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모님과 함께 변두리의 작은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은 것은 아홉살 난 여름밤이었다. 아버지는 자장면에 양파만 잔뜩 하다고 투덜거렸고 어머니는 단무지 맛이 이상하다며 트집을 잡았기 때문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 경기 중계를 보며 가끔씩 파리채로 파리를 탁 하고 때려잡던 중국집 주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장면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데다 심지어 단무지 접시를 두 번이나 다시 채우게 했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될 수 있는 대로 단무지를 집어먹지 않으려고 애썼다.
우리는 중국집을 나온 후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경부선 선로에서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았다. 좀처럼 기차가 오지 않자 어머니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버지가 내 눈을 보며 자신의 아버지가 나를 보살펴줄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아마 기차가 좀 더 빨리 왔더라면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찌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내게 종잇조각을 쥐여주면서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했다. 내가 다소 겁에 질린 목소리로 정말이냐고 되묻자 아버지는 약간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서둘러 선로를 빠져나왔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나는 소름이 돋았다. 기차가 마침내 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경부선 선로를 지나갔을 때도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한 손에 단단히 쥐고 있는 종잇조각엔 아버지가 평소 습관대로 꼭꼭 눌러 쓴 조부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조부의 연락처를 적는 동안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붙잡아둘 수 있었던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는 언제나 수레의 헐거워진 못이 덜그럭거리는 것처럼 자신을 고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짬이 날 때마다 베란다 하나 가득 키우던 꽃나무와 허브들을 돌보았다. 세심하게 먼지를 닦아내고 분무기로 물을 뿜어주고 햇살이 비치는 방향대로 화분들을 옮겨놔주면서, 할머니는 중얼중얼 내 어머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놨다. 나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할머니의 험담에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가끔씩 그렇지, 라든가 응, 정말 그래, 라고 맞장구쳐주었다. 할머니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할머니의 불평이 싫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 되면 나는 할머니가 싸준 보온도시락 통을 들고 할아버지의 직장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오징어젓갈과 계란말이와 장조림과 배추김치와 따끈한 밥을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사실 별로 허기를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저녁을 먹은 후 출근해서 하는 일이라곤 마지막 야근자가 서명하고 퇴근할 때까지 부스를 지키는 동안 가끔씩 기지개를 켜주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언제나 도시락을 깨끗이 비웠다.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할아버지의 무의미한 식욕이 싫지 않았다.
대개는 도시락만 전해주고 그대로 돌아왔지만 간혹 가다 할아버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도시락 통을 받아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도시락을 비우는 동안 나는 넓고 반들거리는 로비를 둘러보다 그곳의 대리석 벽면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황색과 흰색의 무수한 점들이 캔버스 전체로 터져나오는 듯한 거대한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곤 했다.
어느 날 밤 할아버지는 그 그림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느냐고 물어왔고 나는 의미 따윈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그 그림이 마음에 드냐, 라고 할아버지가 물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계란말이를 하나 집어들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뭔가 에너지가 느껴져서 좋아, 라고 내가 불쑥 말했다. 장조림을 집어들던 할아버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래, 저렇게 큰 그림을 그리려면 역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겠지, 라고 대꾸했다.
“여긴 뭐하는 곳이야?”
“뭔가를 연구하는 곳이야.”
“뭐를?”
“저 그림 같아. 만날 빤히 보고 있는데 의미를 알 수 없지. 나도 잘 몰라.”
