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일계 미국작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1922-2007)의 작품 일곱 권을 『마더 나이트』 『나라 없는 사람』 『제5도살장』 『고양이 요람』 『갈라파고스』 『타임퀘이크』 『타이탄의 미녀』 순으로 읽었다. 이렇게 읽어야 마땅한 건 아니지만 꽤 적절한 순서다. 서평을 쓰기 위해 책이 나오자마자 읽은 『마더 나이트』(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09)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권은 이 글을 쓰기 위해 잇달아 읽었다.
커트 보네거트의 한국어판 리뷰는 『나라 없는 사람』이 이끈다. (『마더 나이트』 서평은 이 글 후반에 덧붙였다.) 그의 작품들은 서로 얽혀 있다. 하여 작품세계를 이끌어가기에는 작가의 자서전이 제격이다. 서로 얽혀 있는 작품에서 보네거트는 때로 특정한 표현을 반복한다.
허구와 사실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더러 있으며(아니, 꽤 많으며), 자신이 직접 작품에 출연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유쾌한 회고록 『나라 없는 사람』(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07) 첫머리에서 보네거트는 한때 미국의 대표적인 코미디언이었던 보브 호프를 우습게 본다.
“얄팍한 웃음도 있다. 예를 들어 보브 호프는 진정한 유머리스트라고 할 수 없다. 그는 곤란한 주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 얄팍한 코미디언이다. 그에 비해 로렐과 하디는 눈물이 날 정도로 웃게 만든다. 그들의 농담에는 뭔가 뼈아픈 비극이 배어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엔 너무나 착하고 그래서 항상 지독한 위험에 빠진다. 그들은 언제라도 쉽사리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보네거트는 사회주의자를 편든다. “미국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나처럼 담수인으로 분류된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예술, 웅변, 조직 분야에서 어떤 일을 했으며, 우리의 노동 계급, 즉 임금 노동자들의 자존심과 존엄, 정치적 통찰력을 어떻게 향상시켰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의 사회주의자 옹호는 마르크스의 ‘금언’에 대한 해명으로 이어진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던 1844년엔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는데 아편을 먹고 통증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자 대단히 고마워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그저 종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그걸 비난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의 말은 금언이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다면 예술을 하라! 보네거트의 섬뜩한 조언이다. “예술은 생계수단이 아니다.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보네커트가 도서관 사서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이유는 이렇다. 그들이 “이른바 위험한 책들을 도서관 서가에서 제거하려는 반민주적 불량배들에게 끈질기게 저항하고, 그런 책들을 열람하는 사람들을 사상경찰에게 신고하는 대신, 열람 기록을 몰래 파기하는 양심과 용기”에 있다.
“책과 관련하여 한마디 더 하자면,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 매체인 신문과 TV는 오늘날 국민 전체를 대표하기에 너무나 부실하고, 너무나 무책임하고, 너무나 비겁하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매체는 책밖에 없다.”
『타임퀘이크』(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6)는
『나라 없는 사람』 못잖게 자전적이다. 우선 제목의 뜻부터 살피면, 타임퀘이크(Timequake)는 ‘시간뒤틀림’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임퀘이크, 곧 시공(時空) 연속체에 갑작스런 고장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이 좋든 싫든 지난 10년 동안에 했던 것을 똑같이 되풀이하게 되었다.”
소설의 초반, 보네거트는 미국 시카고 대학 대운동장 스탠드 밑에다 원자로를 만들어 세계 최초의 우라늄 연쇄반응에 성공한 엔리코 페르미 일당과 병 주고 약 주는 격인 구소련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이율배반을 싸잡아 비난한다. 각기 원자폭탄과 수소폭판 개발에 기여한 페르미와 사하로프는 욕먹을 만하다.
보네거트는 블랙유머라고 통칭되는 익살을 곧잘 부린다. 우스운 말 짓의 대상으로 익살꾼 자신과 그의 친인척도 예외가 아니다. “때가 겨울이어서 나도 내 조국에서 두 번째로 낮은 훈장을 받았다. 동상에 걸린 덕분이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그는 미 정부로부터 명예 전상장(戰傷章) Purple Heart를 받는다. 「에필로그」의 사연은 익살꾼의 짓궂음보다 진한 형제애를 느끼게 한다.
박학다식한 익살꾼은 내가 까먹은 비평의 기율, 곧 ‘불신의 자발적 정지’의 출처를 알려준다. “
옥스퍼드 인용 사전 제3판에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1772-1834)의 이런 말이 소개되어 있다. ‘불신을 자진해서 잠시 정지하는 것, 거기에 시적 신뢰가 있다.’ 시답잖은 소리를 용인하는 이런 태도는 시, 소설, 단편 소설, 극을 즐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보네거트가 지적하듯이 “타임퀘이크 뒤의 반복기처럼, 현실의 생활에서 사람들은 변하지 않으며 자신의 과오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고 잘못을 사과하지도 않는다.” 살 만한 인생을 누리는 사람과 “반듯하지 못한 사회에서 반듯하게 행동하는” 성자(聖者)의 비율이 둘 다 17퍼센트라는 계산은 약간 지나친 것 같다. 그러나 책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치밀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 책들은 그 무게와 짜임새 때문에, 그리고 교묘히 다루는 데 대한 나긋나긋한 명목상의 저항 때문에, 손자들이 모르고 살면 내가 무척 안타까워 할 정신적 모험으로 우리의 두 손과 두 눈, 다음으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끌어들인다.”
