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다시 보고 싶은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
행복론의 ‘본좌’
당장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도 바쁘게 지나가 버린 하루를 되새기기라도 하는 넉넉한 시간이 되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난 왜 사는 걸까?’
이젠 좀 지겹기까지도 한 인간의 영원한 질문, ‘무엇 때문에 사느냐?’는 참 오래도록 인간의 생각을 지배해 오고 있습니다. ‘왜 사느냐?’는 이 질문은 적어도 인간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에 그림을 그려 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인터넷으로 전 세계 네티즌들과 손쉽게 소통하게 된 지금까지 한순간도 삶의 화두에서 크게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질문입니다. 당장 이 글을 읽고 계실 여러분도 바쁘게 지나가 버린 하루를 되새기기라도 하는 넉넉한 시간이 되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합니다. ‘난 왜 사는 걸까?’
삶의 기저를 꿰뚫는 근본적이고 날카로운 질문에 인류는 다양한 시간과 계층 속에서 각자의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만, 만약 이 질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질문에 관해 가장 오래전에 체계적인 논지를 펼쳤던 한 학자의 이야기에도 큰 관심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서양 학문의 시초라고 불려도 좋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근대 과학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면서 과학의 영역에서 갈릴레이를 필두로 한 과학자들로부터 시련을 당한 바 있지만, 철학 등 지식과 사고에 관련된 분야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함께 지성사의 시초라 불려도 좋을 만큼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는 서두에 언급한 질문,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해 꽤 오랫동안 라이시움에서 강의를 진행한 기록을 남겼는데,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
‘니코마코스’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입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이름도 니코마코스입니다). 그리고 윤리학이란, ‘ethica’의 한국어 번역으로, 말 그대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문을 통칭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윤리와는 조금 그 내용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제목으로만 보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들에게 남기는 윤리에 대한 고찰 정도가 되겠습니다만, 실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들에게 남겼다기보다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의를 통해 남긴 강의록에 가까운 형태입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강의를 들은 제자들이 기록을 정리해 아들에게 바쳤다는 의미로 위와 같은 제목이 되지 않았나, 라고 추측하고는 있습니다만, 제우스와 함께 살았던 양반들의 시대이다 보니 정확히 어땠다는 이야기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사회적인 윤리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갑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기왕이면 보다 나은 삶을 사는 방향이 좋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잘사는 것’, 다시 말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태어난 이후에 가져야 하는 삶의 목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행복을 행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어떤 다른 것을 유발시키는 원인이라기보다는 최종적인 목표입니다. 행복은 인간이 시간 속에서 느끼는 특정한 기분 또는 상태의 순간을 가리키는 단어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가치는 아니지만, 적어도 가리키는 그 순간만큼은 매우 명확한 목적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와 존재를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에 대해 보다 보충하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플라톤과의 대비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널리 알려졌다시피, 플라톤은 ‘이데아’로 통칭될 수 있는 지고지순, 절대 불변의 가치를 통해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완벽하지 못한 세계이지만, 저 피안의 너머에는 말 그대로 완벽한 존재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우리는 다만 그 이데아의 모사일 뿐이라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비하여 만물의 존재가 상호 간의 작용에 의해 규정됨을 이야기합니다. 종이컵이라고 우리는 특정한 물체를 이름 지어 부르지만, 그것은 거기에 물을 담아 마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는 재를 떨면 그 사물은 ‘재떨이’이고, 바닥에 구멍을 뚫어 촛불을 끼우면 촛농을 받치는 ‘촛대’가 됩니다. 사물과 인간의 존재는 상호 인과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주장을 발전시켜 가는데,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는 개념입니다. 행위는 목적을 통해 그 의미를 발현하고, 하나의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을 위한 행위가 됩니다. 일종의 연쇄 작용을 통해 모든 행위는 지속적인 운동을 합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오늘 점심을 먹는 행위는 오후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후의 배고픔은 왜 올까요? 무언가 활동을 해서 에너지를 소모했기 때문이겠지요. 그 활동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아침에 회사에서 두 시간의 회의와 한 시간의 문서 작업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네, 월급을 타야 하니까요. 월급은 왜 타야 하죠? 내가 밥을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목적과 행위가 계속 이어지는 인간의 삶을 연장해서 사고합니다. 결국 그 목적의 끝에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행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을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라는 것은 탁월함으로부터 온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합니다. ‘탁월함’이라는 개념은 사실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이 고교 윤리 시간에 배운 짤막한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선’(善)이라고 배우신 이야기가 맞습니다. 예전엔 ‘선’이라고 번역했는데, 최근에 나온 『니코마코스 윤리학』 완역본에서는 ‘탁월함’이라고 번역했네요. 개인적으로도 탁월함이 더 와 닿습니다.
