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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들이 권한 영화 - <하이 눈>

보안관이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뒤돌아선 까닭은? - <하이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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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눈>(High Noon, 1952년, 유나이티드아티스츠)
음악: 디미트리 티옴킨(Dimitri Tiomkin)
감독: 프레드 진네만(Fred Zinneman)
제작: 스탠리 크레이머(Stanley Kramer), 칼 포먼(Carl Foreman)
각본: 칼 포먼
주연: 게리 쿠퍼, 그레이스 켈리

지금은 서부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쇠퇴해버렸지만 서부극은 과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웨스턴’의 전성시대에 십대를 보낸 남자들치고 총잡이 흉내를 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존 웨인, 헨리 폰다, 알란 래드, 버트 랭커스터, 커크 더글러스 등 쟁쟁한 스타들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건맨 역을 연기했다. 알란 래드 하면 ‘셰인’이 떠오르고, 헨리 폰다와 버트 랭커스터는 서로 다른 스타일로 ‘와이어트 어프’를 연기했다. 그리고 게리 쿠퍼 하면 바로 <하이 눈>의 보안관 ‘윌 케인’이었다.

<하이 눈> 포스터.
‘도망치기엔 너무 자존심이 강했던 남자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그러나 1950년대를 관통하면서 웨스턴은 쇠락하고 영웅들은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서부극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담기 시작했다. <수색자> <황야의 7인>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같은 서부극은 더 이상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감독들은 서부의 낭만이 아닌 현실을 그려내려 했다. 게다가 뒤를 이어 이탈리아에서 기이한 서부극이 온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창안해 낸 마카로니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였다. 프랑코 네로의 <장고>와 테렌스 힐의 <튜니티> 시리즈 등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서부극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결국 2005년에 이르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용서받지 못한 자>를 통해 서부 사나이들의 신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른다. 서부극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정통 서부극은 영웅담이었다. 영화 속 총잡이들의 모습이 실제로는 허구였다 해도 거기에는 낭만이 있었다. 또한 남성 영화로서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관객들은 서부 영웅들을 통해서 사나이다운 기개를 발견하곤 했다. 거기에는 멋이 있었다. 보안관의 가슴에 달린 별은 무엇보다 정의를 상징했고, 무법이 난무하는 황야에서 어떻게 정의를 수호할 것인가가 늘 문제였다. <하이 눈>은 그런 책무를 짊어진 고독한 보안관 윌 케인의 이야기이다.

마을사람이 모두 숨은 거리에서도 보안관은 홀로 나서야 한다.

걸작 서부극들은 드라마 자체만큼이나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서부영화 테마음악들만 모아서 음반으로 발매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가장 인상적이고 다양한 웨스턴 뮤직을 남긴 작곡가로는 디미트리 티옴킨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음악을 맡은 영화들 중에서 특히 <하이 눈>의 테마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음악뿐만이 아니다. <하이 눈>은 미국인들에게 깊은 정신적 영향을 준 영화로도 기록될 만하다. 역대 대통령들마다 이 영화를 즐겨 보았고, 후임 대통령에게 <하이 눈>을 보도록 권유하곤 했다. 특별히 <하이 눈>이었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무엇보다 보안관 윌 케인의 캐릭터 때문이다. 윌 케인의 앞에 위기가 닥친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는 의무감 때문에 마을을 지킨다. 윌 케인은 막 결혼식을 올렸다. 보안관 직도 은퇴했다. 마을을 떠나 혼자 행복하게 지낼 수도 있는 입장이지만, 그는 마을을 지켜야 하는 공적인 책무를 애써 떠맡는다. 그의 캐릭터는 혼자 최종적으로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대변한다. 죽음이 두렵지만 보안관이기 때문에 정의를 위해서 총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보안관’이라는 미국 대통령이 맡을 수 있는 의무 아닌가?

