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게 쓰는 말 중에 ‘청소년’이라는 말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말뜻에 따르면, “청년과 소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가 되어 있다. 좀 더 엄밀한 법률용어로 “청소년 기본법에서 9세 이상 24세 이하인 사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청소년 기본법’에 준한 규정이고, 최근 개정된 ‘청소년 보호법’에 따르면, 청소년은 19세 이하로 되어 있다. 기본법이든 보호법이든, 이런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청소년’이라는 말은 어린이와 젊은이를 함께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이 말의 정의를 제한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이라고 하면,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애매한 연령대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냥 ‘미성년’, 다시 말해서 어른이 아닌 존재가 바로 청소년인 것이다.
여하튼 청소년은 어린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른이라고 하기도 그런 존재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차이를 굳이 찾자면, 아무래도 청소년은 어린이에 비해 자기 주관을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청소년은 사회적 규율을 마음에 받아들인 존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회적 규율은 나를 지켜보는 ‘어떤 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릴 적에 할머니는 종종 어른 말 듣지 않으면 호랑이가 와서 잡아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이때 호랑이는 ‘무서운 존재’를 뜻한다.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를 철학적으로 ‘타자’라고 부른다. 이 타자가 곧 사회적 규율이고 법이다.
우리가 지키는 교통법규에서 법원에서 판결을 내리는 법률에 이르기까지 법은 외부에서 강제되는 권력 같은 것이다. 이 권력을 내면에 받아들인 존재가 바로 사회적인 개인이다. 이른바 사춘기는 이런 법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혼란의 과정이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육체적 성장과 맞물려서 이 시기는 무척 중요하다고 볼 수가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한국사회는 청소년을 ‘육성’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청소년은 자기 주관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라고 받아들여진다. 마치 중세의 여성이 ‘영혼 없는 존재’였던 것처럼, 한국의 청소년도 ‘생각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청소년은 과연 비주체적인 존재인지를 따져 묻는 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청소년이 비주체적이지 않다는 증거는 ‘경험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대다수 청소년이 비주체적일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한 구조적 접근을 미리 차단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청소년은 비주체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원래부터 청소년이 비주체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기보다, 비주체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청소년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회의 태도이다. 어떤 관점에서 청소년을 보는지에 대한 분석이 곧 그 사회가 청소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육성’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 육성이야말로 훈육의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훈육은 사회에 생명을 구겨 넣는 행위이다. 사회는 일종의 체계이고, 특정한 규칙에 맞춰 돌아가는 합리성의 공간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우리라는 존재는 겨우 생명을 얻은 ‘핏덩어리’에 불과하다. 한국의 속어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문자 그대로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대상을 윽박지를 때 쓰는 말이다. 이 가냘픈 생명을 사회가 부여하는 법에 틀 지우는 것이 바로 훈육이다. 학교를 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인터넷에서 글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는 모든 행위와 훈육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시간표에 맞춰 생활하는 것에서 훈육은 시작된다. 몇 시까지 학교를 가고 학교 끝나면 몇 시까지 학원에 가야 한다는 규칙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청소년은 언제나 사회적 훈육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소년은 한국사회에서 ‘생각 없는 존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훈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을 훈육하는 방식과 이 물음은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솔직하게 말해서 한국사회에서 훈육의 철학은 발견하기 어렵다. 일단 9세부터 24세까지 청소년을 규정하는 기본법과 19세 이하로 청소년을 이해하는 보호법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간극’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4세까지 청소년으로 생각하고, 19세 이하까지 법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에서 ‘청소년’이라는 기표는 그 의도를 드러낸다. 청소년은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관점에서 존재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청소년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런 통제와 관리를 ‘억압’으로 파악하는 것이 지금까지 청소년 관련 문제의식의 결론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법과 국가를 벗어나는 주체적인 청소년 상을 제시하냐는 것이었다. 이른바 ‘탈학교 논리’는 여기에서 일정한 설득력을 얻는다.
