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걸쳐 열권이나 되는 일본의 러시아어 동시통역사 겸 작가 요네하라 마리(米原万里, 1950-2006)의 관련서를 다 읽었다(정확히는 그녀의 책 9권과 아메리 노통브의 소설 1권을 완독. 요네하라 마리의 책 1권은 아주 약간 읽음). 나로선 전에 없이 부지런을 떤 이번 책 읽기는 요네하라 마리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 잽이 안 된다. 그녀는 20년간 하루 7권씩 읽었다니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
날마다 일곱 권을 읽어내려면 속독은 불가피하다. 그녀의 독서일기에 따르면, 요네하라 마리는 아멜리 노통브의 『두려움과 떨림』(전미연 옮김, 열린책들, 2000)을 15분 만에 해치운다. “마지막까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안 된 덕분에 마음 편히 15분 만에 읽었다.” 나는 2시간 42분 걸렸다.
“그들이 한국인에게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한국적 사고와 한국이 가진 독특한 문화이지 미국인처럼 변한 한국인은 아니다.” 제목에 끌려 60여 쪽까지 후딱 읽은 『레드카드, 대한민국 영어공부』(송봉숙 지음, 부키, 2010)에서 그럴 법하다고 여긴 대목이다.
이것과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나는 요네하라 마리가 언뜻 비치는 ‘일본적인 것’에 심기가 불편하다. 다리미질을 하다 실수로 오른쪽 다리에 화상을 입은 딸한테 요네하라 마리의 어머니는 위로는커녕 원폭 희생자의 고통을 들이민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반문이 앞선다. 그건 일본의 자업자득 아닌가?
섬나라 일본인은 뭍의 국경선을 놓고 서로 다투는 긴장감이 절실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 요네하라 마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교묘하게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꼴이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므로 중국과의 센카쿠 열도 문제, 한국과의 독도문제, 러시아와의 북방4도 등 영토를 둘러싼 교섭도 그러한 흥정에 이골이 난 상대국들에게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문화편력기』, 33쪽)
나는 그리 애국적이지 못하다. 내 정서적 거부감은 내심 그녀가 코즈모폴리턴이길 바란 탓이 크다. 하지만 요네하라 마리는 코즈모폴리턴이 아니다. 외려 그녀는 이에 비판적이다.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 세계시민주의)이나 보편주의라는 명목하에 그것(애국심, 내셔널리즘-인용자)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좋게 보면 위선이고, 나쁘게 보면 기만이다. 억제된 내셔널리즘이 폭주하는 공포를 20세기는 물릴 만큼 경험했지 않은가.”(『문화편력기』, 55쪽)
요네하라 마리는 보리스 옐친을 선호한다. 나는 옐친이 별로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좋아하는 것까지 좋아하란 법은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 책의 한국어판 가운데 맨 먼저 집어든 『미식견문록』(이현진 옮김, 마음산책, 2009)은 서곡부터 아주 감미로웠다. 달걀이 잔뜩 들어간 카스텔라처럼. 반면 ‘토마토에 삶은 다시마’ 통조림은 그녀의 실낱같은 기대마저 여지없이 배반한다.
“고르바초프 정권 말기 극도의 물자부족 상황으로 슈퍼마켓 진열대가 텅텅 비어도 이것만큼은 팔리지 않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에, ‘이거야말로 진짜 맛없을 거 같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사보았다. 그래도 통조림을 따려 손을 놀리면서 실낱같은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하지만이라 할까 역시나라 할까, 정말 기막히게 맛이 없었다. 미각의 차이, 이런 미지근한 표현으로 해결이 안 될 정도”였다. “‘먹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이 유머러스한 성찰의 기록”(이현우, 뒤표지 글)에다 요네하라 마리는 맛난 요리의 레시피를 곁들인다. 소녀 시절 맛본 스페인다운 점은 전혀 없는 체코 요리 ‘스파넬스키 프 타체크’(‘스페인의 작은 새’라는 뜻)의 조리법은 이렇다.
