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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 예능인과 뮤지션 사이에서 한판 도박을 걸다

예능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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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들은 이효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 건지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핑클 시절의 이효리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요.

2010년 4월 11일, 동영상 사이트 YouTube를 통해, 발매를 이틀 앞둔 이효리의 정규 4집 <H-Logic>의 타이틀곡 「Chitty Chitty Bang Bang」을 비롯한 몇몇 음원이 유출되었습니다. 카운트다운을 하며 앨범 공개를 준비하던 이효리와 엠넷미디어 측으로서는 당혹스러웠겠습니다만, 팬들 입장에서는 <H-Logic>의 대강의 얼개를 먼저 점쳐 볼 수 있는 기회였을 겁니다. 유출 사건이 터지기 보름 전에도 벌써 몇몇 발 빠른 DC 효리갤러들은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트랙 리스트를 보고 외국곡을 리메이크한 몇몇 트랙들의 원곡을 찾아내는 기염을 토했거든요. 선 공개된 「그네」까지 계산에 넣으면 대강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이죠.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4월 12일) 아침, 예정보다 하루 먼저 <H-Logic>의 전 곡이 주요 포털 사이트와 음원 사이트를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이번 앨범은 지난 몇 년간 팝 시장을 휩쓴 Dirty South 스타일 힙합을 중심으로 전체 수록 트랙이 힙합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장르 편중도와 심화도는 그의 전작 <It's Hyorish>보다 훨씬 심하고 스타일의 통일성은 리쌍의 <Hexagonal>보다 더 일관된 편이라 힙합 앨범으로 분류하지 않으면 이번 앨범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효리가 힙합 장르를 시도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여태껏 가장 꾸준히 하고 있는 장르는 힙합이지요. 여태껏 E-TRIBE에게 받았던 세 개의 트랙들ㅡ「노예」 「U-GO-GIRL」 「P.P.P」ㅡ도 힙합이었고요. 디스코그래피를 보다 보면 발라드, R&B, 팝 댄스, 힙합 등 이런저런 장르들이 맥락 없이 더부살이하던 초창기에서 근작들로 올수록 점차 전체 트랙들이 힙합 트랙들로 채워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전작 <It's Hyorish>는 앨범을 여는 「천하무적 이효리」부터 타이틀 「U-GO-GIRL」, 앨범을 닫는 「Unusual」까지 앨범의 대부분이 힙합 트랙이었고, 이번 앨범은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냥 힙합 앨범입니다. 그런데 희한한 건 어지간한 팬이 아닌 이상 ‘이효리’라는 이름과 ‘힙합’이라는 단어를 쉽게 매치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저 역시도 그의 정규 음반들을 쭉 늘어놓고 한자리에서 다 듣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자명합니다. 이효리는 본업이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가수로서 진지한 담론의 대상이 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이효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어떤 건지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겁니다. 핑클 시절의 이효리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요. 사상 최초로 예능인이 아니라 가수가 연예 대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탄생시킨 <패밀리가 떴다>의 국민 남매, 본인이 그렇게나 하고 싶었다던 소주 광고, 아무 거나 입은 거 같은데도 언제나 블링블링한 그의 화보들,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심각하게 뒤흔들었던 「Get Ya」의 표절 시비, <세잎클로버>와 <사랑한다면 그들처럼>으로 이어지는 지지부진한 배우 커리어, ‘이러다가 땅끝 마을까지 비킬 기세’란 말을 절로 나오게 하는 연예부 기자들의 ‘이효리 비켜’ 시리즈까지. 그를 수식하는 여러 가지 키워드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 ‘가수’로서 진지하게 그를 평가하는 키워드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법합니다. 이효리를 아는 폭넓은 연령대의 대중에게 그를 각인시킨 건 <해피투게더 - 쟁반 노래방>에서 신동엽과 찰떡 호흡을 맞추고 <패밀리가 떴다>에서 자다 일어난 ‘생얼’ 촬영도 불사한 그의 예능 행보잖아요. 제 말이 미심쩍으시면 속는 셈치고 댁에 계신 어르신들께 “이효리가 부른 노래가 뭔지 아세요?”라고 물어 보세요. 10초 안에 개운하게 대답하시는 분이 드물 겁니다. ‘섹시 아이콘’ 이미지도 문제입니다. 무대를 압도하는 그의 퍼포먼스와 그가 찍는 화보들 속에서 이효리는 시각적 즐거움의 대상으로 소비되지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이효리 관련 기사의 헤드라인은 열에 아홉이 그가 무엇을 입었고 노출 수위는 얼마나 되며 대중이 얼마나 열광했는지에 방점을 찍잖습니까. ‘가수’로 13년을 살아온 사람치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대중에게 ‘가수’ 이효리는 그 정체가 잘 잡히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사태에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물론 이효리 본인일 것입니다. 그룹 활동이야 자기 색을 내기 쉽지 않다 하더라도, 자기 이름을 걸고 정규 앨범을 3장이나 발표한 솔로 7년 차의 아티스트가 가수로서의 자기 색이 잘 잡히지 않는 것은 결국 본인 책임이지요. 물론 그의 솔로 1집의 세일즈는 폭발적이었고 당시 ‘이효리 신드롬’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섹시 디바’ 카테고리 안의 다른 여가수들과 확연하게 차별되는 이효리만의 색깔은 무엇인가 하는 점은 명쾌하지 못했습니다. 1집 <STYLISH...E HYOLEE >는 한 앨범 안에 묶여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곡들이 맥락 없이 섞여 있었고 이효리의 보컬은 각각의 곡이 요구하는 바만 따라가기에도 벅찼지요. 「10 Minutes」는 지금과 당시의 시차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성긴 비트에 빈약한 멜로디 라인, 아마추어 수준의 보컬이 불안하게 동거하고 있어서 과연 이 곡이 어떻게 그런 메가 히트를 불러올 수 있었나 신기할 지경입니다. 잔인한 이야기입니다만 1집의 성공은 이효리의 눈웃음과 춤사위 같은 육체의 전시에서 비롯한 것이지 음악적으로 이룬 성과는 거의 없었다 말해도 좋을 겁니다. 보통 그룹 출신 가수들의 솔로 데뷔 앨범이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대중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팬들에게는 팬 서비스 차원에서 여태껏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면모들을 보여 준다는 걸 감안하면 1집의 엉성한 모양새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Do Something」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샀던 2집 <Dark Angel>의 타이틀 「Get Ya」에 이르러서는 가수로서의 커리어 자체가 휘청했습니다.