할아버지가 지키는 뭔가를 연구하는 빌딩에서 임대아파트인 집 사이엔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공터가 하나 있었다. 나는 자고 나면 들어서는 아파트의 숲 사이에 텅 비어 광활한 공터가 있다는 것이 어색해서 좋았다. 처음엔 무심하게 스쳐갔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자전거를 멈추고 아무도 없는 공터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
무덤을 만들어보자, 라고 내가 중얼거린 것은 열네 살이 된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나는 언제나 평범한 아이였다. 평범하다는 것은 셔츠의 단추, 바지의 지퍼, 허리띠의 버클, 운동화의 끈처럼 반드시 필요하다 보니 너무 흔해져서 일상적이 되어버린 존재라는 뜻이다. 하지만 자전거 뒤에 커다란 삽을 싣고 다니는 것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철물점에서 끝이 날카로운 자그마한 모종삽을 하나 샀다. 시간은 많아, 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자전거 바구니 안의 모종삽을 보고 이유를 물어봤을 때 학교과제로 식물채집을 해야 한다고 얼버무렸다. 할머니는 특이한 화초를 발견하거든 집으로 가져오라고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들어갈 만한 구덩이를 파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단단하고 딱딱한 땅을 자그마한 모종삽으로 조금씩 파내는 동안 나는 내 몸의 크기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다. 내 몸의 길이는 일 미터 칠십이 센티미터로 또래보다 컸지만 삼십오 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휴지보다 작았다. 발은 백칠십오 밀리미터로 나이에 비해 컸지만 일 미터 길이의 바다이구아나보다도 작았다. 몸무게는 육십이 킬로그램으로 적당히 살이 올라 있었지만 칠십 킬로그램짜리 피아노보다 가벼웠다. 나보다 크고 무거운 존재들은 이 지구상에 얼마든지 있었지만 자그마한 모종삽으로 몸을 누일 만한 구덩이를 파는 것은 지구의 땅 전부를 파헤치는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정말로 절실했다면 커다란 삽을 가져다가 무덤을 팠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덜 필요했더라면 모종삽으로 무덤 파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나에게 모종삽으로 무덤을 만드는 것은 필요하면서도 절실하지는 않은, 삶을 메우고 있는 많고 많은 일 중 하나였다.
손엔 물집이 잡혔다 터지기를 반복했고 피곤에 지쳐 수업시간에 졸기 일쑤였다. 담임선생은 내가 일 미터 길이의 구덩이를 십여 센티미터 정도의 깊이로 파냈을 때 할아버지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일부턴 졸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선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봤다.
“네 녀석의 머리 말이다. 물들이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했어?”
“이건 제 머리색인데요.”
“그럼 검은색으로 염색하라고 했지.”
“물들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검은색은 물들이는 게 아니야. 정상으로 되돌리는 거다.”
“저한텐 물들이는 건데요.”
“건방진 자식. 할아버지 모셔와.”
할아버지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어질병이 있어서, 라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학교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그가 어지럼증 때문에 쓰러진 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이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 단 한 번이었다. 할아버지는 어지럽다며 길 한복판에서 쓰러졌고 사흘간 혼수상태였다 갑자기 깨어났다. 병원에선 별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할아버지는 하기 싫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어질병이 있어서,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진짜로 다시 어질병이 도져 출근하는 길에 쓰러진 것은 내 머리카락이 담임선생에게 사정없이 잘린 그해 여름날이었다.
나는 꽁지 빠진 수탉 같은 몰골을 하고 할아버지의 병원을 찾아갔다.
“만날 어질병 타령하니까 진짜 어질병이 도져버렸잖아.”
“넌 머리가 왜 그래?”
“담탱이가 잘랐어.”
나는 할아버지에게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다. 의사들도 원인을 모르겠대. 어쩌면 죽을지도 몰라. 할아버지가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빨아먹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초딩 때 같은 반 녀석 중 하나가 아프다고 거의 넉 달간을 학교에 오지 못했어. 내가 그 녀석의 짝꿍이라 반강제로 병문안을 가야 했는데 가보니 그 녀석은 거의 시체 같은 얼굴로 누워 있었어.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어디가 아픈지를 찾아내느라고 피를 일 리터는 되게 뽑아내고 똥구멍에 관도 꼽고 골수검사를 두 번이나 했다는 거야. 그래도 병명을 밝혀내지 못해서 나중에 그 녀석은 무균실에서 근 두 달간을 갇혀 지내야 했어. 그 녀석이 너무 외로워했기 때문에 나는 그 후로도 병원을 몇 번 더 찾아갔어. 소독을 하고 마스크를 끼고 가운을 입은 채 무균실에 들어갔더니 그 녀석은 내가 자기 이불을 살짝 깔고 앉았다고 성질을 내면서 엉엉 소리를 내서 울었어. 되게 착하고 말도 없는 순한 녀석이었는데. 난 그 녀석이 곧 죽을 거라 생각했어. 사람이 그렇게까지 이상해졌는데 살아남을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 녀석은 지금 여전히 멀쩡하게 살아 있고 여전히 되게 착하고 여전히 말도 없고 여전히 순해.”
무슨 병이었냐고 할아버지가 물었다.
“미토쿤드라에비시아라니아.”
“뭐?”
