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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옆에 끼적여봐!

이런 사진설명 달기 놀이는 12월 송년 가족모임의 작은 이벤트로 열어도 괜찮겠다. 한 해를 돌아보는 뜻에서 가족 구성원들마다 올해 자신의 사진을 선정한 뒤(한 장이든, 세 장이든, 열 장이든) 그 사진에 적절한 설명이나 에세이를 적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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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찜쪄먹는 이미지 놀이
- 아버지 앨범에 적혀 있던 문장의 추억에서 글쓰기 숙제 아이디어를 얻다 -

내 인생 최초의 문학은 아버지의 사진설명이었다. 아니 ‘사진설명’이라는 표현은 건조하다. ‘사진에세이’가 적절하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 사진을 위해 손수 앨범을 만들었다. 마분지를 줄로 묶어 제본하고 각 사진들의 네 귀퉁이를 스티커로 고정시켰다. 그 옆에 사인펜으로 무언가를 끼적거렸던 것이다. “OO년 O월 증조할아버지 산소에서”처럼 날짜와 장소만 밝히기도 했지만, 인화지에 담긴 상황을 시적으로 압축할 때가 더 많았다. 폭소를 터뜨리는 사진 옆에 적혀있던 “햇살도 배꼽을 잡는다”는 마지막 문장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현학적이거나 난해하지 않은 수사로 장식된 사진앨범을 수도 없이 만지작거리면서 어린 시절 언어 감각을 익혔던 것 같다.

‘뉴규?’에서 ‘찰칵’으로 끝나는 은서

괜히 추억을 늘어놓은 건 아니다. 과거를 회상하다 아이들에게 내줄 ‘글쓰기 숙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내 인생의 사진 10장씩을 고르게 한 뒤 코멘트를 적게 하는 거야.’ 아빠의 지시가 떨어지자, 아이들은 거실에 10여 권의 앨범을 펼쳐놓고 서너 시간을 끙끙거렸다. “아빠, 어떤 사진을 골라야 해? 기준이 뭐야?” “니들 마~음대로 하세요.”

은서는 먼저 유치원 때 소풍 간 사진을 골랐다. 갈대밭을 배경으로 친구 3명과 함께 웃고 있다. 코멘트가 코미디다. “갈대 속에서 귀여운 소녀 넷. 여경, 나, 유진, 가현이 손 맞잡고 웃고 있네요. 랄라라 랄라라.” 다시 쓰라고 했다. “랄라라- 랄라라- 귀여운 소녀 넷이 손을 맞잡으며 웃고 있네요. 랄라라 랄라라.” 랄라라 되게 좋아한다. 다시! “귀여운 네 명의 소녀들이 모두 모두 손잡으며 나란히 나란히. 활짝 치즈 김치. 귀여운 네 명의 소녀는 대체 누구일까?” 헐, 나란히 나란히는 또 뭐냐. 한 번 더! “여경이와 한유진과 가현이와 같이 손잡으며 웃고 있는 귀여운 소녀는 뉴규?” 크하하. 준석에게 동생을 지도하라는 의미에서 대신 써보라고 했다. 중딩은 수준이 다르겠지? 역시 달랐다. “까부는 놈, 명랑한 놈, 딴청 피운 놈, 이빠진 놈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입 벌리며 관중들이 된 갈대 앞에서 합창하네요.”

은서가 쓴 대다수의 사진 코멘트는 “뉴규?”로 시작해서 “찰칵!”으로 끝났다. 이런 식이다. “OO의 한 놀이터에서 활짝 웃으며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아이는 뉴규? (중략) 웃고 있는 그 틈을 타서 몰래 찰칵!” 이에 비하면 중딩 준석은 노회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낚인지 몇 년이던가. 하얀 수염을 하고 붉은 보따리를 맸지만, 짧고 검음이 확실한 눈썹과 구렛나룻은 훗날 내가 낚였음을 짐작케 하던가. 하지만 아직도 안 풀린 의문. 진짜 그 가짜 산타가 애들 선물을 다 샀는가?” 다섯 살 때 유치원에서 파견한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사진이다. ‘산타의 신화’에 속았던 꼬맹이 시절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두 살 아기 때의 사진엔 이런 글을 적었다. “마치 춤을 추듯 팔을 흔들며 강렬히 웃고 있는 나. 그런 날 조종하는 엄마. 엄마는 ‘슈렉 포에버’의 ‘피리 부는 사나이’인가?”