앨범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Dark Angel>은 전작에 비해 힙합 장르를 중심으로 맥락을 잡아갔던, 가수 본인에게는 나름 중요했을 앨범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중이 가장 먼저 접한 타이틀곡이 그것도 하필이면 시대의 아이콘 브릿의 히트곡과 데칼코마니처럼 유사했으니 그의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를 하는 것이 무의미해져 버렸습니다. 노래만 표절 의혹에 시달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효리가 입고 나오는 의상과 추구하는 콘셉트의 전반적인 면들이 집단 성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무대에선 이효리 본인보다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브리트니 스피어스, 아무로 나미에, 비욘세와 같은 레퍼런스들이 더 많이 어른거렸습니다. 어쩌면 이효리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한국 대중가요 신에서 해외 아티스트들의 콘셉트를 따라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말입니다. 하지만 정상의 위치에 있는 이효리에게 대중은 더 많은 것을 기대했습니다. 뭐 하나 시원하게 해명하거나 하는 일 없이 「Get Ya」 활동을 접고 2집 활동을 잠시 쉬던 이효리는 후속곡 「Shall We Dance」로 계속 활동을 이어갔습니다만, 무너지는 커리어를 다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렇다 할 자기 색깔이 제대로 잡히기도 전에 카피캣 선고를 받은 가수를 누가 진지하게 평가하고 싶었겠습니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집에 비해 더 나아진 것도 없는 답답한 보컬과 되려 1집 때보다 퀄리티가 하향 평준화된 트랙들은 남아 있는 한 줌의 기대조차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이 앨범을 성의를 가지고 음악적으로 진지하게 평가한 얼마 안 되는 반응들은 하나같이ㅡ그것도 엄청 화려한 수사를 동반한ㅡ혹평이었습니다. “보통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하면 ‘전작보다 못한’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텐데, 효리는 전작도 (음악적인 측면에선) 별 볼일이 없었다. 1집은 안 좋았고, 2집은 더 안 좋은 것이다”(이즘), “클리셰가 오믈렛에 잘못 뿌린 케첩처럼 사방에 튀어 있는 이 지루한 클럽 댄스곡이 주는 유일한 즐거움이라면 「10 Minutes」나 「애니모션」(Anymotion)에 비해 훨씬 재미없다는 것뿐이다”(웨이브) 같은 평들을 보세요.