“실은 기억이 안 나. 하여간 미토코드라이에바닌지 뭔지 그런 이상한 병명이었어. 전 세계적으로 환자수가 그 녀석까지 포함해서 열두 명이고 정확한 증상도 알려진 바 없고 약도 없댔어. 더 이상 병원비를 댈 수 없어서 그 녀석은 그냥 퇴원해버렸는데 집에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갑자기 멀쩡해졌고 지금은 학교도 잘 다니고 있어. 하지만 의학적으로 그 녀석은 아직도 미토 뭐라는 병을 앓고 있는 거지. 어떤 병인지를 모르니 완치가 됐는지도 알 수 없거든.”
“나도 그 미토 뭐라는 병일까?”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 녀석은 어지럽다며 쓰러지진 않았어. 갑자기 굉장한 열이 나고 오한이 나고 구토를 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그랬다는 것 같아.”
“나도 열이 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은데.”
“확실히 미토 뭐라는 병인지를 알려면 피를 일 리터는 되게 뽑고 똥구멍에 관도 박아넣고 골수검사도 하고 무균실에서도 지내야 돼. 그런데 뭐하러 그래? 어차피 약도 없고 그렇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그럼 그냥 퇴원할까?”
“할머니가 많이 걱정해. 그러는 게 좋겠어.”
할아버지는 기왕 일주일간의 병가를 낸 김에 남은 사흘간을 집에서 쉬기로 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제법 박인데다 구덩이가 점점 무덤으로서의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간이나 밤 외출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내게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내가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날 할아버지는 빌딩에 두고 온 자신의 소형 선풍기 때문에 초조해했다.
“김가 녀석은 손이 거칠어. 뭐든지 고장 낸단 말이야.”
“고장 내면 새로 사다놓으라고 그러시구랴.”
할머니가 별걸 다 가지고 걱정이라는 듯이 대꾸하자 할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자긴 절대 만지지도 않았다고 할걸. 뻔뻔한 녀석이거든.”
내가 가서 가져오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반색을 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할아버지의 직장인 뭔가를 연구하는 빌딩으로 갔다. 이미 해가 진 뒤여서 드나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무실 여기저기에 불이 켜져 있었고 일층 로비는 절전을 위해 조명등의 일부만 켜놓아 약간 어두침침했다. 경비원인 김씨 아저씨는 사무실이라도 둘러보고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부스로 다가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할아버지의 소형 선풍기를 찾아냈다. 나는 그대로 돌아가는 대신 한쪽 옆구리에 선풍기를 낀 채 꽤 오래도록 거대한 그림 앞에서 터져나오는 점들의 소용돌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자전거 바구니에 소형 선풍기를 싣고 천천히 페달을 밟아 무더운 여름밤을 달려갔다. 공터에 들러 무덤을 파고 싶긴 했으나 할아버지가 잠도 자지 않고 선풍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공터에 잠깐 들러 파다 만 구덩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두루마리 휴지보다 짧은 몸과 바다이구아나보다 작은 발과 피아노보다 가벼운 몸집을 깊숙이 받아들여줄 따스한 구멍은 아직 완전히 벌어지지 않은 채 수줍게 다물어져 있었다. 나는 여름이 가기 전에 구덩이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병가가 끝났지만 할아버지는 출근?지 못했다. 누군가 뺑뺑이를 태운 후 전속력으로 돌려대는 것 같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출근은커녕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했고 속이 울렁거렸으므로 계속해서 구역질을 했다. 나와 할머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할아버지를 겨우 부축해 동네 한의원에 찾아갔지만 별 신통한 소리를 듣지 못했다.
“꼭 내가 입덧할 때 같구랴.”
할머니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늘 어지러운 것은 아니었다. 사실 멀쩡할 때가 훨씬 더 많았는데 그래도 할아버지는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선로에서 쓰러질 수도 있지. 그럼 기차에 치여 죽게 되는 거야.”
“이 근처엔 선로가 없잖수.”
“전철역에서 갑자기 고꾸라져서 전철에 치일 수도 있지.”
“전철을 안 타면 되지요.”
할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나갈 수 없어.”
얼마 안 되는 저축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할머니의 검은색 머리카락만큼이나 적었다. 나는 차츰 용돈을 받지 못하게 됐고 친구들과 가벼운 군것질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신문은 새벽 일찍 오지, 라고 할아버지가 말한 것은 할머니가 몇 주간 모은 신문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등교시간보다 훨씬 빠르죠, 라고 할머니가 대꾸했다.
“어제 신문보급소 하고 있는 박가 녀석이 병문안을 왔었거든. 넌 자전거를 잘 타지.”
“아주 잘 타죠.”