1990년대 김현진과 같은 ‘아이콘’을 통해 실천력을 획득한 이 논리는 한동안 법과 국가의 억압을 거부하는 주체적인 청소년의 삶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목격하는 ‘전일적 입시체제’의 양상에서 탈학교 운동이나 논리가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탈학교 논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얼마 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고려대 김예슬의 선언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김예슬은 노동시장에 팔릴 하나의 상품으로 자신을 전락시키는 대학교육을 비판하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는 의지로 대학졸업장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다. 여러 가지 논란이 있었고, 숱한 호응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이 사건은 과거의 것이 회귀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물론 김예슬의 결단을 폄하할 생각도 없고, 그 선언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의도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김예슬의 선언이 있기 전에도, 아니 있은 뒤에도, 자의 반 타의 반 소리 없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많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한다,미안하다?
김예슬은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무엇이 미안한 건지 제쳐두더라도, 이런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김예슬은 탈학교 선언을 했고, 자신의 결단을 만천하에 알렸는데, 왜 미안하다고 한 것일까? 물론 명문대학을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김예슬의 태도는 확실히 자신의 특권에 대한 자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예슬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의식은 과거 386세대를 지배했던 윤리의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경쟁구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명문대학생이라는 특권을 버리겠다는 윤리적 결단이 이를 통해 발생했다. 이 자의식의 정체는 공동체의 주류에 승복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주체화(subjectivization)’를 뜻한다.
이 고통스러운 주체화는 체제라는 서랍에 구겨넣을 수 없는 나의 다른 측면을 ‘주장’하는 순간에 현실화한다. 사회가 요구하고 부여하는 그 ‘나’에 맞지 않는 다른 ‘나’가 자의식을 생성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지금까지 공동체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고분고분 살아온 김예슬의 자아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한 건 “학교를 그만둔다”고 선언했던 그 김예슬이 아니라, 학교에 남겨두고 온 또 다른 김예슬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미안’하다는 건 그 학교에 두고 온 또 다른 김예슬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김예슬은 그동안 열심히 경주마처럼 트랙을 달렸을 것이고, 마침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김예슬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을 얻었다. 그는 마침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한 영혼을 갖게 된 것이다.
김예슬의 선언에서 배워야 할 건 그의 행동에 담긴 내용이라기보다, 그 행동을 이끈 동기라고 할 수 있다. 경쟁이 부여하는 강압적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또 다른 김예슬이 여기에 있다. 완벽한 자아를 강요하는 경쟁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청소년이라는 용어법에 함축되어 있는 건 ‘어른 말씀 잘 듣지 않으면 사탕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른 말씀을 잘 들은 김예슬은 사탕을 받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여기에 청소년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이 숨어 있다.
한국에서 청소년 담론은 대체로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문법에 맞춰 만들어진다. 사랑하는데, 왜 미안한가? 사랑한다는 건 자신을 허무는 행위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데 지극히 이타적으로 보이는 이런 사랑의 본질은 이기심에 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신에게 부족한 걸 채워넣기 위해 필요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도 사실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자식이 이뤄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체로 우리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감정을 이타심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자식사랑은 부모에게 자신의 결여를 보여주는 증상이다.
조금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생활고를 못 이겨 동반자살하는 가족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한국사회에서 자식은 부모의 귀속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생활고라는 현실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하는 부모가 홀로 남겨질 자식의 처지를 걱정해서 함께 죽는다는 발상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죽음 충동을 삶의 욕망이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자식에게 삶을 부여하는 것이 부모의 욕망이라고 한다면, 이 욕망을 포기하는 지점에서 자식의 욕망까지도 강제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는 곤란하다.