“쇠고기 등심살을 가볍게 두드려 늘인 다음 한 면에 겨자를 바르고 햄이나 베이컨을 깐 뒤, 삶은 달걀 4분의 1, 소금에 절인 오이, 살짝 익힌 양파 4분의 1을 올려 고기와 베이컨으로 싼 다음 이쑤시개로 고정한다. 돼지기름을 둘러 달군 냄비에 이것을 넣어 노릇하게 굽는다. 이 냄비에 콩소메 수프를 붓고 뚜껑을 닫은 다음 고기가 다 익을 때까지 삶는다.
‘작은 새’를 냄비에서 꺼낸 다음 육수가 우러난 수프에다 버터에 볶은 밀가루를 넣어 소스를 만든다. ‘작은 새’에 크네드리키를 곁들여 소스를 얹으며 완성.” 크네드리키는 체코 특유의 찐빵이다. 어른이 되어 탑승한 스페인 국적의 이베리아 항공기에서 요네하라 마리는 기내식으로 나온 ‘작은 새’와 재회한다. 이 ‘쇠고기 롤 찜’은 스페인 가정요리라는 여승무원의 설명을 듣고 그녀는 어릴 적 의문을 푼다.
요네하라 마리는 옛이야기를 에피타이저 혹은 디저트로 내놓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옛날이야기”인 ‘모모타로 이야기’는 내 귀에도 익다. 어린 나는 ‘모모타로’를 각색한 ‘복숭아장군’을 들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대곤 했다. 마음 착한 사람이 그 선행의 보상으로 고진감래(苦盡甘來)하는 이야기는 우리도 낯설지 않다. ‘나무꾼 이야기’와 ‘흥부와 놀부’가 그렇다.
‘외국에선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통념을 체감한 요네하라 마리지만 때로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한다. “결국 아시다시피, 국가 재정이 파탄으로 치달아 소련은 붕괴했다.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편 일본은 어떤가. 공업제품 수출을 최우선으로 해온 전후의 경제 정책으로 벼농사는 최대 희생자가 되었다. 수확량 억제와 보조금 정책은 농민들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일본이 지옥에 떨어질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우린?
요네하라 마리의 유머는 밤참 혹은 간식이다. “당시에는 야쿠트(인접한 부랴트족 말로 ‘세상 끝의 또 끝’이라는 의미)라 불렸고 지금은 ‘사하’라고 불리는, 러시아 연방 내의 자치공화국 수도 야쿠츠크에서의 얘기다. 계절은 12월. “조금만 따뜻해지면 레나강에 낚시나 하러 갑시다” 하고 야쿠트인 가이드가 권하기에 낚시 도구를 한 벌 사두었다. 날은 잡은 그날의 기온은 영하 53도.”
『문화편력기』(조영렬 옮김, 마음산책, 2009)는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이다.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신문 칼럼으로 짐작되는 것들은 대체로 약간 밋밋하다. 흥미가 좀 떨어진다. 하지만 「모자람의 효용」에서 러시아 장기 취재 여행에 동행한 일본인 카메라맨이 필름을 낭비하는 까닭은 흥미롭다. “제조업체에서 카메라맨에게 공짜로 필름을 제공하니 그런 겁니다.”(호시노 히로미)
「드래건 알렉산드라의 심문」은 진짜 독서 교육을 보여준다. 나는 예법을 추구하는 기예의 허상에 대한 요네하라 마리의 지적에 공감한다. “차든 꽃이든 유파에 사로잡히지 말고, 맛있게 달이고 아름답게 꽂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이론이나 틀을 몸에 익히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덜렁거리고 칠칠맞지 못한 성격까지 고치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내가, 고양이와 개를 주인공으로 하는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김윤수 옮김, 마음산책, 2008)마저 재미나게 읽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개, 특히 애완견을 싫어한다. 고양이에 대해선 아예 무관심하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에 필적할 정도로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어느 쪽에도 해당사항 없다.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한 사람이 남아 있으면 고양이들이 고아가 되지 않잖아요.” 반드시 ‘고양이지킴이’를 집에 남기고 가족여행을 떠난다는 ‘고양이를 기르는 주인들의 모범’을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내가 어떻게 ‘독신 마리네, 포유류 아홉 가족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나?
