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퍼러리 리듬 앤 블루스는 1990년대 초반부터 양준일, 이현도, 솔리드(Solid) 같은 뮤지션들에 의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적인 정서를 강하게 내비친 발라드로 변형되는 추세를 보였다. 자국의 상황에 어울리게, 우리나라 대중의 기호에 맞게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바이브레이션을 넣는 창법만을 맹목적으로 따라 한다든가 흑인들의 제스처만 흉내 내기에 급급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 장르를 잘 모르는 사람으로서는 ‘아, 저런 게 R&B구나’라고 인식하게끔 하는 이상한 풍토가 만들어지기 십상이었다.
다행히 이런 상황이 고착화되지는 않았다. 흑인음악이 대중음악에서 점점 부피를 더해감에 따라 작곡가, 보컬리스트들의 리듬 앤 블루스에 대한 탐구도 깊어졌다. 교포 또는 유학파 출신 뮤지션들은 오리지널리티를 구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 토양에 맞는 변형 작업과 정통성을 찾는 과정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국내 리듬 앤 블루스는 여러 뮤지션의 노력으로 차츰 결실을 맺는 중이다. 어떤 이는 고전을 쫓아가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았던 펑크(funk)를 선전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이는 네오 소울을 전문으로 다루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구 팝의 트렌드를 따라 전자음이 가미된 업 템포의 리듬 앤 블루스를 선보이는 뮤지션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가운데 지난 7월 초에 출시된 브라운 아이드 소울(Brown Eyed Soul)의 싱글 「Can't stop lovin' you」는 R&B의 국지적 흐름인 빈티지 사운드를 앞세워 리듬 앤 블루스 영역에서 다양한 접근이 펼쳐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했다.
한국 R&B 신은 이렇게 날로 풍성해지고 있다. 다방면에 걸쳐 실험이 행해지고, 정통과 한국적인 느낌을 혼합, 구현하려는 행보가 각처에서 계속된 덕분이다. 리듬 앤 블루스가 해를 거듭할수록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체구를 키워 가고 있는 시점에서 새천년 이후 출시된 노래들 중 꼭 주목해야 할 수작들 10곡을 선별했다.
소울사이어티(Soulciety) 「Mr. Player」 < Two Colors >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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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 앤 블루스라기보다는 재지(jazzy)한 팝에 가깝지만 노래는 좋은 멜로디, 섬세한 편곡, 근사한 보컬 삼박자를 고루 갖췄으며 이 셋의 아름다운 합일을 보여 줬다. 유려한 선율에 프로듀서 윤재경의 연출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 최대 매력.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듯한 피아노 연주, 후방에서 리듬을 보강하는 기타와 베이스, 절제된 관능을 드러내는 색소폰과 희미한 빛깔로 곡을 풍성하게 하는 퍼커션까지 각 파트가 서로의 소리를 해하지 않으며 깔끔하게 조화됐다. 여기에 보컬리스트 박정은의 요염한 표현까지 더해져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인 노래를 완성했다. 소울사이어티가 풍기는 부드러움과 고혹의 대기는 마치 한국판 「Smooth operator」 같았다.
휘성 「With me」 < It's Real > 수록
휘성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을지 모르겠으나 「With me」는 미국 본토의 메인스트림 R&B의 윤곽을 유지한 곡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도 충분히 호소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잔잔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절정을 들인 구조가 곡의 긴장감을 살렸다면 휘성의 진한 감성이 배어나는 보컬, 시원스러운 가창은 재생되는 내내 듣는 이들을 노래에 집중하게 했다. 「안 되나요」가 재능 있는 보컬리스트의 발견이었다면 「With me」는 국내에도 리듬 앤 블루스를 잘 소화하고 그 장르에 잘 어울리는 가수가 나타났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슬로우 잼(Slow Jam) 「다가와」 < Midnight Love > 수록
정연준의 사이드 프로젝트 슬로우 잼의 등장은 우리나라 리듬 앤 블루스가 다채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사건이었다. 남녀가 사랑을 나누기 전에는 분위기를 띄우는 것으로, 본 행사에서는 격정의 몸짓을 부추기는 배경음악으로, 일을 치른 후에는 여운을 남기는 용도로 자리매김한 ‘밀어 전문 음악’ 슬로우 잼을 국내에서 주 장르로 삼았다는 것만으로도 혁신적이었다. 결과물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노랫말은 한 편의 침상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섹시한 내러티브를 나타냈으며 앤(Ann)과 정연준의 보컬은 남녀의 육체적 사랑이 이뤄지는 그 공간의 끈적끈적함과 정열적인 기운을 온전히 재현해 보였다. 슬로우 잼의 출현은 이후 휘성과 이현도의 합작 ‘우린 미치지 않았어’ 같은 슬로우 잼 노래가 나오는 데 물꼬가 되었다.
아소토 유니온(Asoto Union) 「Think about' chu」 < Sound Renovates A Structure > 수록
간결함에도 중량이 전달되는 곡이었다. 큰 폭의 변화 없이 단조로운 멜로디로 진행하면서도 뇌리에 깊게 박히는 무게감을 「Think about' chu」는 지니고 있다. 또한, 리듬 앤 블루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름기를 제거해 담백함을 내기도 했다. 지나친 바이브레이션이나 애드리브로 부담감을 주는 R&B 곡이 더러 있는 반면에 여기에서는 김반장이 과하지 않은 추임새로 어느 정도의 맛만 내서 안온함을 내비친다. 실제 악기 연주로 이룬 반주는 노래에 더욱 정감을 가게 하는 요소. 멋스러운 밴드형 R&B를 접한 순간이었다.