미안하다는 감정은 죄책감의 표현이다. 이 죄책감은 다른 사람 몰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김예슬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분열된 주체가 아니고 완전하다고 상상하는 자아이다. 말하자면 자아는 완벽하고, 그래서 미안하다. 자아의 완벽성은 누구의 도움으로 가능한가? 바로 ‘다른 사람’ 덕분이다. 김예슬은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자신의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하기에 김예슬은 미안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김예슬의 선언이 잘 보여주듯이, 한국사회에서 청소년은 이처럼 ‘미안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사회는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통제’하려고 한다. 이 보호와 통제의 방식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일전에 청소년 관련 특집좌담을 위해 중고등학생들을 한자리에 불러놓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들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내용 자체가 충격이었다기보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환경에 경악했던 것이다. 학교가 청소년을 제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은 ‘외모 단속’이었다. 복장과 두발 길이가 청소년을 규율에 붙잡아두기 위한 효율적인 방식으로 여전히 각광을 받고 있었다.
조금 어려운 말을 써서 표현하자면, 복장과 두발에 대한 규제는 국가권력과 청소년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청소년은 청소년답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국가권력의 명령인 셈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최근 목격되었다. 첫째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이고, 둘째는 ‘촛불소녀’였다. 물론 이 둘은 청소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 진리를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보호와 통제라는 청소년에 대한 국가권력의 규율을 보기 좋게 위반한다. 이들은 ‘섹시한 십대들’로서 ‘어른 남성’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론 원더걸스보다 더 모호한 소녀시대는 ‘청소년은 성적대상일 수 없다’는 금기의 경계에 교묘하게 자신을 멈춰 세운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십대 아이돌’은 십대의 것이라는 기존의 상식을 깨뜨린 경우이다. 이 상황은 시장주의가 국가권력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명분을 어떻게 제공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청소년일지라도 시장주의에 부합하는 ‘능력’을 갖춘다면 충분히 어른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고, 어른의 욕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사회에서 ‘어른’은 시장주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서 시장주의라는 건 다분히 무정부적인 것으로서, 개별 주체들을 원소로 삼는 부분집합을 뜻한다. 이 부분집합은 자신의 요구를 국가에게 제기하는 이익집단들이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같은 십대 아이돌들이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부여한 효과는 생각보다 지대한 것이었다. 2008년 촛불이 ‘촛불소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분명히 흥미로운 사건이다. 물론 이 명칭은 다분히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노골적이지 않게 은근한 성적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어른의 시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단발머리를 한 이 소녀의 이미지는 청소년을 바라보는 한국의 시선이 정치적인 이념을 떠나서 동일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정치적이되 단정하기를 원하는 촛불소녀에 대한 이런 시선은 섹시하되 음탕하지 않아야 하는 원더걸스나 소녀시대에 대한 시선과 동일한 것이다. 이 모순적 시선에서 청소년은 양가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 본래의 모호성은 그러나 기존의 경계와 차이를 무?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촛불은 이 사실을 증명했다. 청계천 광장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이들이 발언대에 나와 마이크를 잡고 당시 유행했던 원더걸스의 <텔미>를 부르면서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했을 때, 기존의 인식을 지배하던 습속들이 무너졌던 것이다. 지극히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서 가장 정치적인 것이 출현하는 극적 순간은 이렇게 출몰할 수 있었다.