표현이 멋져서? “지비와 도부, 스미레, 그리고 구로도 금붕어 똥처럼 겐을 졸졸 따라다녔다.” ‘금붕어 똥처럼’은 정말 멋진 표현이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학적인 성을 섹스와 젠더라는 식으로 구분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분별력 덕분에? 절반은 맞다.
결정적으로는 요네하라 마리가 동물애호가인 척하지 않아서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착하다’고 순진무구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부글부글 끓다가 더 참지 못하고 말한다. “어머, 히틀러도 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인간보다 훨씬 더.” 이렇게 싫은 소리를 하며 밉상을 떤다.”(
『마녀의 한 다스』, 229쪽)
그녀의 밉상까지 예뻐 보이니 ‘요네하라 마리스’의 열성팬이 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 아닐까? 아무튼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는 ‘요네하라 마리스’의 클린업트리오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4번 타자로는
『프라하의 소녀시대』(이현진 옮김, 마음산책, 2006)가 제격이다. “요네하라 마리, 이제야 비로소 한국에 소개된다!” 이 책의 띠지 문구다.
요네하라 마리는 1960년 1월에서 1964년 11월까지 약 5년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소비에트 학교를 다녔다. 그녀의 프라하 체류는 아버지가 거기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 운동 이론지 <평화와 사회주의 제문제>에 일본 공산당을 대표한 편집위원으로 와서다. 그녀의 부모는 고심 끝에 마리와 여동생 유리를 소비에트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체코어보다는 러시아어가 쓸모 있으리라는 부모의 판단은 마리에게 적중한 셈이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요네하라 마리가 일본 어느 방송사의 도움을 받아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 시절 친하게 지낸 세 친구를 찾아 나선 게 계기가 되었다. 1995년의 일이다. 그녀가
『문화편력기』에서 밝힌 「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쓴 이유」는 이렇다.
“어째서 두 명의 뛰어난 텔레비전 우먼이 납득하고 많은 일본인 시청자가 감동한 아냐의 발언에, 나나 다른 급우들이 기만과 위선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거기에 일본인이 생각하는 세계화와 본래의 국제화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어서였다.
나는 「하얀 도시의 야스나」 편에서 야스나의 부친이 그를 반나치 파르티잔으로 이끈 보그다노비치 선생님의 숭고한 희생을 들려주는 대목에서 요네하라 마리에게 두 손을 든다. 한편 그녀는 야스나가 요네하라 마리의 ‘추억의 노트’에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쓴 사연을 30년이 지나서야 확실하게 안다. 유고슬라비아인 가이드한테 해석을 청한다.
“‘생각했고 말구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죠….’ 거기까지 말하곤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나도 그랬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일본에서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을 받았다. 심사위원단의 선정 이유에 이런 표현이 있다. “두려운 작품.”(「옮긴이의 말」) 정말 그렇다.
장타력이 더 있어 보이는
『올가의 반어법』을 5번에 놓은 건 요네하라 마리 책을 읽는 순서와 관련 있다.
『올가의 반어법』보다는
『프라하의 소녀시대』를,
『프라하의 소녀시대』보다는
『미식견문록』과
『문화편력기』를 먼저 읽는 게 좋다. 그래야 독자의 머리에 내용이 쏙쏙 잘 들어온다. (감독 혹은 구단주급인
『대단한 책』은 타순을 초월한다.)