그 이후로 이효리는 한동안 가수로서의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합니다. 물론 디지털 싱글인 <Any Star>와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방영 시기에 맞춰 발매된 싱글 <IF IN LOVE LIKE THEM>이 있었습니다만, 둘 다 그간 이효리가 쌓아 올린 명성을 깎아 먹는 커리어였습니다. 특히나 <IF IN LOVE LIKE THEM>은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린 세일즈 실적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심각했는데요,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죽은 시체에 채찍질을 하는 듯한 앨범이었습니다. 전작들에서 선보인 어둡고 무거운 ‘섹시 여전사’ 콘셉트를 여전히 고수하며 눈에 힘만 잔뜩 준 「Toc! Toc! Toc!」은 어쩐지 노래하는 본인조차 불편해 보였고, 같이 수록된 발라드 「잔소리」는 리스너들로 하여금 탄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맨정신으로 듣기엔 낯간지러운 가사와 여전히 곡 해석 능력이 떨어지는 보컬이 만나 듣는 내내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트랙이었습니다. (「잔소리」에 대한 제 견해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아니 세상에 ‘압구정 자주 가지 말아요. 예쁜 여자 많아 불안해요’ 같은 가사를 어떻게 안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이 앨범으로 인해 뮤지션으로서의 그의 커리어는 완전히 사망 선고를 받은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더 이상 새로운 걸 바라지도 않았고, 가수로서 뭔가 유의미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도대체 답이 보이지 않는 가수 활동보다 더 중점을 두고 열중했던 것은 예능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유재석과의 안정적인 파트너십을 보여준 KBS <해피투게더 시즌2 - 프렌즈>의 진행과 SBS의 <일요일이 좋다 - 체인지> <일요일이 좋다 - 패밀리가 떴다>, MBC <무한도전>의 드라마 특집 출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활동은 이효리를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었습니다. 비록 더 이상 이효리를 수식하는 많은 찬사들이 점차 띄워주기용 레토릭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만, 날고 기는 예능 선수들 가운데에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 덕에 탑클래스 엔터테이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업이 침몰하는 와중에 예능으로만 커리어를 이어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가수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지 못한 채 예능에 전념했던 이효리인지라 점차 가수로서의 이미지는 희박해지는 걸 막기는 힘들었어요. 대중과 평단 모두 그를 ‘한물간 가수’로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이런 세간의 평가를 이효리는 단 한 방으로 돌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다름 아닌 정규 3집 <It's Hyorish>의 대대적인 성공이 그것이었습니다.

그의 몰락을 불러온 <Dark Angel>로부터 2년 4개월이 지나고, 아무도 그에게 이렇다 할 기대를 걸지 않았던 시점에 공개된 <It's Hyorish>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지금이야 「U-GO-GIRL」 「Gee」 「냉면」의 3연타석 홈런으로 귀하신 몸이 됐습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신인 작곡가에 불과했던 E-TRIBE의 곡을, 박근태나 김도현과 같은 당시 특 A급 프로듀서들의 작품을 제치고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것부터가 모험이었어요.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장르적 특성은 힙합으로 조율이 되었으며, 곡의 배치도 전체 앨범의 러닝 타임에 맞춰 유기적으로 해냈습니다. 무엇보다 곡들이 전작들에 비해 부쩍 좋아졌고 이효리의 보컬이 곡이 요구하는 수준의 퀄리티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안쓰러웠던 음역대가 넓어진 것은 물론이고 곡 해석 능력도 부쩍 늘었지요. 예전 같았으면 「사진첩」이나 「빨간 자동차」 같은 곡을 부르면 듣기만 해도 숨이 차서 어려웠을 텐데 김건모와의 듀엣도 그럭저럭 해내기에 이르렀으니 장족의 발전이었습니다. 심지어는 「U-GO-GIRL」의 첫 라이브 무대에서는 사전 녹음을 한 것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죠. 가수 데뷔 10년 만에 가창력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게 된 겁니다.