불량청소년-불량엄마의 탄생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에 국가권력의 통제를 가장 피부로 느낀 집단이 바로 청소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야간자율학습을 강화하고, 사교육과 입시경쟁을 부추기는 혼란스러운 교육정책은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청소년의 일상을 뒤흔들어놓는 직접적 폭력의 현신이었다. 복장과 두발이라는 미학적인 통제방식이 청소년으로부터 즐거움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면, 야간자율학습과 입시경쟁의 강화는 윤리적 선택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쾌락과 윤리는 이렇게 국가권력을 통해 날카롭게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
십대들이 촛불에 나타난 까닭은 이렇게 국가권력의 부당성을 직접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이들이 궁극적으로 거부한 것은 ‘청소년’이라는 애매모호한 범주였다. 이들은 청소년이라는 안개 속에서 걸어나와 자신을 주장하면서 주체화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저항은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적 대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들은 오히려 국가권력의 공백을 틈타서 자신을 즐길 수 있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소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십대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십대는 존재하지만, 국가권력이 부여하는 그 규율의 범주에 십대의 삶을 구겨넣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십대들은 교사와 학교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우고, 야동을 즐기고, 연애를 하고, 춤을 춘다. 이들이 즐기는 건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것들이다. 어른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위해,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핑계를 위해서 청소년의 범주를 발명하고, 이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청소년에게 ‘불량’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불량청소년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의 범주에 근거해서 판단한다면, 모든 십대는 불량청소년의 예비후보이다. 누가 불량하고, 불량하지 않은지를 판가름할 권한은 십대 자신에게 없다. 불량청소년에 대한 정의는 어른의 법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이 법은 십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한국사회에서 십대들은 어른들에게 알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김연아가 불굴의 의지로 피겨스케이팅을 멈추지 않은 건 자신의 요구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부모의 욕망을 내면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전이의 과정에서 김연아와 김연아의 어머니는 ‘애증’의 관계를 형성한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을 통해 자신을 정립하고, 김연아의 어머니는 김연아를 통해 자신을 정립한다. 이 지점에서 김연아는 하나의 ‘계발모델’로 작동한다. ‘보는 나는 보이는 나이기도 하다’는 원리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욕망의 주체는 이처럼 내가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내가 보인다는 것을 의식한다.
김연아의 능력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현실화했다. 김연아의 성공은 청소년 담론에 힘을 실어준다. 보호육성이라는 청소년에 대한 입장이 여기에서 설득력을 발휘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연아처럼 훌륭한 ‘인적 자본’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나쁜 물 들지 않게 청소년을 보호육성할 임무가 어른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퍼질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훌륭한 청소년을 키워내지 못하는 ‘불량엄마들’이다. ‘엄친아’니 ‘엄친딸’이라는 표현은 이런 맥락에서 ‘엄마 친구’가 중요한 것이지 엄마 친구의 아들이나 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엄친아나 엄친딸에서 부러움의 대상은 그 아들이나 딸이 아니라, 엄마의 친구이다. 훌륭한 아들과 딸을 길러낸 엄마의 친구가 중요 한 것이다.
따라서 청소년이라는 범주는 십대들뿐만 아니라, ‘아빠?엄마’까지도 규정하는 인식의 틀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자식들은 공동체의 가치위계에서 상층부를 차지하게 해줄 수 있는 인적 자본의 원천이다. 이 원천을 얼마나 잘 관리하고 계발하는가에 따라서 신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적 자본이 중요한 부의 요소로 받아들여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부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까지 한국사회가 강조한 것은 근면이었다. 열심히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삶의 미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협동이었다. ‘근면, 자조, 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의 표어는 이런 사정을 감춰놓고 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로 오면, 상황이 좀 바뀐다. 이제는 근면만 가지고 뭐가 되지 않는다. 이때부터 강조한 게 ‘도전정신’이다. 사회가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에서 기업중심으로 옮겨오면서 이런 생각들이 사회구성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초일류기업’이나 ‘세계경영’ 같은 말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런데 90년대로 들어오면서 이런 상황이 또 바뀐다. ‘창조성’이라는 말이 갑자기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창조적 인재가 중요하고, 기존의 기업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주장들이 등장하면서 ‘스펙’이라는 말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뒤덮기 시작한다. 