『전쟁교본』, 때로는 사진설명이 위대하더라

독자 여러분도 ‘내 인생의 사진’ 10장을 고른 뒤 코멘트를 붙여보시라. 실용적인 글쓰기 훈련의 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재미있다. 나는 이것을 한마디로 ‘추억을 찜 쪄 먹는 이미지 놀이’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어떻게 창의적인 말로 옮길지 고민하다 보면 이미지를 다양한 각도로 느끼고 분석할 줄 알게 된다. 이 작업을 끝낸 뒤엔 독일 작가 브레히트의 사진시집 <전쟁교본>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70여장의 전쟁 사진에 붙은 코멘트를 보면서 깨달을지도 모른다. 사진설명의 문학성을, 그 위대함을!

***

‘활짝’ 남발하는 꼬마는 뉴규?
은서가 글을 못 쓰게 철컥!

은서는 “뉴규?”와 “찰칵!” 말고도 “활짝”을 좋아했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활짝- 웃으며 찰칵!” “놀이터에서 활짝 웃으며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활짝 치즈하면서 엄마는 찰칵!” 은서야, 사진 찍을 때는 꼭 “활짝” 해야 하니? “화들짝” 놀라는 포즈는 안 되는 거니? 너의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구나. 지식이 많은 사람이란 사용하는 단어의 숫자가 많은 사람이란다. 똑같은 말 반복하는 친구는 지겹단다. 너의 단어를 이용해 이렇게 타이르고 싶구나. 사진설명 달 때마다 “활짝”을 남발하는 꼬마는 “뉴규?” 한심한 은서가 글을 못 쓰게 손을 瞥어라, “철컥!”

다음은 은서의 사진과 설명문이다.

“여기는 갈대속 여기에 귀여운 소녀 네명은 왜 왔을까? 진세유치원 소풍으로 왔지. 귀여운 소녀는 여경, 나, 유진, 가현이라네. 초롱초롱한 눈빛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활짝~ 웃으며 찰칵!”

‘랄라라’와 ‘나란히’가 뒤범범된 글을 썼던 문제의 사진이다. 은서는 최종적으로 위와 같이 글을 썼다. 준석이가 대신 쓴 사진설명을 다시 보자. “까부는 놈, 명랑한 놈, 딴청 피운 놈, 이빠진 놈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입 벌리며 관중들이 된 갈대 앞에서 합창하네요.” 이게 바로 초딩과 중딩의 차이다.

“친구 따라 엄마 따라 민속체험관에 왓네. 저 자가 누구냐고? 바로 나라네. 나. 내가 진짜 명성왕후가 된 건 아니라네. 친구 따라 엄마 따라 민속체험관에 와서 내가 명성왕후가 된 기분. 기분은 좋다네. 하지만 정말 명성왕후가 되면 살해당할 수 있다네. ㄷ~ ㄷ~ ㄷ~”

처음엔 이렇게 썼다. “엄마랑 친한 아줌마와 그 아들들과 같이 민속체험을 하러 가서 왕비가 된 기분은...킹왕짱!” 조금만 좋다 싶으면 ‘킹왕짱’이라니 쯧쯧.

“갓 태어나서 한 돌이 지났을 때 침대에 앉아서 분홍 머리핀 꽂고 실눈웃음(눈웃음)을 지으며 활짝~ 참~ 아름다운 모습이라네.”

헉. ‘자뻑’은 용서할 수 없다. 글을 쓸 땐 겸손해야 한다. 살다 보면 의도적으로 뻔뻔한 글을 써야 할 때도 있다. 평상시엔 겸허한 자세로 글을 쓰는 게 옳다. 본인이야 “솔직한 게 무슨 죄냐”고 변호하겠지만, 남을 불편하게 하는 솔직함은 죄다. 뭐 그렇다고 해서 “참 못 생긴 소녀라네”라고 쓸 필요는 없겠지.

“짜라라란~ 짜라라란~ 와와와~ 와와와~ 짝짝짝. 열심히 피아노 치고서 멋진 박수를 받았네. 예쁜 꽃도 받고서 뒤에서 장난치고 있는 오빠. 활짝 웃고서 찰칵!”

자기를 향한 끝없는 찬사. 자뻑과 자찬을 절제해야 한다니까.