노아(KNoah) 「Always on my mind」 < The Soul Singer > 수록
8년 만에 새 앨범을 공개하면서 노아는 R&B를 자기 음악에 녹여 내려 했다. 그렇지만 그의 시도는 적극적이지 못해 수록곡 전체에 걸쳐 흑인음악의 색채를 분포한 것은 아니었다. 조금은 애매했으나 「Always on my mind」에서 만큼은 달랐다. 창법도 확 바뀌었고 음색도 다르게 연출함으로써 리듬 앤 블루스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진성과 가성을 옮겨 가면서도 깔끔함을 유지하는 보컬과 몇 번만 들으면 귀에 익을 흡인력 있는 후렴은 곡의 분명한 매력이었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Fly To The Sky) 「Sea of love」 < Sea Of Love > 수록
힙합풍의 둔중한 비트에 세련미를 더하는 스트링 연주로 강함과 순함을 함께 내비친 반주는 흑인음악 본연을 살리면서 한국적인 감성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유영진의 공략은 주효해 이보다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던 힙합 소울 장르를 표방함에도 대중성까지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곡의 분위기와 구성도 훌륭했으나 브라이언과 환희 각자의 역량이 뛰어났고 둘이 멋진 하모니를 이뤘기에 노래가 더 살 수 있었다. 조금은 거친 환희, 그와는 또 다르게 서글서글함이 느껴지는 브라이언의 보컬은 서로 상반되는 매력을 풍기며 곡을 맵시 있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근사한 남성 R&B 듀오가 있었다는 것을 이 노래를 통해 언제든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전영진 「널 사랑해」 < All-In-One > 수록
리듬 앤 블루스에서의 복고 열풍은 1960, 70년대 스타일로의 회귀가 대부분이었지만 전영진의 「널 사랑해」는 1980년대 중후반 유행했던 리사 리사 앤 컬트 잼(Lisa Lisa And Cult Jam) 류의 라틴 프리스타일과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뉴 잭 스윙을 겨냥했으며 그것의 정중앙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관통했다. 이 곡은 그런 이유로 국내 R&B 신에서 과거 문법의 재현과 다양성 확충을 동시에 거머쥔 중요한 의미로 남을 것 같다. 노래가 품고 있는 두 장르의 공통된 특징인 댄서블함을 온전히 표현했다는 점도 특기할 사항이지만 연주, 노래, 프로듀싱을 홀로 담당한 전영진의 다재다능함도 간과할 수 없다. 원 맨 밴드라는 조건을 놓고 봤을 때에는 서구의 어떤 R&B 곡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자부심을 갖게 하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리치(Rich) 「던질 수 없는 피자」 < 미치기 직전에 만든 앨범 > 수록
시공간을 나눠 상황을 열어 가는 가사는 영미의 리듬 앤 블루스에서는 익숙해도 우리 대중음악에서는 그동안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를 멜로디로 표현되는 다소 한정된 프레이즈에 담아내기란 쉽지 않을 텐데 「던질 수 없는 피자」는 서술, 고민, 회상을 반복하면서 느슨해질 수 있는 위험 요소를 차분히 극복했다. 일상과 현실에서 친근한 소재의 사용과 형상화,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 이것들로 화자와 청취자 간의 감정 공유를 유도하는 것이 무척 특별하다. 거기에 남부 힙합 비트에 콰이어를 접목한 편곡과 부르는 이의 준수한 기량이 합쳐져 말끔하게 정제된 음악을 만들었다.
김신일 「Sunshine」 < Soul Soul Soul > 수록
빼어난 감각과 눈썰미, 곡을 분석하는 깜냥이 있다고 해서 과거의 문법을 온전히 복구할 수 있는 것은 ?니다. 대강의 분위기, 스타일을 조성하는 작업은 가능할지 몰라도 제 맛을 내기는 어렵다. 김신일은 지난날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옛 리듬 앤 블루스가 지닌 멋과 향을 구현했다. 흥을 돋우는 셔플 리듬, 기타와 베이스, 브라스 등 각종 악기의 농밀한 조화, 탁 트인 보컬까지 어디 하나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후반부에 가서 깔리는 코러스는 1960, 70년대 큰 활약을 보인 남성 중창 그룹들을 연상하게 할 만큼 아름답도록 포근하다. 이런 게 바로 재현이며 복원이다. 제목처럼 국내 R&B 신의 한 줄기 ‘햇살’이 될 노래다.
정훈희 「No love (with 인순이)」 < 40th Anniversary Celebrations > 수록
엘튼 존(Elton John)이 모타운 듀엣 사운드에 대한 무한 애정으로 키키 디(Kiki Dee)와 함께 「Don't go breaking my heart」를 불렀던 것처럼 김신일 또한 모타운식 듀엣 곡 제작을 숙원 사업으로 마음속에 계속해서 품고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부르지는 않았으나 그 꿈은 정훈희의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에서 현실로 이뤄졌다. 김신일의 훌륭한 멜로디 주조 감각과 빈틈이라곤 좀처럼 보이지 않는 마감 능력이 한껏 발휘되었으며 정훈희, 인순이의 숨결이 더해져 모타운 스타일을 완벽하게 환생시켰다. 둘은 후반부의 스캣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기교도 나타내지 않고 스트레이트하게 노래를 부르지만 소박함과 단정함으로 노래를 충분히 멋스럽게 완성하고 있다. 두 절창의 원숙하고도 노련한 표현을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리듬 앤 블루스 영역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 전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듀엣 곡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글 / 한동윤(bionics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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