너도 나도 스펙경쟁이라는 새로운 모델에 뛰어 들어서, 쉴 틈 없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준비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어떤 사회학자는 “자기계발의 시대”라고 불렀는데, 삶의 가치가 먹고사는 문제로 모두 귀결하는 현상이 이런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자기계발의 시대는 궁극적으로 ‘일등’을 최고로 치는 삶의 가치를 설파한다. 피겨선수 김연아에 대한 동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모두가 꿈꾸는 ‘일등’을 김연아가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한국사회는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대리만족은 “누구나 김연아처럼 일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좋은 부모’를 만나는 건 선험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사회적 평등의 문제였던 사안이 개인적 행운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한 경쟁이라는 게임의 규칙은 붕괴한다. 오직 중요한것은 개인적 능력을 극대화해서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다. 청소년이라는 범주는 이런 사회적 경쟁을 지지하고 존속시키는 하나의 요소이다. 청소년을 보호육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인적 자본이라는 새로운 경제의 논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청소년의 보호육성이 자기계발 담론으로 변신하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적 자본에 대한 강조는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유럽식 자유주의와 달리 모든 사회적인 것을 시장의 논리에 따라 인식하는 사고방식을 증식시킨다. 이 사고방식에서 중요한 건 청소년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부모,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의 역할’이다. ‘엄마-아이’라는 관계의 강화는 기존의 청소년 담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불량청소년의 원인은 불량엄마에게 있는 셈이다.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바치는 치맛바람은 성장의 문제를 ‘인적 자본의 축적’으로 환원시키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출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에서 시민적 주체로
청소년이라는 범주는 다분히 근대적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근대적인 관점에서 청소년은 ‘인구 통제’에 충실했던 근대적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패러다임은 인적 자본의 계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되었다. 여기에서 청소년이라는 범주는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청소년이라는 지시어는 반성과 성찰을 요청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해온 이 용어가 정작 십대들의 자기 결정권을 가로막아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청소년은 주체적인 자기 결정권을 가진 ‘시민’이 아니다. 청소년 보호법은 여전히 ‘청소년은 국가의 동량’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이데올로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계관을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청소년을 ‘특별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소년을 ‘특별한 존재’라고 자연스럽게 인준하는 생각에 대한 적절한 근거는 없다. 청소년을 ‘예외상태’에 둠으로써, 어른들은 자신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소년문학’이라는 장르이다. 청소년에 대한 무반성적 태도가 만들어내는 현상이 바로 청소년문학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청소년문학이 따로 있고, 어른문학이 따로 있다는 전제는, 청소년은 어른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청소년이 어른처럼 구는 것은 청소년에게 해롭다는 인식이 청소년문학의 존립근거를 제공하는 타당성이다. 물론 외국에도 청소년문학이 없는 건 아니다. 주니어문학(junior literature)이라는 장르가 있지만, 대체로 이런 문학은 보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청소년은 판단력에서 미숙하기 때문에 ‘좋은 것’만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이런 문학의 논리를 구성한다.
그러나 청소년이라고 규정된 이 ‘미숙한 주체’는 좋은 것뿐만 아니라 나쁜 것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전히 주체화의 과정에 놓여 있는 사회구성원들이고, 이런 까닭에 선악에 대한 어른의 판단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검열과 관계가 있다. 어떤 문학을 청소년에게 적합하다거나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그 기준 자체가 바로 검열이다.
『황금나침반』처럼 일방적으로 어른의 가치체계를 청소년 독자에게 강요하는 작가도 적지 않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절대고독의 세계에서 오직 ‘계약관계’를 맺은 동지들과 함께 악에 대항해서 싸우는 존재로 그려진다. 언뜻 생각하면, 주체적인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계약’을 개인적 정체성의 근거로 승인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비 그래니트(Harvey Granite)의 주장처럼, 이런 청소년문학은 어른들 사이에서 옳다고 인정받은 것들만 읽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청소년문학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립의 명분과 달리, 실제로 십대의 주체화를 어른의 가치체계로 포섭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청소년문학은 그 명칭이나 모양새와 아무 관계없이 십대를 독자적인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차별화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청소년과 어른은 다르다는 논리는 궁극적으로 청소년은 어른과 같아져야 한다는 논리로 아무런 의심 없이 전환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어른과 청소년이 같아져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는 여기에서 생략된다.
