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단독주택에서 23년 살기 혹은 23년간의 고행
나는 서울에서 23년째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아파트가 득세하는 서울에서 단독주택을 고집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큰 고행인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우선 90년대 초까지 우리 집의 집값은 이른바 강남에 속하는 구(舊) 반포아파트 큰 평수와 같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아파트값이 오르더니 심할 때는 구 반포아파트 큰 평수의 값이 우리 집값의 네 배까지 되었다. 그러니 아파트값이 오를 때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아파트로 옮기자는 말이 아니 나올 수가 없다. 나는 그때마다 아파트가 닭장이지 무슨 집이냐, 나는 죽어도 그런 데는 답답해서 못 산다, 집 한 채 지니고 사는데 그게 5억이 되든 20억이 되든 무슨 상관이냐고 버텼다. 그런데 그것도 집값 차이가 두 배 정도 될 때 얘기지 세 배, 네 배 되면 말이 궁색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아파트값이 오를수록 코너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아파트로의 이사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가는 판에 강력한 응원군이 나타났다. 아이들이 얼굴이 파래져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에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다. 작은아이는 그 집에서 태어나 그때 초등학교 고학년이고, 큰아이는 그 집에서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해서 고등학생이었다.
“이 집이 우리 고향인데 왜 이사 가?”
큰녀석이 몹시 의아한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맞아, 여기가 우리 고향인데. 우리 용이는 어떻게 하고 아파트로 이사 가?”
작은녀석이 맞장구를 치며 울상을 지었다. 참고로 ‘용이’는 일체의 도둑과 잡상인의 접근을 불허하는 우리 집 진돗개의 이름이다. 아마 고향이란 말이 나에게 이때처럼 찡하게 가슴에 와 닿은 적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거봐, 애들이 고향이라고 마음 붙일 데가 있으니 얼마나 좋아. 애들이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또 고향이니 학교에서 왕따 당할 걱정도 없고. 그거 10억, 20억으로 살 수 없는 거야.”
나도 슬쩍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단독주택에 주저앉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의 도시정책이란 게 단독주택 거주자들에겐 한마디로 “너 이래도 계속 단독주택에 살래?” 하고 윽박지르며 가하는 고문에 가깝다. 우선 그 재산세란 게 묘하게도 값이 네 배나 되는 강남의 아파트보다 더 많이 나온다. 건물분 재산세 외에 토지분 재산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종합부동산세가 생기고 나서는 이게 시정이 되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종부세를 사실상 폐지하고 이전에 받은 걸 환불까지 해주었다. 재산세 고지서를 받을 때마다 거기에 ‘야이 등신아 너 이렇게 더 많은 세금까지 뜯기면서 이 불편한 데 계속 살 거야?’라고 씌어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도 그깟 몇십만 원이야, 10억도 아이들을 위해서는 우습다고 치부했는데 무시할 수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주위에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서 시야와 햇빛을 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동네의 단독주택 주인들이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한다. 그냥 떠나면 좋은데 단독주택을 부수고 빌라를 지어 팔고 간다. 업자와 계약을 맺어 그렇게 하면 그냥 파는 것보다 두 배 이상 돈을 챙기는 모양이다. 나날이 빌라가 늘어나면서 주차난 등 생활여건이 악화된다.
그래도 끈질기게 버텼다. 아이들이 고향을 버릴 수 없다는데 어쩌랴. 그런데 다세대주택을 사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애초에 우리 동네가 재개발될 거라고 생각하고 이사를 오는 모양이었다. 빌라들이 늘어나더니 우리 동네를 재개발해 아파트를 짓는다는 추진위원회란 게 만들어졌다. 게다가 무슨 도시개발법인지 뭔지가 있는데 주민 70퍼센트인지 80퍼센트인지의 동의만 받으면 나머지 사람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제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단다. 끝까지 반대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고 협박이 대단했다. 하는 수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 추진위원회란 게 추진이라도 빨리하면 좋은데 만날 싸움박질만 하며 5년, 6년 부지하세월이다. 그사이에 집은 낡아서 장마철엔 비도 새고 그런다. 상태로 봐선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데 재개발이 걸려 있으니 리모델링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고민하다가 1년 전쯤 아예 지금 집을 팔아버리고 다른 데 단독주택을 사서 이사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헛수고였다. 우리가 살 만한 가격의 단독주택이 있는 지역은 우리 동네와 사정이 거의 비슷했다. 이미 재개발조합이 플래카드를 걸고 있거나,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재개발이 안 되는 단독주택 동네라고 해서 가보면 재벌가와 부호들이 사는 곳이어서 집값이 최소한 수십억이 넘었다. 나는 근 한 달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절망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무슨 공산주의 국가도 아닌데 대부호가 아닌 이상 서울에서는 주거형태를 선택할 자유가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
서울이란 도시는 잠시 머물다 떠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시지 영구히 깃들어 살 수 있는 도시가 이미 아니었다. 재개발을 추진하는 곳까지 치면 서울은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다. 나는 성북동의 대사관 관저들이 들어서 있는 단독주택촌을 둘러보는 걸 끝으로 집 구하는 걸 포기했다. 뒤에 산을 끼고 숲에 둘러싸여 있는 집들은 참 아름다워 보였지만 우리 같은 서민은 쳐다볼 수도 없는 집들이었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다 커피숍에 들어가 지친 다리를 쉬었다. 무료하게 앉아 창밖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두서없이 도시와 집들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도시는 흔히 꽃에 비유된다. 인간이 거주하기 위해 우주의 축소판으로 건립한 코스모스라는 뜻이다. 코스모스란 카오스, 즉 혼돈으로부터 인간과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성(聖)화하는 질서의 세계이다. 서울은 이러한 의미의 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인상비평으로 말하자면 서울은 천민자본의 끝없는 탐욕이 뱉어놓은 콘크리트 배설물에 불과해 보였다. 거기엔 아무런 질서도 철학도 없어 보였다.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주거에 대해 철학은 없고 탐욕만 있는 사회가 어떻게 안 망하고 여기까지 굴러올 수 있었는지 참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문득 어릴 적 살던 시골집부터 지금까지 살던 집들과 집에 얽힌 이런저런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