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태는 “뉴스의 블랙홀”이라 불렸다.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사건사고들이 천안함이라는 대형이슈에 빨려들어가버렸다. 평소 같으면 전국이 발칵 뒤집힐 만한 대형사건들도 반짝 관심받다 익명의 뉴스들 속으로 사라져갔다. 천안함 사태가 이 정도로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건 단지 희생자들이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건의 발생과 대처 과정이 발달한 커뮤니케이션 수단들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공유되었으며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거대한 모자이크를 이루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산해냈다. 한국의 시민들은 한 나라의 정부와 군대가 젊은 청년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무능할 수 있는지를 그야말로 실시간(real time)으로 목격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탄식했다.
“도대체 이게 국가인가!”
침몰 후 약 두 달이 지나서 정부와 군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천안함이 침몰한 원인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이라 발표했다. 며칠 뒤 이명박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해 “북한은 자신의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면서 “남북교역과 교류를 중단하고 이 사안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 북한의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남북관계는 극도로 얼어붙었고, 사실상의 준 전시상황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정부와 군의 유례없이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는 “북한의 소행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증거는 침몰 해역 인근에서 인양한, ‘1번’이라는 펜글씨가 선명히 적혀 있는 어뢰의 잔해였다. 무시무시한 진실이,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범인이 드디어 밝혀진 셈이다.
20년 전이었다면 슈퍼마켓의 라면과 생필품이 사람들의 사재기로 모조리 동이 나고, 전국의 학교에 일제히 휴교령이 내려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런데 2010년 5월 말 현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선거 시기 특유의 어수선함을 제외한다면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비교적 평온한 일상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부발표에 대해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폰 뒷면에 파란색 펜으로 ‘1번’이라 쓴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이게 바로 북한산 아이폰”이라며 정부발표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관련한 풍자와 패러디가 봇물을 이루자 경찰과 검찰은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며 강경한 태도로 단속에 나섰고 이런 ‘과잉대응’에 대해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반면 대다수 외국언론들은 한반도의 긴장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앞다투어 보도했지만 그 초점이 ‘북한의 비겁한 공격’이라든가 ‘1번 어뢰’ 따위가 아니었다. 대부분 한반도의 긴장이 유럽과 미국 증시에까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는 것은 세계경제에 더욱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경고였다.
분명, 뭔가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같은 사건을 두고 국내와 국외, 그리고 남한정부와 남한시민들 사이의 반응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 인식과 판단의 온도 차가 이토록 심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왜 세계언론들은 ‘1번 어뢰’, 즉 한국과 미국의 첨단 감시망에 전혀 포착되지 않고 1,200톤급 초계함을 단 한방에 두 동강 낸 북한의 군사무기에 대해 이토록 관심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왜 한국의 많은 시민들은 모여서 북한을 규탄하기보다 이명박 정부와 군 지휘부를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사람들의 이 뿌리 깊은 불신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국가라는 이름의 ‘양치기 소년’일본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경우는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에서도 열이면 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게 바로 ‘위험에 대한 감각’이다.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아찔하게 깎아지른 북한산 바위벽을 슬리퍼를 신고 뒷짐을 진 채 태연히 오르내리는 한국 노인들을 본 어느 일본인은 “내 평생 이렇게 무서운 광경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카레이싱을 방불케 하는 한국인의 운전습관을 보고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무엇보다 그들을 경악하게 하는 건 북한의 도발에 대한 남한사람들의 태도다. 일본인들 눈에는 당장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데 한국사람들은 너무나 태연자약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일본인들의 경우, 일상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의 이런 면을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에도 똑같이 적용해 ‘남한사람들은 전쟁위험에 대한 감각도 마비되었다’는 식으로 판단해버리기도 한다. 한국인 중에서도, 특히 ‘안보’를 강조해온 세력일수록 이런 식의 설명에 찬성하는 경향이 강하다. 과연 그럴까?
