사적 사실의 데이터들을 깡그리 모아모아 집어넣고 돌려보고 싶다. 양쪽에서 죽은 사람 숫자로만 선악의 지분율을 매긴다? 미국 쪽은 9·11때 3천여 명의 인명피해(미국 국적의 사람만 있지는 않았지만)와 미군 피해 4000명. 총 7000여명이 죽었다고 치자. 이라크는 10만 명이 넘게 죽었다. 열 배가 넘는다. 아니다. 먼저 공격을 한 자에게 책임이 있다.

한국전쟁도 ‘남침’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책임을 북한에 돌리지 않는가. 근데 이라크가 전쟁을 일으켰나? 땅에 묻힌 후세인이 벌떡 일어나 “자다가 왜 봉창을 두드리냐”고 할 것만 같다. 이런 논리라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은 무고한 피해자이다. 후세인은 선인가? 그는 23년간 이라크를 쥐고흔든 독재자였다.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렇다고 미국의 주권국가인 이라크를 멋대로 침공하고 대통령까지 처형한 일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게다가 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가 대립할 땐 이라크 후세인 편을 들어줬던 미국이었다. 그럼 뉴욕 세계무역센터 빌딩은 누가 때렸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미국을 증오하는 세력이 했겠지.

9·11은 준석에게 버거운 주제였다. 이 정도 쓴 것만으로도 격려를 해줘야 할지 모른다. 선악이 명쾌하게 구별되기란 쉽지 않단다. 법원의 판결이 수시로 뒤집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검사가 징역10년형을 구형했던 피의자가 법원의 1심 판결에선 무죄를 받기도 한다. 2심에서는 다시 유죄가 되었다가, 3심인 대법원에서는 무죄가 될때도 있다. 이렇게 어떤 사건의 최종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어렵다. 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엄정한 ‘근거’를 가지고 써야 한다. 준석의 글엔 근거가 없었다.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진실이라 단정해버렸다. 9·11을 알 카에다나 빈 라덴, 이라크가 일으켰다는 논거 말이다. 네가 붙인 선악의 딱지는 딱지치기할 만한 가치도 못 된다. 논리의 중심이, 세계무역센터 빌딩처럼 무너져버린 글이 돼버렸다.

이제 ‘선악관’의 요점을 정리해보자.

1. ‘절대’가 아니라 ‘상대’다.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다. 그 평가기준도 시대상황에 따라 바뀐다. 쉬운 예로, 동성애가 말도 꺼낼수 없을만큼 죄악시될 때가 있었다. 멀지도 않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보편적 인권으로 인정을 받는 추세다. 요즘 어른들이 많이 사용하는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람이더라도 보수적인 기질이나 측면이 있고,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이더라도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2. 누구 입장에서 볼 것이냐.

세상을 ‘보는 자리’가 중요하다. 어디서 보느냐,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림이 다르다. 부자의 입장에서 볼 때와 가난뱅이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늘땅 차이다. 권력자의 입장이냐, 힘없는 서민의 입장이냐에 따라서도 그렇다.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는 결국 ‘철학’의 문제다. 다른 말로는 ‘세계관’이라고도 한다.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

대부분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세상을 보려고 한다. 상식적으로 그게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 처지에서, 특히 자신보다 못한 사람 처지에서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려운 말로 “존재가 의식을 배반한다”고 하는데, 이런 걸 ‘정의’라고도 부른다. 아,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해답이 나왔나? 그런 사람들이 많이 나올수록 세상은 건강해진다.

이제 오늘의 결론. 이분법적인 선악관에서 벗어난다는 건 한마디로 ‘합리’다. 휘어지지 않은 선악관은 합리적인 글의 첫 단추다. 결론으로, 그 화두 하나를 던진다.

“무식이란 무엇인가.”

맨 앞에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 이름을 예로 들었다. ‘정의’와 ‘무식’의 관계는 생뚱맞아 보인다. 무식이란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눈이 어두운 것도 무식이다. 외국의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따고도 무지몽매한 글을 쓰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의 ‘무식’이란 천박한 세계관이다.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경계를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얼토당토않은 기준을 들이대는 경우다. 미국은 무조건 선, 북한은 무조건 악으로 보려는 시각이 그 중 하나다. 거꾸로 진보는 무조건 선, 보수는 무조건 악으로 몰아세우는 태도도 문제가 있다.

오늘, 무식한 글을 쓴 준석아. 무식해지지 않으려면 역사적 이야기들을 많이 알아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되, 누구의 편에 서서 볼 지도 생각해야 한다. 무식, 노(no)!!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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