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유래
북촌(北村, North Village)은 원래 청계천 혹은 종로의 윗동네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일대를 이른다. 언제부터 이곳이 북촌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나마도 1930년대에 창덕궁과 종묘를 관통하는 율곡로가 뚫리면서 허리가 끊겨, 현재는 율곡로를 경계로 한 북쪽 마을로 한정해 부르고 있다.
북촌이 거론된 사료를 보자면, 조선 시대의 인물 황현(黃炫)은 『매천야록』(梅川野錄)에 “한성(漢城), 서울의 종각 이북은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주로 살고, 종각 이남인 남촌은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 산다”고 썼다. 노론이 순조, 헌종, 철종을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150여 년간 집권했으므로, 북촌은 하급 관리와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남촌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높은 경제력과 문화 수준을 자랑하는 ‘조선의 강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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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게스트 하우스 배꼽 마당 | |
풍수지리의 측면에서 서울의 최상지는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니 두 궁궐의 사이 지역인 북촌은 양기풍수(陽氣風水)상 최길지(最吉地)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도성의 중심인 데다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으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되었다. 남쪽이 넓게 트였고 안산(案山)인 남산 전망도 좋아, 정침(正寢, 제사 지내는 곳, 일을 보는 곳)이나 사랑(斜廊)이 남향을 할 수 있기에 왕족과 왕실 고위 관료, 권문세가와 팔도에서 온 양반, 육조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 이들에 딸린 하인들이 모여 살았다. 이런 곳이다 보니 전문 목수에 의해 설계 및 시공되고 건물 배치에도 여유가 있으며, 고급 자재로 지어진 커다란 전통 한옥이 많았다.
정치?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북촌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관직을 잃은 북촌 주인들은 저택은 물론 식솔들조차 거느리기 어려워 행랑채 하인과 식객을 내보냈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내다 팔았다. 우정국(郵政局) 주변에 골동품 매매 상점이 생겨, 인사동의 기원이 된 것도 이때다.
한 개 필지가 2천7백 평이었던 가회동 11번지를 비롯해 가회동 26번지, 계동 135번지는 1930년대에 건양사와 경성목재 등에 의해 50여 평 내외 필지로 쪼개져 ‘ㅁ’자형인 도시형 한옥이 들어섰다. 북촌에서도 한옥이 가장 잘 보존된, 서울시 지정 한옥 보존 지구인 가회동 31번지는 1927년까지 한 개 필지가 5천 평이었지만, 1936년에 대창생업주식회사가 개발에 나서면서, 삼거리 교차 골목에 처마가 잇닿고 이웃과 담을 공유한 다닥다닥 한옥촌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 강남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사를 가는 북촌 주민이 많아졌고, 자연히 경기고등학교나 휘문고등학교 같은 명문 학교들도 강남으로 떠났다.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창덕여자고등학교가 이주했다. 경기고등학교는 정독도서관으로 바뀌었고 나머지 학교 터에는 현대 빌딩, 헌법재판소와 같은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동안 한옥 정책은 불합리하고 일관성 없는 규제와 허용이 오락가락했고, 그에 따라 한옥이 많이 헐리고 4층짜리 연립 주택(일명 빌라)과 빌딩이 난립하게 되었다.
북촌에 대한 여러 논의와 이런저런 생각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33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 등에 남아 있는 한옥은 전통 한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 전쟁 때 지어진 개량 한옥 또는 ‘집장사집’으로 불리는 현재 한옥에는 유리와 함석, 타일 등 새로운 재료가 가미되었고 평면이 단순화, 표준화되었으며, 마당에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는 등, 서양식과 일본식이 가미된 변형 한옥이라는 것이다. 한편 전통 한옥의 불편함을 개량하고, 전기와 수돗물을 끌어들인 밀집형 소형 한옥을 근대화로 인한 인구 집중 현상으로 인해 나타난 절충 한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없으므로 전통과 민속의 차원이 아닌, 근대 문화의 시각으로 북촌 한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가 시행한 ‘북촌 가꾸기 사업’은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로부터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보존상’(Asia-Pacific Heritage Award) 우수상에 선정되었다. 유네스코는 “재개발로 멸실 위기에 처해 있던 북촌이 서울시, 북촌 주민, 한옥 전문가의 협력과 재정 지원을 통해, 도심 속 전통 주거지로서 활력을 찾았다. 특히 한옥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와 문화유산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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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가시는 할머니. | |
북촌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원서동 쪽이다. 북촌이라고 다 같은 북촌이 아니어서, 가회동과 계동 쪽은 왕실 후손, 고위 관직을 가진 사대부들이 살았고, 창덕궁 서편 원서동 지역은 궁의 일을 도맡아 하던 하급 관리와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원서동에서 52년을 살았다는 70대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지만, 시집 온 지 얼마 안 된 옛적에는 더더욱 가회동이나 계동 쪽으로는 걸음도 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이런 지역과 계급 차는 지금도 이어져, 가회로 양옆으로는 번듯한 한옥과 일본식 2층 집이 제법 남아 있다. TV 드라마에서도 가회동은 뼈대 있는 집안, 부촌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반듯하게 손질한 한복을 입고 윤기 자르르한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거만하게 부채질하던 강부자 씨는, 전화벨이 울리면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두 볼을 한껏 부풀리며 “네, 가회동입니다.” 하지 않던가.
북촌에 산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북촌이 어디예요?”라거나 “부천이요?” 하고 되묻지만, “가회동 살아요.” 하면 한결같이 “아, 한옥 많은 부촌이요!” 하면서 사뭇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나도 거듭 설명하는 게 귀찮아 북촌 대신 가회동을 끌어다 쓸 때가 많다.
창덕궁 쪽으로 눈을 돌리면 담 안쪽에 2층 양옥 한 채가 보인다. 궐내 적산 가옥을 나라에서 사들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 적산 가옥에서부터 빨래터까지의 창덕궁 길에는, 창덕궁 담을 내 집 담처럼 두르고 있는 2층 가옥이 올망졸망 이어진다. 궁궐 담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 이 주택들을 철거해야 한다, 철거할 것이다 등 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예쁘게 고쳐 쓰기로 결정이 난 것 같다. 한옥, 연립 주택 할 것 없이 리모델링하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이다.
윤보선 고택 같은 전통 한옥들만 남아 있는 북촌과 집장사꾼이 지은 도시형 한옥이나 연립 주택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가옥이 뒤섞여 있는 북촌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지금의 복잡한 북촌을 택하겠다. 그래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북촌은 부자들만의 주거지가 아니었다. 아이 서넛 둔 아비와 어미가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그 옛날처럼 모두가 어울려 살아야 진짜 북촌다울 것이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북촌 탐닉>은 푸르메 출판사와 함께하며, 매주 목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