<하이 눈>은 주제가만으로도 웨스턴의 전설이 된 영화다. 물론 이전에도 서부를 배경으로 한 테마곡들은 여럿 존재했다. 1946년 명장 존 포드 감독이 만들고 헨리 폰다가 주연한 와이어트 어프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황야의 결투>로 소개되었지만 원제는 주제가와 같은 제목인 「My Darling Clementine」이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던 민요로서 영화 전체에 짙은 서정성을 입혀주는 역할을 했다. 귀에 익은 멜로디를 사용함으로써 서부극에 고풍스러움과 함께 회고적인 느낌이 배게 만든 것이다. 반면 디미트리 티옴킨은 <하이 눈>을 위해서 특별히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을 작곡한다. 이 곡은 영화 속에서 노래로도 나오지만, 극 전반에 삽입되어 드라마를 전개해주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노래 가사는 윌 케인의 입장과 상황을 대변하고, 캐릭터를 요약해준다. “내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는지 몰라요. 내가 아는 건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가사가 말해주듯 영화 전체의 흐름을 설명해주고 도입의 역할을 맡는 것이다. 또한 “오 나의 사랑, 나를 저버리지 말아요”라는 제목처럼 이 주제곡은 연가로도 훌륭한 역할도 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하이 눈의 발라드」(The Ballad Of High Noon)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오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악당들. 오른쪽에 리 반 클리프의 얼굴이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면 멀리 황야가 보이고 크레디트 타이틀이 떠오른다. 텍스 리터의 묵직한 목소리로 컨트리풍의 노래가 담담하게 흘러나온다. 주제가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소리가 단조로운 리듬을 맞춘다. 오프닝 신은 악당들이 모이는 장면이다. 나중에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에서 ‘나쁜 놈(the bad)’ 역을 맡게 되는 젊은 시절의 리 반 클리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총잡이들이 하나씩 모여든다. 노래가 나오는 동안 악기 연주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텍스 리터의 목소리만 강조된다. 기타나 아코디언 소리조차 묵직한 목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다. 확실히 텍스 리터가 부르는 노래는 윌 케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장치이다. 이 노래처럼 악기 소리를 자제하고 목소리만 강조한 연주는 당시 많은 할리우드 영화음악이 공통적으로 활용하던 방식이었다. 자질구레한 배경음악을 빼고 굵직한 선의 목소리만 남김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적 감정을 한층 진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은 윌 케인이 처한 딜레마를 한 곡의 노래에 담아냄으로써 서부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주제가의 하나로 남는다. 주제가는 오프닝 신에서는 노래 형식으로 관객들의 귀를 익숙하게 만든 다음, 장면이 진행되면 멜로디만으로 변주되면서 영화 전체를 이끌어간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85분이다. 영화 속에서의 시간 경과와 거의 비슷하다. 10시 35분에 윌과 에이미(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이 진행된다. 같은 시간에 악당들은 마을을 지나 역으로 간다. 역에는 감옥에서 막 풀려난 우두머리 프랭크 밀러가 도착하기로 되어 있다. 동시간대의 교회, 술집, 이발소 등에서는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반응이 비친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정오가 약간 지난 즈음, 짧지만 긴박한 결투가 끝날 때까지 진행된다.

영화사상 가장 ‘젠틀’한 배우 게리 쿠퍼와 가장 우아한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캐스팅만으로도 영화는 차고 넘친다.

결혼과 함께 보안관으로서 윌의 의무도 끝난다. 그러나 악당들이 마을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윌은 그곳에 남기로 결심한다. 5년 전 자신이 잡아넣은 프랭크가 복수를 하러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만, 해들리빌 마을이 예전의 혼탁했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둘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마차를 타고 떠나던 윌이 마을로 말을 돌릴 때, 주제곡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의 멜로디가 다시 흐른다. 윌은 아내에게 상황을 설명하지 않지만, 음악이 대신해서 관객들에게 설명해준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면서 보안관을 돕기를 꺼린다. 5년 전, 악당들을 처치함으로써 마을에 평화가 왔던 기억을 이미 잊은 것이다. 다시 위기가 닥쳤지만 사람들은 모두 발뺌을 할 뿐이다. 윌은 이런 마을을 왜 지켜야 하는지 내면적 갈등에 빠진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에게 떠나라고 말한다. 승산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가 도움을 청하러 교회로 갈 때도, 혼자 고민하며 마을을 걸어갈 때도, 주제음악이 반복해서 흐른다. 그리고 음악과 함께 윌 케인의 갈등 역시 깊어간다.

