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 <호우시절>, 2009, 허진호 감독 -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게 아름다운 것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시간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아름다운 거지요. 시간은 제 아름다움을 숨긴 채 그 시간 속에 있는 존재나 현상들을 아름답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죽음이 예정된 삶이 아름답고, 이별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름다운 것은 그 삶이나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시간 자체가 아닐까요? 그래서 시간은, 시간이란 것이 우주에서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그 절대미의 권좌를 잃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의 아름다움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는 거지요.
영화의 제목인 ‘호우시절’의 의미도 역시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알려진 대로,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때를 알고 내리는 비가 그리 쉬울까요? 어쩌면 그 제목은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호우시절’이란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의 시구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제목에 비추어 본다면 봄밤에 내리는 비겠지요? 영화 속에서도 ‘동하’와 ‘메이’, 두 남녀가 비를 함께 맞았을 때 비로소 진심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거든요. 마침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비’라는 핑계가 생긴 거지요.
두 사람이 진심을 숨길만 한 이유 또한 ‘시간’이란 것에 있습니다. 이 영화의 시작조차 바로 시간의 차이, 즉 시차로부터입니다. 배우 정우성이 연기했는데요, 주인공 ‘동하’가 비행기에서 중국 사천공항에 내리기 직전 시계를 한 시간 전으로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국과 한국의 시차가 한 시간인 거죠. 그리고 사천의 두보초당에서 ‘메이’를 만납니다. ‘메이’는 중국인이고 이들은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관계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서 다시 중국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서로 연락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각자에게 많은 일이 생겼겠지요.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해 서로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머뭇거리는데요, 여기서 또 다른 시차(時差/視差)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유학시절과, 다시 만나게 된 시간 사이의 시차인 것이죠. 이 시차는 둘의 기억조차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둘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기억의 조각들을 맞추어 보려 하지만 서로가 기억하는 내용이 좀 달라요.
특히 동하는 메이가 기억하는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고집을 하는데요, 그때, 메이 역의 고원원 씨의 눈빛이, 계속 어떤 갈증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더라고요. 무슨 말을 할듯하다가 딴청을 피우고, 손을 내밀듯하다가 마음을 접어버리는 듯한 행동이랄까요? 어느 신문에 실린 정우성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요, 정우성씨는 고원원 씨의 다양한 리액션을 장점으로 꼽더라고요. 스테레오타입이 아닌, 그러니까 상투적이지 않은 그녀만의 독특한 앙상블 연기가 강점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메이와 동하의 관계에서 더욱 긴장이 느껴진 것은, 이들 사이에 놓인 ‘시차’라는 갭 말고도 ‘언어의 차이’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하와 메이 사이에 통하는 언어는 영어밖에 없어요. 동하는 중국어를 모르고 메이는 한국어를 모릅니다. 결국 동하와 메이가 함께 사용하는 영어는 둘에게는 모두 모국어가 아니고 이방의 언어인 셈입니다. 우리도 어쩌다 외국인과 외국어로 대화할 때면, 어쩐지 자기 자신이 아닌 듯한 낯섦을 느끼잖아요. 낯선 상대와 만나기 전에 먼저 낯선 자신과 조우한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이런 낯선 자신과의 대면이 사실 연애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보통, 사랑을 하게 되면, 블랙박스에 들어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가 하나씩 공개되는 듯한 느낌을 받잖아요. 동하와 메이의 사랑도 이렇게 점차 기억을 맞추고, 몰랐던 자아를 알게 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들에겐 보통 연인들이 겪게 되는 낯섦에, 시차와 언어로 인한 또 다른 낯섦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간절하겠지요?
이 영화는 두보와 꽤 관련이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도 그렇지만, 왜, 두보의 삶이 그리 순탄치 못했잖아요. 그에게 ‘호우시절’ 또한 드물었으리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래서 영화에서 내리는 따뜻한 봄비에서도 어쩐지 쓸쓸한 느낌이 있었어요. 메이가 사용하는 두 가지 언어에서도 그런 점이 비치는데요, 그녀가 중국어로 말할 때는 어쩐지 우울해 보입니다, 영어로 말할 때는 산뜻해 보이는 반면에요.
두보와 관련된 장면을 또 하나 말씀드린다면, 동하가 두보초당에 가서 맨 처음 두보의 입석상을 마주했을 때 그 두보의 긴 손가락을 먼저 천천히 만지거든요. 그런데 나중 또 다른 장면에서 메이의 손가락을 그렇게 만지는 장면이 있어요. 메이와 동하는 모두 두보의 시를 사랑하고요.
그리고 바로 그 두보의 초당에서 대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렸는데, 저도 이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오니 낙엽이 바람 사이에서 마른 소리를 내며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이 한 순간 영화의 한 컷으로 편입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우리의 일상도 영화와 오버랩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글을 연재하는 동안 그런 점들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었는데요,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이 연재의 마지막인데요, ‘호우시절’이라는 영화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 되니 또 다른 감회가 생기는데요. 영화를 많이 보시라는 말씀보다는 좋은 영화에 대한 잔상을 많이 남기시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전해 드리고 싶어요. 영화에 대한 잔상은 각박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고, 또 간혹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