‘섹시 여전사’ 이미지에 갇혀 시종일관 어둡거나 답답했던 전작과는 달리, 예능을 통해 보여진 이효리의 밝고 생기 있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것 또한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어깨에 힘을 주고 강한 척하는 게 아니라, 나 역시도 아플 때가 있고 힘들 때가 있으며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트랙들은 전작에서 뒤돌아선 리스너들을 다시 돌려세우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It's Hyorish>가 거둔 성취는 이뿐이 아닙니다. <STYLISH...E HYOLEE >가 나올 때처럼 핑클 활동의 후광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Dark Angel>이 나올 때처럼 전작에서 이어지는 기대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모두의 기대치가 이미 바닥을 친 상황에서 온전히 음악과 무대 연출로만 이뤄 낸 역전 홈런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콘텐츠만으로 정면 승부를 본 첫 앨범이었어요. 게다가 퀄리티와 장르의 편차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수록곡 중 어느 한 곡도 안전빵으로 메운 곡이 없었습니다. 최신 해외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유입하는 동시에 힙합에 대한 방향성이 한눈에 봐도 선명하게 두드러진 앨범이었지요. 오랜 시간 헤맨 끝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신 있는 장르를 찾았다는 자신감이 드러났고 그 자신감은 리스너들에게도 자연스레 전달되었습니다. 전작의 무참한 실패에 주눅이 들 법한데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하고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는’ 이미지로 돌아온 이효리는 다시 한번 대중의 환호를 한 몸에 사며 자기 증명에 성공합니다. 당당함과 자신감을 자신의 색깔로 확립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이렇다 할 자기 색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해 낸 소중한 성취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앨범이 가수로서의 이효리의 색깔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앨범이었는고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팬들에게 익숙한 이효리로서의 모습을 포기할 수 없었는지 후속곡으로 내세웠던 「Hey, Mr.BiG」은 전형적인 박근태식 댄스곡이었고요. 「U-GO-GIRL」 한 곡만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이효리의 음악적 방향성이 힙합임을 알아차려 주길 바라는 건 무리지요. 앨범을 사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효리라는 가수의 정체성까지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이효리는 <It's Hyorish>를 통해 가수로서의 커리어를 리부트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앨범의 색깔을 자기 통제 하에 두거나 특정 장르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데까지 미치진 못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제일 처음 이효리가 인터넷을 통해 선 공개한 「그네」를 들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엄정화였습니다.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로 무장한 엄정화와 어쿠스틱한 느낌의 힙합 넘버인 「그네」를 등가 비교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어쩐지 이효리가 타이틀곡도 아닌데다가 자기 앨범에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험에 가까운 트랙을 선공개한 속내가 짐작이 가서였습니다. 말을 꺼낸 김에, 엄정화가 3년 만에 자신의 8집 <Self Control>을 발매했던 때를 잠시 되돌아볼게요. 2CD로 된 앨범도 난데없는데 그중 한 장은 갑자기 윤상, 정재형, Jinu, Fractal, 달파란, 정원영에게 곡을 받아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로 도배를 했으니, 그전까지 엄정화를 진지한 뮤지션으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평단과 대중들은 당혹스러워했었죠. 평단의 주된 평가는 ‘애는 썼는데 구성이 중구난방인데다가 도대체 자기 색깔이 안 보인다’였고, 이 신보를 어떤 식으로 소화해야 할지 몰라 얼어 버린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지금 당장 엄정화 8집의 타이틀곡을 떠올리실 수 있는 분? 아마 9집의 「Come 2 Me」나 10집의 「DISCO」는 금방 떠올라도 8집의 타이틀곡을 떠올릴 수 있는 분은 드무실 겁니다. 하지만 이때 엄정화가 작심하고 이런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훗날 9집 <Prestige>가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 부문 수상을 할 일도, 일렉트로니카 장르에 일관된 애착을 지닌 진지한 아티스트로 인정받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여자 연예인이 퇴물 취급을 받지 않고 그 수명을 유지할 수 있는 유효 기간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서구 엔터테이너들의 수명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지요. 가수들만 살펴보더라도, 카일리 미노그가 마흔셋, 마돈나는 쉰셋, 심지어 올해 말 발매 예정으로 신보를 준비하고 있는 쉐어는 예순다섯입니다. 반면 한국에서는 당장에 서른만 넘어가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이 먹었다고 놀려대기 일쑤지요. 최근 <무릎팍도사>에 나온 엄정화가 말했던 것처럼, 한국의 여자 연예인들이 30대 초반만 되어도 ‘젊어 보이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던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패밀리가 떴다>에서도 여자 아이돌 그룹만 나오면 이효리를 보고 ‘나이 먹었다’고 놀리던 유재석의 장난은ㅡ물론 같은 예능 선수의 입장에서 친근하기에 할 수 있는 짓궂은 농이었겠습니다마는ㅡ실제로도 여자 나이 서른이 넘어가면 늙기 시작하는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오래가진 못했을 겁니다. (당장에 ‘서른의 나르샤와 서른한 살의 박가희는 어쩔 거냐’라고 반문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사람들은 사기 수준의 동안인데다가 대중의 시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잖아요. 지난 13년 내내 봤던 이효리와 비교하며 이야기하기엔 적절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한국처럼 여자 연예인의 수명이 짧은 곳에서 오랫동안 정상의 위치를 고수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요? 엄정화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름 아닌 자신만의 인장을 선명하게 가진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겁니다. 8집 <Self Control>이 세일즈면에서나 평단의 평가 양쪽에서 모두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엄정화는 9집 <Prestige>에서 한 차례 더 일렉트로니카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파격적인 의상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여전히 자신의 섹슈얼한 매력이 건재함을 증명하는 한편, 자신이 게이 커뮤니티에서 여신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점을 명민하게 간파해서 자기 무대 위에 드랙퀸 부대를 세웠습니다. 8집에서부터 이어진 일렉트로니카 아티스트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전체 앨범의 톤을 일관되게 조율하는 데도 성공했지요. 그야말로 대중과 평단의 인정을 모두 거두는 데 성공한 겁니다. 7집 <花> 에서 「다 가라」로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는 데 그치며 ‘한물간 가수’처럼 굳어져 가던 커리어를 성공적으로 리부트한 거죠.