1960년대 전반의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가 먼 배경이 되는
『올가의 반어법』(김윤수 옮김, 마음산책, 2008)은 소설이다. 아니, 소설에 가깝다. “저자는 한 신문의 서평란에서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80%가 논픽션이며 20%가 픽션,
『올가의 반어법』은 반대로 80%가 픽션, 20%가 논픽션이라고 밝히고 있다.”(「옮긴이의 말」)
이 소설은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의 무용 교사 올가 모리소브나와 그녀의 단짝인 프랑스어 교사 엘레오노라 미하일로브나를 둘러싼 비밀을 파헤친다. 반어법에 능숙한 올가와 우아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엘레오노라에겐 진한 아픔이 서려 있다. 참혹한 스탈린 시대에서 비롯된 두 사람의 비극을 추적하는데 속칭 ‘여자강도단’의 활약이 돋보인다.
훗날 ‘여자강도단’의 일원이 되는 히로세 시마를 볼 때마다 엘레오노라는 이런 질문을 되뇐다. “어머, 아가씨는 중국 분?” 목을 사랑스럽게 기울이면서 말이다. 다섯 번쯤 나오는 엘레오노라의 사랑스러운 목 기울이기는 소설의 중요한 복선이다. 올가와 엘레오노라는 ‘바이코누르’와 ‘알제리’에 질겁한다.
어섯눈 뜰 무렵 감명 깊게 읽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나는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소설을 두 번이나 읽었지만 스탈린의 잔혹성에는 생각이 닿지 않았다. 나는
『올가의 반어법』을 통해서야 비로소 스탈린이 히틀러와 동급인 극악한 압제자란 점을 실감한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말단 비밀경찰 중에서 공개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투옥된 사람들을 학대하고 살해한 간수들, 사형집행인들, 수용소의 책임자들도… 태평하게 평안한 연금 생활을 보내고 명예롭게 생을 마친다.” 일본의 전범들은? 또 우린?
『미녀냐 추녀냐』(김윤수 옮김, 마음산책, 2008)는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였던 요네하라 마리의 통역론으로 그녀의 저서 중에서 가장 이론적이다. 통역의 매력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다양한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구조와 순서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는 거다. “바로 이 점이 통역, 번역의 고행과 매력의 근원이다. 진정한 즐거움이다.”
통역과 번역의 공통점은 통번역 되는 주제와 통번역의 환경이 다양하고, 메시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의존하며, 통번역의 과정을 파악할 수 없다(원문이 들어가서 역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통역과 번역의 차이점이랄 수 있는 “통역의 가장 큰 특징은 매개체가 귀로 듣고 입으로 전달하는 음성이라는 점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욕설에 능하다. 다른 말로 러시아어는 욕설이 풍부하다. 요네하라 마리가 묘사한 배구 경기장에서 빚어진 소련 방송국 디렉터와 카메라맨의 다툼은 오래 전 중계방송에서 봤던 러시아 여자배구 국가대표 감독의 씩씩거림을 떠올린다. 작전 시간, 다혈질 감독의 작전 지시는 태반이 욕지거리였으리!
하지만 신기하게도 러시아 여자배구 국대 선수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211쪽에서 소련의 반체제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는 욕먹어도 싸다.
『마녀의 한 다스』(이현진 옮김, 마음산책, 2007?2009)는 주로 ‘어디의 누구’를 이야기한다. 이스탄불의 일본인, 바르나의 이란인, 나라(奈良)의 러시아인, 도쿄의 후쿠시마인, 마닐라의 스위스인 식으로. 도쿄의 옐친 대통령 동시통역사는 요네하라 마리다. 옐친은 일본에 올 적마다 그녀를 통역사로 지정했다고 한다.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카사블랑카>는 카자흐스탄 영화인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그 이유인즉슨 “나치 독일로부터 유럽을 해방시키고자 외치는 주인공들이 프랑스 식민지인 모로코에서는 지배자의 얼굴을 한 무신경함 때문이었다. 같은 아시아인인 카자흐스탄인들은 서양인의 이런 무신경함을 금방 알아챘는데, 전후 일본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된 이래 명작으로 명성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의 무신경함도 만만치 않다.