할머니가 신문지를 노끈으로 묶으면서 노래하듯 대꾸했다.
“용돈벌이라도 하면 지금보단 나을 텐데.”
“낫고말구요.”
할머니는 아예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나는 다음 날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리게 됐다.
두 노인네 모두 내가 몇 시에 신문을 돌리러 나가는지 아무 관심도 없었으므로, 나는 바구니에 모종삽을 싣고 자정에 집을 나선 후 공터에 들러 보급소에 가기 전까지 세 시간 정도 무덤을 팠다. 너비와 깊이는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는데 네모반듯한 모양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모종삽으로 파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고 문지르기도 하면서 완벽한 구덩이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밤새도록 일하고 나자 체력에 한계가 느껴졌다.
이틀쯤 푹 쉬고 사흘 후에 무덤을 완성하자, 라고 내가 중얼거린 것은 피곤에 찌들대로 찌들어 간신히 구덩이를 기어오르면서였다.
사흘 후 공터에 가보니 무덤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등굣길에 일부러 공터에 들렀다. 안전바가 공터에 빙 둘러 설치돼 있었고, 그 안에서 불도저 두 대가 부지런히 오가며 땅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린 후 안전바를 뛰어넘어 불도저에게로 다가갔다. 나를 발견한 인부가 기계작동을 멈췄다. 시끄럽던 엔진음이 조용해지자 내가 질러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구요!”
“뭐?”
“여기서 지금 뭐 하시는 거냐구요!”
“보면 몰라? 일하고 있지.”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 인부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여기에 아파트라도 생기나요?”
“아파트가 아니라 전철이 들어온다. 여긴 선로가 지나가게 될 거야. 어! 너 지금 우냐?”
“선로가 저기로 지나가나요?”
나는 내 무덤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 그렇겠지. 잘은 모르겠지만.”
인부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너 괜찮냐?”
괜찮습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라고 대답한 후 나는 몸을 돌려 공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전거에 올라탄 후 가을 뒤에 숨어버린 여름 아침 속으로 달려갔다.
“네가 연예인이라도 되는 줄 알아? 양아치처럼 그게 무슨 꼴이야?”
학년이 바뀌었지만 담임선생이 수업태도가 불량하다, 무슨 일에든 성의가 없다,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 독선적이다, 건방지다, 이기적이다, 어쩐다 저쩐다 한 끝에 머리색을 물고 ??지는 것은 변함없었다.
“이건 유전입니다.”
“뭐?”
“저희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모두 갈색머리예요.”
담임선생은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그러면 증거사진이라도 가져와.”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사진을 몽땅 태워버렸어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아직 남아 있을 때 찍은 사진은 모두 흑백입니다.”
“우리 한민족 중에 그렇게 밝은 머리색 유전자가 있단 소린 들어보지 못했어. 넌 거의 금발에 가깝잖아.”
“이건 미토쿤드라에비시아라니아라는 질병의 증상 중 하나입니다.”
담임선생의 입이 벌어졌다.
“뭐라구?”
“전 세계적으로 아주 드물게 발견되는 희귀병입니다.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해서 전염된 어머니와 함께 선로에서 자살했습니다. 확실히 알려진 일정한 증상은 없지만 부모님의 경우엔 정상적인 판단기능이 상실된 것 같습니다. 아직 아홉 살밖에 안 된 저까지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게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 자장면을 배터지게 먹고 단무지까지 세 접시나 먹어치웠습니다. 기차가 부모님의 창자를 완전히 터뜨려버렸을 때 검은 자장면 가락하고 노란 단무지 조각이 창자 조각과 뒤섞였을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역겹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이십여 년 전에 한 번 발병했다 잠복기를 거쳐 다시 증상을 나타내고 있는 중입니다. 본인이 선로만 보면 쓰러져 기차에 치일 거라는 망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지난 일 년간 집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질 못했습니다. 대신 할아버지는 집 안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있죠. 덕분에 스물세 평 임대아파트가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 뒤로 선로가 놓이게 됩니다. 그 선로는 부모님의 무덤과 제 무덤을 거쳐 할아버지의 무덤으로 뻗어오는 중입니다. 저희 집안의 가족력을 보면 미토쿤드라에비시아라니아의 확실한 증상은 정신이상에 전염성이며 게다가 유전된다는 것입니다. 말했다시피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저도 모두 갈색머리거든요.”
“미친 새끼.”
“미토쿤드라에비시아라니아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