 

 

아마도 이효리가 좀 더 대중적인 타이틀곡 「Chitty Chitty Bang Bang」을 두고 이번 신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트랙인 「그네」를 먼저 선보인 건, 다양한 장르를 자기 색으로 소화할 수 있는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는 욕망과 어떤 트랙을 선보여도 대중을 설득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자신을 향한 대중의 안전한 기대치를 화끈하게 배반함으로써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키려는 면밀한 계산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일 겁니다. 실제로 동시에 공개된 「그네」의 음원과 뮤직 비디오는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호오의 여부나 예약 판매 실적을 떠나 이슈화의 측면으로만 보면 비교적 예측 가능하고 무난한 발라드인 비의 컴백곡 「너를 붙잡을 노래」와는 상대가 안 될 지경이지요. 음울한 목소리로 시종일관 쓸쓸한 노랫말을 노래하는 이효리는 낯설기 그지없고, 피에로와 주인 잃은 붉은 구두와 황량한 겨울 바다와 검은 풍선과 눈두덩을 검게 검게 칠한 이효리가 등장하는 뮤직 비디오는 면밀히 계산된 음산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음산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리쌍의 「발레리노」 뮤비와 맞붙여도 자웅을 겨룰 만하죠. 덕분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효리의 이번 신보를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네」가 이효리의 무리수였는가 아니면 본격적인 아티스트로서의 이효리를 선언하는 신호탄인가 갑론을박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된 거지요. 이효리의 팬이 아닌 저에게도 확실히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맛이 쏠쏠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싱글이었습니다.

