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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끝을 경외해본 적이 있었을까

이틀간의 기나긴 소나기가 스러지는 아침, 북적대는 장사꾼들의 흥정하는 목소리가 잿빛 언덕의 고요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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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리는 해가 정상에 머무를 즈음하여 잦아들더니, 모래와 돌로 된 낡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늦저녁까지 공명시키고 있다.

이틀간의 기나긴 소나기가 스러지는 아침, 북적대는 장사꾼들의 흥정하는 목소리가 잿빛 언덕의 고요를 깨운다. 이 소리는 해가 정상에 머무를 즈음하여 잦아들더니, 모래와 돌로 된 낡은 도시의 구석구석을 늦저녁까지 공명시키고 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이따금 세상의 소음이 낯설게 느껴진다. 허기진 배, 젖은 양말, 그리고 배터리를 다한 알람시계가 익숙해질 무렵이다.


우리는 어느덧 뿔 모양으로 솟은 두 개의 산을 떠나 모래 언덕 위에 지어진 유구한 역사의 도시 페즈에서 벌써 네 번째 밤을 보내고 있었다. 거대한 성곽 안에 고스란히 보존된 아랍의 신기루, 옛사람의 자취를 그리워하게 하는 이 전 인류적 정서가 우리의 발목을 잡은 탓이었다.

페즈에 도착한 첫날 저녁, 우리는 북적대는 시장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던 작은 여인숙 옥상에 짐을 풀었다. 현지의 가정식 식당과 신선한 즉석 과일주스 가판대들이 즐비한 최적의 거리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페즈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기막힌 경관을 갖춘 숨은 전망대였다. 꽤 운이 좋았다.

먼동이 틀 때 즈음해서 어김없이 들리는 장사꾼들의 가게문 여는 소리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옥상 발치에서 굽어보는 시장 골목골목의 정경은 그야말로 1천 년 전부터 내려옴직한 페즈 시민들의 해묵은 자화상이었다. 차 한 대도 지나가기 힘든 좁은 거리에 저마다 비집고 들어앉은 갖가지 노점상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 갓 도련한 짐승의 가죽을 염색하는 작업장에 들끓는 파리들, 다부진 화강암판에 코란 구절을 새겨넣는 석공들의 진지한 눈빛 같은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이 아닐 수 없었다.

페즈에서의 며칠은 여유와 휴식이었다. 때로는 건물 맞은편 옥상에서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알록달록한 빨랫감을 구경하기도 했고,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개와 고양이들의 자리다툼을 지켜보기도 했다. 또 일정한 시간이 되면 도시 곳곳에 울려 퍼지는 예배시간 알림방송에 맞춰 일제히 모스크를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조용한 눈길로 굽어보기도 했다.

페즈에서의 마지막 저녁, 예배당으로 향하는 모로코인들처럼 우리 두 사람 역시 비밀스럽고도 성스러운 ‘자연의 전당’에 입성入城했다. 태양의 흔적 위로 아스라이 드러난 이른 저녁 초승달이 범람하는 붉은 구름에 소리없이 이지러지는 순간, 어떤 감흥에 의해서인지 소스라 치는 날개짓으로 창공을 횡단하던 수백 마리의 제비떼들…….

마술 같은 긴 저녁을 보낸 페즈의 밤은 고요했다. 별을 쫓던 동방박사의 긴 여독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언덕 위에 점점이 남아 있던 노란 불빛들이 하나둘 스러져 갔다. 우리는 아직도 태양의 열기를 머금고 있는 옥상의 돌바닥에 앉아 떠오르는 별을 기다렸다. 그가 붙이는 담뱃불만이 세상의 유일한 반영反影이었다.

나는 그가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숙연히 요동치는 잉걸의 환영幻影에 의지해 어둠 속에 뭉뚱그려진 그의 표정을 읽어 내려갔다. 그에게서 저녁의 끝을 맞이하는 여행자의 자유, 하루를 마감하는 인간의 엄존함, 그리고 사랑을 명상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내가 살면서 보낸 무수한 저녁들과 오늘 단 하루 존재할 저녁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과연 인생의 가장 작은 단위인 하루의 끝을 경외해본 적이 있는지, 오늘처럼 낮과 밤 사이를 뚫고 단 하루 스산히 스쳐 지나갈 이 짧디 짧은 저녁의 기억을 온전히 간직할 요령을 알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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