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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간다

<봄날은 간다>, 알면서도 반복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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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라는, 끝내 아우라를 상실하지 않을 것 같은 주술구조의 문장. 그러나 주어는 ‘봄날은’이 아니다. 그 앞에 숨겨진 ‘누군가’이다. 예컨대, ‘(그/녀) 봄날이 간다’와 같이 ‘봄날’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 봄날이 가는 것이 아픈 것이다. 상우처럼. 그리고 예전에 상우 같았을 은수처럼.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2001


 

‘내가 그/녀를 놓을 수 있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면서, 생각하기 때문에 전화기 숫자를 빠른 속도로 누르는데, 신호음이 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받는데, 서로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 사이를, 할 말이 없는 것으로 둘 다 인정하고, 전화를 끊고, 그 돌연한 끊음 때문에 ‘나’는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헤어질 수 있기 때문에 통화를 시도하였는데, 통通-화話를 단절시키는 침묵의 소음 때문에 “할 말이 없죠?”라는 문장이 새어나오고, 하릴 없이 동의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 때문에 전화는 끊기는 것이다. 덜컥, 소리와 함께 ‘나’는 ‘그/녀’와,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다고, 마음이 덩달아 덜컥 내려앉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걸려오지 않는 전화. ‘나’는 내일은 결코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내일이 되면 역시 헤어질 수 있으리라는 돌연한 믿음 때문에 또 전화할 것이다.

다 안다.
다 알면서 반복한다.


이렇게도 봄날은 간다. 봄날이 온 것도 몰랐는데, 시간은 기어이 봄날은 갔다고 사후적으로 인식시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시간의 탓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 죽음도, 이별도, 다시 사랑도, 소리가 시간 속에서 진동하며 존재를 확인시키듯, 시간 속에서 사랑은 내용물도 없이 진저리를 친다. 그리고 봄날이 가면 그뿐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이영애)’는 무심한 팜파탈이다. 팜파탈은 무심할 때 가장 강력하다. 문득, 대화의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소화기 사용법을 알아요?”라고 물어 상대를 긴장시키고, 바로 그 어조로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역시 오해될 여지가 있는 말인 줄 알고 써서 상대를 오해시키고, 또 그 뉘앙스로 가볍게 무심하게 “자고 갈래요?”라고 밥풀을 주워 먹듯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수의 “자고 갈래요?”에서 ‘상우(유지태)’의 “나 좀 재워주라”까지 걸린 시간은 세 계절이 채 안 된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와 “내가 전화하지 말랬지!”사이의 시간.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는 말이 폐기되어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부유하는 시간은, 속절없이 짧다. 영화는 그 시간을 간편하게 자르고 이어 붙이지만, 현실에서 사랑과 이별이라는 이종異種해프닝의 결합은, 수많은 알레르기와 유치한 방어기제와 거세거나 미미한 발증發症과 오한을 동반한다.

마침내
실연인 것이다.


사랑은 환상 속에서 커갔지만, 실연은 환상이 거세된 현실에 맞부딪치게 한다. 그 현실에 초현실적으로 눈부신 꽃잎이 날리더라도, 상우는 더 이상 상상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별의 실재에 맞닥뜨려진다. 그 이별의 실재는, 상우의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말을 회수하게 한다. ‘사랑은 변한다’라는 회의조懷疑調의 한탄이 아니라 ‘변하는 것이 사랑이다’라는 담담한 명제를 인각하는 것이다. 실재를 보고 만 상우는 그 신산함만큼 고요해진다. 은수와 악수를 하고, 옷깃을 바로잡아주는 은수의 손길을 내버려두고, 다시 돌아서는 은수의 눈빛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않는다.

‘봄날은 간다’라는, 끝내 아우라를 상실하지 않을 것 같은 주술구조의 문장. 그러나 주어는 ‘봄날은’이 아니다. 그 앞에 숨겨진 ‘누군가’이다. 예컨대, ‘(그/녀) 봄날이 간다’와 같이 ‘봄날’이 가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 봄날이 가는 것이 아픈 것이다. 상우처럼. 그리고 예전에 상우 같았을 은수처럼.


***

당신은 이별의 찰나를 회상합니다

블루매트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어색하게 초점을 찾으며 톤을 숨기느라 꺾이던 목소리도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습니다. 분명 쇼트컷short cut이었을 그 장면이 반복 재생되어 롱테이크long take로 넘어가버리는 이 기막힌 기억의 편집을 당신은 재편집할 힘조차 없습니다.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보이스오버voice over로 화면 밖에 머물고 있고, 화면 안에는 혼자 남은 당신뿐인 것입니다.

당신은 설치미술처럼 몸을 어색하게 놀리며 프레임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의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지만, 당신의 시퀀스는 모노드라마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 어떻습니까. 당신에겐 플래시백flash back 할 수많은 장면들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영화는, 그래서 시간에 조종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을 재배치하는 당신만의 컬트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이토록 영화같은 당신>은 매주 수요일, 총 10회 연재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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