은서가 고른 10장의 사진 중 4개만 골라 소개했다. 사진설명문(또는 사진에세이)을 쓰는 원칙이나 방법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마음 가는 데로 쓰면 된다. 다만 사진을 찍던 당시의 정황과 사실을 암시하면서 추억을 풍요롭게 되새기도록 문장들을 잘 조립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단순하고 유치한 문장보다는, 숙고 끝에 다듬어낸 비유와 표현들이 두고두고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한 카메라회사의 광고카피중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게 있었다. 한 문장 덧붙이고 싶다. “근사한 기록은 기억의 수명을 연장한다.”

다음은 준석의 사진과 글이다. 10장 중에 5장만 골랐다.

“낚인지 몇 년이던가. 하얀 수염을 하고 붉은 보따리를 맸지만, 짧고 검음이 확실한 눈썹과 구렛나룻은 훗날 내가 낚였음을 짐작케 하던가. 하지만 아직도 안 풀린 의문. 진짜 그 가짜 산타가 애들 선물을 다 샀는가?”

앞글에서 나온 사진이다. 다섯 살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당시 현장에서 준석은 산타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사슴은요?” 곤혹스러워하는 산타를 향한 2차 질문. “근데 왜 운동화를 신으셨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준석은 산타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었다. 미심쩍기 짝이 없었지만.

준석의 사진설명은 은서의 그것에 비해 ‘컨셉’이 있다. 무슨 말을 중심으로 써야 할 지 눈치를 챈 것이다. 은서는 그저 “참 좋았다. 좋았다. 멋졌다”고 한 반면, 준석은 당시 사진현장의 핵심적인 사항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포착한 셈이다.

“아랫니 하나 치과에 던져주고는 소파에 있다. 친구들은 무언가 보고 있다. 사진기를 본 건 나뿐인가? 친구들이 모였는데 우리는 과연 뭘 한 걸까~요?”

이런 제목을 붙이면 적절하겠다. ‘유치한 시절. 사람들은 누구나 유치(乳齒)가 시원하게 빠지던 시절을 통과의례로 경험한다. 이건 뭐 그저 그렇다. 명확한 컨셉이 없다.

“이제 곧 개구리들과 곰과 뱀이 겨울잠에서 일어날 준비를 할 시점. 일등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잔 다짐을 받고 개나리 같은 꽃다발을 들고 나는 입학식에 임한다.”

2004년의 초등학교 입학식 사진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꽤 추웠다. 꽤 어른스럽게 설명을 달았다. 일등보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잔 다짐을 받고? 다짐을 한 건 아니라고? ㅎㅎ. 상투적인 사진설명이긴 하지만, 상투적인 문장들이 마음에 다가온다.

“누가 누구인가? 준석이는 누구인가? 딱~ 봐도 흥부와 놀부는 우리가 그렸음을 짐작하고 한눈에 파악할 수 있지만, 나도 나를 모르겠다.”(초등학교 1학년 수업시간 중에)

별 느낌이 없다. ★☆

“이걸 보고 누군 합성이라 생각하겠다.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그러나 합성이 아니다. 그건 그렇고 참 조화가 잘 맞는다. 하얀 가루가 내리는 가운데 꽃다발과 그 옆의 교문에 적힌 교명, 가운 쓰고 우산은 없었으면 좋을걸... 이것이 바로 인생회상에 꼭 필요한 사진일 것이다.”(올해 2월 초등학교 졸업식)

가슴이 살짝 뭉클. ★★★

이런 사진설명 달기 놀이는 12월 송년 가족모임의 작은 이벤트로 열어도 괜찮겠다. 한 해를 돌아보는 뜻에서 가족 구성원들마다 올해 자신의 사진을 선정한 뒤(한 장이든, 세 장이든, 열 장이든) 그 사진에 적절한 설명이나 에세이를 적는 거다. 돌아가며 상대방의 사진에 글을 써줘도 괜찮다. 이걸 공유하거나 하나로 편집하면 가족애를 각별하게 진작시키는 훌륭한 ‘미디어’가 되겠으나…… 굳이 그런 귀찮은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놀 필요가 있냐고 반박하실 ‘가문’ 제위께서는 생략하시길.

모든 기록은 때가 있다. 적시에 기록된 사진설명은 추억의 전도체로서 사진의 가치를 백배, 천배 높인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은 달랑 하나.

당신의 문장이 사진에 날개를 달아준다.

고로...

사진 옆에 끼적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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