일단 북한의 군사력을 매우 과장하면서 김정일 정권을 지속적으로 ‘악마화’해왔던 일본 미디어가 일본인들의 인식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전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전쟁위험을 느끼는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 크다. 이건 한국인들이 지속적인 북한의 도발을 경험한 탓에 전쟁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상대적으로 무뎌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식의 피상적인 설명으로는 이 현상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없다. 그보다는 전쟁위험을 느끼는 감각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좀 더 ‘세밀하다’고 표현해야 더 타당할 것이다. 무슨 의미일까.
예를 들어, 전쟁위협을 실제로 겪을 일이 없는 외국인들에게 전쟁이라는 것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둘 중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는 사태다. 물론 한국인들에게도 남북한 간의 전쟁이라는 건 어쨌든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공포스런 사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이 차츰 고조되고 다시금 완화되는 여러 단계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몸으로 체험해왔기 때문에, 상황판단이 ‘전쟁 아니면 평화’라는 식으로 단순화되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바꾸어 말해본다면, 남북 간의 어떤 충돌이 하나의 사건으로 명백히 드러났을 때조차도 그 사건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고려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그런지는 차치하고, 남한사람들은 전쟁이 벌어질지 벌어지지 않을지에 대한 징후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경향이 있다. 요컨대 남북 간의 갈등에 대해 한국사회에는 사회적으로 축적되고 학습된 독특한 감각, ‘남북갈등의 맥락을 고려하는 감각’이 존재한다. 이런 감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수십 년간 거짓말을 일삼아온 정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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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10. 3. 29, [손문상의 그림세상] 꼬리에 꼬리 무는 ‘천안함 미스테리’ | |
남한에서는 선거 시기에 간첩사건 등을 조작?발표해 선거결과에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 소위 ‘북풍공작’이 끈질기게 존재해왔고 그 시도들이 대개는 그것을 시도한 측이 만족할 만한 결과로 귀결되어 왔다. 그것은 군사정권, 그리고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보수세력의 특기였다. 수많은 사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별나게 황당했던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1986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벌어진 평화의 댐 사기극이다.
당시 이규호 건설부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금강산댐(임남댐)의 저수용량이 200억 톤이며 이를 한번에 방류할 경우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고 발표했다. 국회의사당은 지붕만 남고 63빌딩의 3분의 2가 잠긴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모형실험까지 동원되어 방송됐고, 남한사회 전체가 글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언론에 출연해 초당 230만 톤의 물이 12~16시간 내에 서울을 덮칠 것이라며 거듭 경고했고, 당연하게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88서울올림픽을 망치기 위한 북한의 수공작전’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는 이유로 꼽혔고, 전국에서 수많은 반공집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KBS와 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충실한 스피커’로 기능했다. 이들 언론들은 연일 북한을 규탄하고 금강산댐 위협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월간 『말』과 같은 진보매체와 소수의 운동권들 외에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류언론들은 곧장 ‘대응댐’ 논리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우리 쪽에서도 댐을 만들어 북한의 수공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탄생한 게 바로 평화의 댐이었다. 정부와 언론들은 1986년 12월부터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국민모금을 대대적으로 시작했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해외동포,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까지 성금을 냈다. 달동네 어린이가 자기 생활비를 털어 평화의 댐 모금을 했다는 기사가 뭉클한 ‘미담’으로 소개되어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그렇게 ‘코 묻은 돈’까지 긁어모아 만든 ?액이 약 639억 원. 그러나 금강산댐 사기극을 통해 남북대결구도를 극단적으로 강화하고 집권을 연장하려던 전두환 정권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 국가가 주도한 이 기막힌 사기극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거짓임이 밝혀지게 된다.
이 황당한 소동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1988년 8월 1일 자 기사에서 “평화의 댐은 불신과 낭비의 사상최대의 기념비적 공사”라 비꼬았다. 1993년에는 감사원 조사를 통해 금강산댐의 저수량은 최대로 잡아도 약 50억 톤 정도이며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평화의 댐 사기극처럼 남한정부가 북한을 이용해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거나 집권기간을 연장하려 했던 시도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남한사회는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 사실인 경우도 물론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권이 모종의 의도를 갖고 체계적인 조작으로 ‘북풍’을 만들어낸 경우는 그 이상으로 많았다. 그래서 일단 ‘북풍’이 불면 사람들은 조심스러워진다. 시기와 의도와 맥락을 신중하고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속고 또 속아온 사람들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학습의 결과이므로.
