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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현대적 의미 - 김진경의 신화로 읽는 세상

김윤식은 어느 글에선가 김소월은 우리 언어의 가장 깊은 지층인 고생층(古生層)에 닿아 있는 시인이고, 서정주는 삼국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불교적(佛敎的) 지층에 닿아 있는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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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현대적 의미

김윤식은 어느 글에선가 김소월은 우리 언어의 가장 깊은 지층인 고생층(古生層)에 닿아 있는 시인이고, 서정주는 삼국시대로 거슬러올라가는 불교적(佛敎的) 지층에 닿아 있는 시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김소월의 시가 닿아 있는 것은 삼국시대 훨씬 이전의 유목적 지층이며, 우리 언어의 가장 깊은 뿌리 부분이다. 그래서 김소월의 시는 서구 문학이론으로는 제대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유목민들의 언어인 우랄알타이어, 그에 속한 한국어가 형성되어 나온 배경과 특징, 그것을 담은 신화들에 바탕을 둬서 접근하지 않으면 김소월의 시는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엔 무척 단순해 보이는 시인데 어떻게 그렇게 깊고 큰 울림을 주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가 우리 언어의 가장 고대적인 지층에 닿아 있다고 해서 케케묵은 과거인 것은 아니다. 가장 깊은 뿌리에 닿아 있다는 것은 가장 강한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되살아온다는 걸 뜻한다. 그래서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김수영의 절창 「풀」에서 김소월 시의 바람을 만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전문

이 시를 김소월의 시와 비교해보면 바람과 시적 화자의 관계가 거꾸로 뒤집혀 있는 걸 알 수 있다. 김소월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불어왔다 가는 바람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애상에 잠겨 있는 수동적 존재이다. 그런데 김수영의 시에서는 거꾸로이다.

위 시의 1연에서는 바람이 능동적인 존재이고 풀은 동풍이 불어서 눕고 날이 흐려서 우는 수동적 존재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2연에서부터 역전이 되기 시작한다. 풀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울고, 바람이 부는 강도보다 훨씬 더 깊이 눕기도 한다. 풀은 단순히 부는 바람이나 날씨에 일방적으로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다. 3연에서는 바람과 풀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다. 풀은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3연에서는 풀이 능동적 존재이고 바람은 그 풀의 행위에 의해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이 진정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눈에 보이는 풀이나 그 풀을 흔들고 가는 바람이 아닐 것이다. 김수영이 진정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바람=능동적 존재, 풀=수동적 존재’의 관계를 ‘풀=능동적 존재, 바람=수동적 존재’로 역전시키는 어떤 역동적 에너지, 이 시의 내면을 지나가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만들어내는 역동적 바람이었을 것이다. 이 역동적 에너지, 시의 내면을 지나가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만들어내는 역동적 바람은 ‘눕는다눕는다, 일어난다, 운다, 웃는다’의 반복 및 어미변화와 ‘먼저, 늦게, 더, 빨리’ 등의 부사어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스트 김수영의 시는 김소월의 시를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김수영은 단순히 이어받는 게 아니라 김소월의 운명적 바람을 코페르니쿠스적 바람으로 바꾸어 재창조하며 시대를 선취하고 있다.

오랜 세월 농경 정착생활을 했던 우리는 새로운 유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전면적 도시화가 완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도시인의 삶은 정처없는 떠돌이라는 점에서 유목적이다. 또 사이버시대라고 하는데 사이버의 세계야말로 새로운 유목의 세계이다. 게다가 이른바 세계화의 흐름이 현대인의 유목민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우리의 유목적 바람이 갖는 역동성을 시대에 맞게 잘 살리면 이러한 시대에 힘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과 “거대한 뿌리”가 없는 유목의 말발굽은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우리를 짓밟고 유린하? 위해 달려오는 말발굽일 뿐일 것이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 김수영, 「거대한 뿌리」 부분

요즈음 집단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유목 이미지의 광고가 자주 눈에 띈다. 나는 그런 광고를 보면 우리가 밖을 향해 달려나간다는 느낌보다는 누군가 우리를 휩쓸어버리기 위해 노도처럼 말을 타고 밀려오는 것 같은 피해의식부터 앞선다. 거품과 투기에 휩싸인 도시의 아파트들, 어린애의 혀까지 수술하는 영어 광풍,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을 양산하는 한국산 다국적기업들, 사이버공간을 가득 채운 정부 여당알바들의 분단 이데올로기에 찌든 댓글들, 동족을 원수로 돌리고 사익을 추구하며 재산을 외국으로 빼돌리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모리배들 등등의 말발굽은 아무리 같은 한국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짓밟고 유린하기 위해 달려오는 말발굽일 뿐이다. 그 말발굽이 일으키는 바람을 유목의 바람으로 착각하지 말자. 거기엔“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도 없고 인간도 사랑도 없다.

진정한 유목의 바람은 우리 가슴속의 가장 깊은 지층을 이루며 여전히 미래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김수영의 시「풀」의 내면을 지나가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키는 역동적 바람은 그런 점에서 여전히 미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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