처음에는 괜한 투정쯤으로 여겼는데 결국 나는 요네하라 마리에게 설득당한다. “자국 정부가 베트남에 1제곱미터에 하나 꼴로 융단폭격을 가하거나 말거나 전혀 동요하지 않던 여자들이 고래가 불쌍하니 잡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기도 한다.” 그래도 참다랑어는 덜 잡기라도 하는 게 어떨지. ‘참다랑어 없이 스시 없다’며 뻗대지 말고.
『유머의 공식-반드시 웃기는 12가지 패턴』(이현진 옮김, 중앙북스, 2007)은 “방법론으로 분류된 유머집”이다. 요네하라 마리는 우스개의 생명인 반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예측된 전개와 실제 결말과의 낙차야 말로 반전의 효과가 된다.” 또 “큰 낙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띄워줄 필요가 있다.” 책에 나오는 우스개의 하나인 「과대망상증인 남자」를 옮겨 적는다.
노련한 정신과 의사가 젊은 후배에게 자기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었다. “내 환자 중에 과대망상증인 남자가 있었어. 한번은 자기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자살하려했는데, 과대망상증 탓에 살았어.” “어? 혹시 자기처럼 위대한 인물이 죽으면 인류의 큰 손실이라고 생각한 거 아닙니까?” “아니, 방아쇠를 당기긴 당겼는데 자기 머리보다 15센티미터 위로 조준을 맞춘 거야.”
『속담인류학』(이현진 옮김, 2007, 중앙일보시사미디어)에선 요네하라 마리의 ‘곁눈질’이 눈길을 모은다. “게릴라에 대한 공감은 점점 확산돼 갔다. 아이들은 게릴라의 나팔수가 됐고, 폭약이 설치된 건물 주위에는 ‘○○보 앞에는 폭발물이 설치돼 있다’고 아랍어 푯말이 붙어 있으니 아랍어를 알기만 하면 위험을 회피할 수 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점령자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이런 뒷이야기는 영국 신문이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나는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이언숙 옮김, 마음산책, 2007)을 37쪽까지밖에 못 읽었다. 맨 후순위로 제쳐둔, 본문만 659쪽에 달하는 독서일기와 서평을 읽을 시간이 모자랐던 게 가장 큰 이유다. “죽기 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은 책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엄숙한 표지문구에 기분이 다소 상하긴 했다. 또한 아멜리 노통브의
『두려움과 떨림』을 보는 불공정한 시각은
『대단한 책』 읽기를 늦추었다.
“책에 기술된 직장 여성의 체험담 그 자체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당히 괴기스러우리만치 과장되어 있어 오히려 진실성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중략) 주인공이 용감무쌍하게 체험에 나서는 이미지도 그려질 것 같은 이야기지만, 일본이나 일반적인 회사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는 외국인의 눈으로 그려지고 있어 아무래도 절절함이 부족하다.”(26쪽)
나는
『두려움과 떨림』이 “소설이라기보다 활자화된 만화를 읽은 기분이라고나 할까?”라는 요네하라 마리의 독후감에 공감하지 않는다. 감정이입 없는 속독은 나로선 생각하기 어렵다. 나는 등장인물, 배경, 주제, 플롯 같은 소설의 구성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몰입하지 못하는 소설은 신명나지 않는다. 내게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소설은 꽤 잘 읽혔다. 소설에서 인상적인 몇 대목이다.
“극도로 권위적인 제도는, 이 제도가 적용되는 국가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탈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또, 기가 찬 상식 밖의 행동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관용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남이 자신들의 관례를 어기면 기분이 상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다른 관습을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반감을 느끼지 않는다.”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후부키는 아직도 많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소프트한 개헌주의를 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이들은 지난 전쟁에 대해 자기 동포들이 전혀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아시아에 대한 무력 침공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나치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소프트한 개헌주의’는 일본 헌법 제9조의 전쟁 포기 규정을 바꾸자는 주장임)
“제일 끔찍한 것은, 이 사람들이 지구상에서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이 사람들이’ 누군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너무 당신 자신에 대한 험담을 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 말을 믿을 테니.”(앙드레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