오늘 발표된 신보를 쭉 들으며 느꼈던 건 세일즈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이번 앨범은 이효리에게 <Prestige> 같은 앨범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평하는 이들에 따라 평이 갈리겠습니다만, 에누리나 양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힙합 트랙으로 꾹꾹 눌러 담은 이번 신보 <H-Logic>은 서구 팝 시장의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당당한 여장부’ 이효리의 색을 담아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길미에게 준 몇 곡과 F(x) 중국 롤리팝 CF 배경 음악을 제외하면 아직 낯선 이름인 RYAN JUHN과 BAHNUS VACUUM에게 받은 트랙들은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요. 빅뱅의 대성과 함께 부른 「How Did We Get」 정도를 제하고 나면 어느 한 곡도 무난하게 먹힐 만한 곡도, 장르적 타협을 한 곡도 없습니다. 마치 엄정화가 8집 <Self Control>에서 대중의 기대치와 자신의 욕망을 조율하던 계산을 집어치우고 9집 <Prestige>에서는 작정하고 일렉트로니카 앨범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죠. 단순히 아이돌 출신 팝스타의 앨범으로 평가하는 걸 망설이게 할 정도로 힙합 ‘한 놈만 팬’ 장르 집중도는 모종의 결기마저 느끼게 합니다. 타이틀 「Chitty Chitty Bang Bang」은 「U-GO-GIRL」에 비해 더 무겁고 하드해진 Dirty South입니다만, 속도감 있고 밝은 후렴구의 반복이라는 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뮤직 비디오에서 엿보인 의상이나 무대 컨셉도 전작의 원색 톤을 계승하는 구석이 있고요. 전작과 달라진 면모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렇다고 낯설 정도로 격하게 변한 것도 아닌 정도의 수위를 조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직접 듣기 전까지는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어 걱정하게 만들었던 외국곡 리메이크들ㅡ「So Cold」 「Scandal」 「Love Sign」ㅡ도 나름 자기식으로 잘 소화해 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앨범에 이어 가창력이 늘었습니다! 전작에선 여전히 조금은 불안했던 랩까지 한결 자연스러워졌고ㅡ불과 얼마 전까지 예능 프로그램에서 천연덕스럽게 밀었던 개그 ‘내 이름은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효리가 랩에는 별 재능이 없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습니다ㅡ보컬 연기력이 부쩍 늘어서 「I'm Back」이나 「Highlight」 「Want Me Back」 같은 곡은 귀에 쫀득쫀득하게 달라붙습니다.

물론 이번 앨범에서도 이효리가 참고했을 레퍼런스들의 이름이 어른거리지 않는 건 아닙니다. 지난 앨범에 이어서 이번 앨범에도 여전히 씨아라의 이름이 떠오르고, 비욘세도 엿보이고, 뮤직 비디오에서는 레이디 가가와 영화 <디스트릭트 9>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벌써부터 인터넷에서는 ‘이번 콘셉트는 어디서 차용했는가’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요. YouTube에 올라온 「Chitty Chitty Bang Bang」 뮤비 티저에 달린 해외 네티즌들의 반응도 ‘그냥 카피캣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아냥부터 ‘다다이즘을 시도하면 개나 소나 다 레이디 가가 카피캣이냐’라는 반박까지 갑론을박입니다. 하지만 만약 저에게 물어 보신다면, 전 그런 레퍼런스들에 파묻히지 않고 어느 정도 자기 색깔을 유지하며 앨범을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있다는 건 큰 성취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확실히 이번 신보 <H-Logic>은 이효리에겐 한판 도박일 겁니다. 더 늦기 전에 자기만의 색을 지닌 아티스트로 인정받느냐 아니면 그냥 날이 더워지면 무대를 달구러 나오는 많고 많은 섹시 디바 중 한 명으로 머무를 것인가를 판돈으로 올려 둔 무대겠지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게를 잡은 제목, 자신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실험적인 커버 디자인, 자신이 쌓아 왔던 이미지와 가장 이질적이었던 선 공개 트랙, 시작부터 끝까지 장르적 배려 없이 힙합으로만 채워 낸 이 앨범이 대중과 평단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지금 가장 떨리는 건 아마 이효리 본인일 겁니다. 물론 이번 앨범이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해도 다시 도전할 기회가 없는 건 아니겠습니다만, 그래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참 흥미로운 한판 아니겠습니까? 지난 앨범 정도의 성취로 안전하게 갔어도 성공했을 사람이 결기를 다지며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입니다. 제가 맞을지 틀릴지는 아직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만, 전 이번 판은 이효리에게 올인하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추락했다가 재기에 성공하는 팝스타만큼 드라마틱한 게 또 어디 있습니까?

p.s.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심으로 이 지면에서 다시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 채널예스 데뷔작과 복귀작의 주인공이 서로 닮은꼴이네요. 참 재미있는 인연이지요.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땡땡의 요주의 인물>은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다시 돌아온 땡땡 님의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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