‘빅 브라더’에서 ‘무능한 가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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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2010. 4. 15, 수면 위로 완전히 드러난 천안함 함미 | |
군사독재 시기에는 정권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시민들을 속여도 잘 먹혀들었다. ‘평등’?‘자유’?‘평화’?‘민주’ 같은 가치가 아니라 ‘반공’이 국시(國是)이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어쨌든 그 시절 국가는 능수능란한데다 잔혹하고 힘이 센 ‘양치기 소년’이었다. 혹여 자신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자가 나타나면 잡아다 고문하거나 불구로 만들거나 아예 죽여버렸다. 만약 기업이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듣지 않으면 사장을 불러다 고문했고, 정 말을 듣지 않는다 싶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회사를 망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힘을 합쳐 국가의 부당함에 저항하면 광주에서처럼 군대를 동원해 무참히 학살했다.
국가는 무소불위였고, 전지전능한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그 시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Big Brother)’였다.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미국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던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권이라는 양치기 소년의 ‘신원보증인’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이건 ‘절대적 복종의 대가’였다. 이 신원보증인의 적극적인 비호와 방조 속에서, 양치기 소년은 1980년 광주에서처럼 많은 시민들을 학살해놓고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의 후광이건 어쨌건 과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자국영토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지전능한 존재에 가까웠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정적 국면을 지나게 되고, 오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른바 ‘시민사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과거 군사정권 시기의 지나치게 편중되고 강력했던 국가권력은 점차 민간으로 옮겨지고 분산되어갔다. 달리 표현하면 그 과정은 비정상적인 국가가 ‘정상적인 국가’가 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정상국가화’를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역사를 참조하고 우리의 현실을 고려해서 국가의 올바른 역할이 과연 무엇인지, 국가의 힘은 어디까지 제한되어야 하고 어디까지 발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차분히 합의에 이르기도 전에 한국사회는 엄청난 사회적 격변에 직면하게 된다. 1997년 가을, IMF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일단이기도 한 이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강력한 트라우마”라고 표현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만큼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우리의 인식체계와 사고방식이 전면적이라 할 정도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IMF 외환위기였다. 대통령이 돈을 꾸기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굴욕적인 태도로 머리를 숙이고, 사람 좋던 이웃집 아저씨는 하루아침에 사업이 망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멀쩡히 잘 먹고 잘 살던 삼촌이 카드빚에 시달리다 노숙자가 되고, 백화점 문화센터와 헬스클럽을 오가는 게 유일한 일과이던 큰고모가 감자탕 집에 나가 주방 일을 하게 됐다. 국가가 부도나는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국가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이제 ‘국가라는 총체적 권력’이 ‘화폐라는 경제적 권력’ 앞에 철저히, 혹은 처절히 무릎 꿇는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것은 회사에 간다고 말하고선 산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지치고 굽은 등을 바라보는 것처럼 서글픈 광경이었다.
국가는 국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구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마침내 폭로되고 말았다. 냉혹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개인이 알아서 발버둥치는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초반 김영삼 정권 시기에 관료와 경제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IMF 외환위기를 통해 비로소 사람들의 생활에 실제로 큰 영향을 끼치는 생존원칙으로 변형되어 내면화되기 시작했다. 승자독식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새로운 시대의 국민교육헌장이 되었다. 자기계발서와 처세서가 베스트셀러를 독점하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다. 이렇게 국가는 ‘빅 브라더’에서 ‘무능한 가장’이 되었다. 국가가 공동체 구성원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 따위는 이미 일고의 가치도 없는 케케묵은 사안이 됐다. 그 대신 국가가 시장과 재벌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고 대부분 그대로 실행되었다. 이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정당성을 판단해주는 ‘정당성의 보증기관’은 법도, 상식도, 윤리도 아닌 ‘시장’이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관과 무디스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같은 신용평가기관이었다. 분명 국가의 위상은 평가절하되었다. 하지만 이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좀 더 객관화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는 이 또한 하나의 ‘진보’라고 할 수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