이런 까닭에 한국에서 청소년문학은 ‘어떤 문학인가’라는 반성적 질문보다도, 청소년문학 자체를 교육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습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정작 청소년문학이 만들어내는 주체는 어른의 가치체계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청소년문학은 언제나 윤리적으로 ‘옳다’고 특정 세력에게 승인받은 규범적 내용만을 고수하는 고리타분한 ‘꼰대문학’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정작 청소년은 청소년문학을 읽지 않고, 바람직한 청소년의 모습에 목말라 있는 어른들이 청소년문학을 상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청소년을 존재하도록 만드는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청소년문학은 근대민족국가와 문학 사이에 맺어진 관계를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그러나 2008년 촛불이 증명했듯이, 어른들이 청소년이라고 부르는 그 ‘풋내기들’은 생각보다 철이 없다. 평소라면 어른들의 정치에 관심도 보이지 않았을 이들이 아이돌 그룹의 ‘오빠들’을 위해 과감하게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나온다. 민족을 비하했다고 미국으로 쫓겨난 가수의 구명운동을 펼치는 이들에게 청소년문학은 철 지난 음풍농월에 불과하다. 어려운 철학책을 읽고 카페에서 짐짓 철학과 대학생이라도 된 듯이 자신들도 모르는 언어로 논쟁을 펼치는 치기들을 어른들이 청소년이라는 범주로 묶어두려는 이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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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들은 스스로 배우는 존재들이다. 이들에게도 자기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시민으로 주체화할 수 있는 배움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이 평소에 배우는 것들은 어른들이 동의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크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청소년이라는 보호의 대상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청소년의 이미지가 있을 ?이다.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정숙하게 단발머리를 한 ‘정치의식에 충만한 소녀’는 이 세상에 없다. 십대들의 주체화는 모범생의 도덕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덕을 의심하고 깨뜨릴 때 비로소 가능하다. 도덕은 합의의 산물로서 쾌락의 한계를 지정한다. 십대들이 이 한계를 쉽게 넘어설 것이라는 생각은 어른들의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십대들은 충실하게 어른들이 원하는 것을 따르게 마련이다. 어른들이 가르쳐야 할 건 규칙을 따르는 ‘착한 청소년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합의된 선악의 판단을 균열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치의 가능성이다. 이런 가능성을 원천봉쇄한 채, 어른이 인도하고 계획하는 길을 따라오기를 십대들에게 강요하는 건 부당한 일이다. 청소년이라는 범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설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른이 되기 전까지 머물러 있어야 할 십대들의 자리를 사회적인 위계 속에서 지정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위계는 차이와 차별에 근거한다. 청소년은 자율학습이나 해야 하지 촛불집회에 나와서 자기주장을 하면 옳지 않은 일이다. 이런 믿음과 합의에 대한 반성이 곧 ‘청소년은 없다’는 명제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청소년은 없다. 아니, ‘어린 어른’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른과 다른 청소년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 까닭은 언제나 우리에게 청소년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 부족함은 청소년의 욕망보다도 어른의 욕망이다. 이 부족함은 어른들에게 없는 것을 십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십대들이 어른보다 미숙하다는 생각은 반대로 십대들이 어른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는 형이상학적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의 타락 이전에 존재할 수 있는 청소년은 없다. 어떤 십대가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순간, 그 개체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 청소년은 언제나 이미 어른의 이해관계를 체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타락한 존재이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공동체의 합의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합의를 깨뜨리고 자신의 독특성에 주목할 방도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고민에서 진정한 교육의 이념이 발생할 수 있다. 모든 교육은 일정하게 자기계발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지만, 이 차원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과잉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 여기에서 십대들을 위한 새로운 페더고지가 싹을 틔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