일반적인 서부극의 주인공이 겨우 네 명밖에 되지 않는 악당들을 놓고 이처럼 심각한 갈등에 빠지는 경우란 드물다. 최후의 결투를 앞둔 조차 활극적인 분위기가 넘친다. 와이어트 어프와 닥 할러데이 역시 목숨을 걸고 클랜턴 일가와 싸우러 가지만, 그들에게서 윌 케인과 같은 고뇌와 갈등을 느끼기는 어렵다. 주인공이라면, 보안관이라면, 결코 지지 않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 눈>의 윌 케인은 더욱 인간적이다. 그는 두렵다. 아무도 그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떠날 수 없다. 자신이 벌인 일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보안관으로서의 의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악당을 기다리는 윌 케인(게리 쿠퍼)

클로즈업으로 잡은 시곗바늘은 정오를 향해 다가간다. 윌 케인은 사무실에 앉아 편지를 쓴다. 답답해하던 아내 에이미는 혼자 떠나기 위해 역으로 간다. 무법자 세 사람은 역에서 우두머리를 기다리고 있다. 윌 케인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일주일 전에 출옥한 악당 프랭크가 오고 있는 것이다. 시계는 정오를 알린다. 기적소리가 울리고 악당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마을사람들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술집과 집안에 모여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사람들은 용기가 없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행동도 할 수 없다. 그저 안일하게 모든 일이 별일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거리엔 적막만이 감돈다. 카메라가 크레인을 타고 공중으로 이동하면 넓은 마을에는 케인 혼자만 보인다. 다시 텍스 리터의 목소리로 주제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사그라지면 음악은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긴장감 넘치게 변주된다.
뜨거운 정오의 시계 아래 결투는 벌어진다.

악당들이 한 명씩 죽고, 마지막 남은 프랭크는 에이미를 인질로 잡고 윌 케인을 협박한다. 주제음악은 이제 비장감을 표현한다. 에이미가 도망치려고 몸을 빼는 사이 윌의 총이 불을 뿜는다. 프랭크가 쓰러지면 음악도 평화를 되찾는다. 사람들이 전부 거리로 몰려나오고, 윌 케인은 아내와 함께 마차에 올라 마을을 떠난다. 오프닝과 마찬가지로 텍스 리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은 윌 케인의 고민과 이야기를 변함없이 노래한다. 낭만적이고도 비장하게.


[Tip 1] AFI에서 ‘최고의 영화음악 25곡’을 선정했을 때 포함된 서부영화 주제곡은 3편이었다. <황야의 7인> <서부 개척사>, 그리고 10위에 랭크된 <하이 눈>이다.

[Tip 2] <하이 눈>에서 윌 케인의 아내 에이미는 퀘이커 교도로 나온다. 싸움 자체를 거부하는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떻게든 남편을 설득해서 결투를 피하려 한다. 이런 상황은 윌 케인의 내적 갈등과도 연관된다.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 감독의 1956년 작 <우정 어린 설복>에서는 <하이 눈>과 반대로 게리 쿠퍼가 퀘이커 교도 역을 연기한다.

[Tip 3] <하이 눈>은 그레이스 켈리의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다. 이듬해 존 포드 감독의 <모감보>에 출연한 뒤부터 그녀는 본격적인 스타의 길을 걷게 된다. 1954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게 발탁되어 두 편의 영화를 함께 찍는데, <다이얼 M을 돌려라><이창(裏窓, Rear Window)>이 그것이다. 같은 해 빙 크로스비와 함께 출연한 <갈채(The Country Girl)>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Tip 4] <하이 눈>의 흥행 예측은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개봉 몇 달 전 텍스 리터가 부른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이 먼저 음반으로 발매되어 히트하면서 영화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주제곡의 성공에 힘입어 영화도 성공적으로 흥행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영화 음악이 영화에 부수적인 것이었으나 <하이 눈>의 경우는 처음으로 주제 음악이 흥행을 주도해나간 경우이다. <하이 눈> 이후 영화 개봉 이전에 사운드트랙 앨범을 먼저 내놓는 게 하나의 흥행 전략으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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