행복이란 탁월함에 따라오는 영혼의 상태 또는 활동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탁월함을 발휘하면, 행복이라는 상태는 탁월함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결국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탁월함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탁월함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실제 본문을 통해 보면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절제와 용기, 다른 탁월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든 회피하고 두려워하며 어떤 자리도 지켜 내지 못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며, 반대로 모든 일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아무 일에나 뛰어드는 사람은 무모한 사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즐거움을 탐닉하며 삼가는 일이 없는 사람은 무절제한 사람이 되고, 반대로 즐거움이라면 일단 피해 버리는 사람은 촌뜨기처럼 목석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에 의해 보존된다.”
‘중용’이라는 개념이 곧 탁월함을 지탱하는 개념입니다. 중용이란, 넘치고 모자람의 사이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차고 넘치면 탐욕스러운 자가 되고, 돈에 대한 욕심이 너무 없으면 사람이 빈천해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의 고백이 너무 어려운 사람은 평생 숙맥 소리를 면치 못하고, 아무 이성이나 보고 마구 들이대는 사람은 이른바 ‘껄떡쇠’가 되기 십상입니다. 이 넘침과 모자람의 사이를 지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는 ‘탁월함’이라고 불릴 만한 가치가 있는 행위입니다.
단,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동아시아의 덕목인 중용과는 조금 그 의미가 다릅니다. 동아시아의 중용은 ‘정중동’(靜中動)에 가깝습니다.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되 움직인다는 일종의 역설을 통해 동아시아의 중용은 이해될 수 있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며, 정중동과 같은 역설의 의미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러한 중용의 개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함을 발현하는 인간을 이야기하고, 탁월함을 통해 인간은 행복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영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품고 있는 논지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편적인 논의만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는 애초에 노예와 시민이 확실하게 구분된 사회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윤리학 강의는 정확히는 시민권을 가진 그리스 시민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고, 따라서 ‘시민의 윤리학’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의 윤리학 범주에 노예, 장애인, 여성 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책에서 제시하는 가치들도 유심히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의 시민 남성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가치들이 상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문제에서 절제와 사치를 논하는 것은 그만큼의 재산을 전제로 하고, 전투에서 발휘하는 용기와 도망치는 비겁의 중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체가 무기를 들고 전장에 설 수 있는 시민 남성임을 이야기합니다(그리스의 군사 체제는 시민이 자기 돈으로 무장하여 참전하는 중장 보병 시스템이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고대 그리스의 특권 계급이었던 시민이 현대 민주주의에 의해 보편 가치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고, 나쁘게 생각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이야기가 애초부터 귀족들의 놀이에만 머무른다고 볼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서 본다면, 결국 오늘날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고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추구하는 행복이 중용의 가치에서 비롯되는 탁월함에서 온다는 해석은 과학적으로 엄밀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실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매우 보편적이고도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그것이 결코 큰 깨달음이 아니라는 사실은, 행복이 그리 멀리 있는 가치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증명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많은 자기계발서들은 행복의 가치를 앵무새처럼 되뇝니다만, 이상하게도 그런 책들이 말하는 행복은 모순되어 있습니다. 책 스스로가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행복의 사례로 드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백만장자나 돈방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건 이미 책 스스로가 방향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책이 말하는 행복은 그 책이 잘 팔려서 저자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 주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정말 행복을 찾고 싶다면 행복을 사고하는 원천을 되짚어 볼 것을 권합니다. 중세에 잠시 맥이 끊어지기는 했지만 세계화와 산업화 이후 세계 사고의 중추가 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남긴 행복에 대한 메시지는 단순하고 짧은, 팔아먹기 위한 사고를 넘어서 삶의 뿌리부터 뻗어 나오는 이야기를 던지고 있습니다.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닌 것이고, ‘다시 보고 싶은 책’이 괜히 다시 보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
관련태그: 고전
<아리스토텔레스> 저/<이창우>,<김재홍>,<강상진> 공역16,200원(10% + 1%)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실제로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에 큰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였다. 이 책『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현실에 대한 관심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될 삶의 목표와 그 실현 방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