「옮긴이 후기」에서 보네거트의 작품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는 예전에 “그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대형 모자이크화를 이룬다고 말한 바 있”다며
『타임퀘이크』가 “전체상을 완성하는 최후의 한 조각”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아울러 “그의 작품을 한두 권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소화하기에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보네거트의 출세작
『제5도살장』(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5)을 먼저 읽는 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제5도살장』은 그것 자체로 낯설다.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친숙한 독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제5도살장』의 내용과 형식이 수수께끼나 암중모색은 결코 아니다.
『제5도살장』의 ‘낯설게 하기’는 보네거트 나름의 자구책이다. 대량학살의 현장 목격자가 그 참상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발지 전투에서 독일군에 사로잡힌 보네거트는 다른 미군포로들과 함께 열차편으로 드레스덴으로 호송돼 도살장에 갇힌다. 그는 1945년 2월 13일 단 하루만에 13만5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에서 살아남는다. 그와 동료 포로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제5도살장 지하실에 대피한 덕분이다.
“이 소설에는 대단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극적인 갈등도 거의 없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심하게 병들고 심히 무력한, 거대한 힘의 노리개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쟁의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대단한 인물이 될 마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191쪽)
드레스덴 “공습의 목적은 종전을 앞당기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세는 이미 연합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제5도살장』에서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표현이 한 백번쯤 나온다(내가 줄을 그은 것은 모두 98개다). “기타 등등”은 이보다 빈도수는 훨씬 적어도 여러 차례 반복된다.
“우리 책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점은 수많은 경이로운 순간들의 깊은 속을 일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거지.” 트랄파마도어 행성인들의 동시 전관(全觀) 심층 독서법을 커트 보네거트 읽기에 응용할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은 책 여러 권을 한꺼번에 읽을 능력이 없다. 보네거트의 작품은 원작의 출간 순서대로 읽는 게 가장 좋다.
다만,
『갈라파고스』와
『고양이 요람』은, 발표연대가 20년이나 떨어졌어도, 연이어 읽기를 권한다. 닮은 점이 많아서다. 일례로 일리엄이라는 도시가 하나의 배경을 이룬다. 일리엄(Ilium)은 “뉴욕 주에 실재하는 도시는 아니고 뉴욕 주 렌설리어 군의 군청 소재지로 철강산업이 발달한 (디)트로이(트)를 모델로 한 가공의 장소”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이 두 권의 한국어판 표지장정은 비슷하다.
『고양이 요람』(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4)은 반전(反戰)소설이다. 전쟁과 이를 돕는 과학기술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과학자가 연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식으로든 결국은 무기가 될 수밖에 없다나요.” “내가 묻는 모든 질문에는 은연중에 원자폭탄 발명자들이 극히 추악한 살인의 공범이라는 생각이 배어 있었다.” “원자폭탄 같은 걸 만드는 걸 거든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무죄한 사람일 수 있겠소?”
『갈라파고스』(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3)는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다룬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외떨어져 있는 산타 로살리아 섬은 신인류의 에덴동산이다. 백만 년 후 인간세계엔 없는 게 참 많다. 코미디도 없고 진지한 프로그램도 없다. 고문은 상상하기 힘들다. 무기를 사용할 수 없으니 전쟁을 할 수도 없다. 노예도 못 부린다. 어째서? “지느러미와 입뿐인 그들이 무슨 수로.”
인간은 물고기가 되었다. “오늘날은 어떤 인간에게도 고쿠비나 만다락스를 조작할 만큼 민첩한 손이나 커다란 뇌가 없다. 바늘에 실을 꿰거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런 손으로는 자기 코를 잡기도 어렵다.” 고쿠비와 만다락스는 백만 년 전 개발된 휴대용 통역기다.
『갈라파고스』엔 보네거트의 박학다식을 입증하는 각종 문헌에서 발췌한 문구가 잔뜩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말씀은 그 중 하나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 15:13) 나는 종교가 없다. 보네거트 역시 믿는 종교가 없지만 예수의 산상수훈을 높게 평가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 여길 정도로.
책 말미에 실려 있는 SF 칼럼니스트 김태영의 해설 「커트 보네거트, 디스토피아의 유쾌한 수다쟁이」는 보네거트 작품 이해에 큰 보탬이 된다. 김태영 칼럼니스트는 “커트 보네거트의 강점은 순간적으로 의표를 찌르는 위트와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한 맛에 있다”고 본다.
‘반성하는’ 첩자의 고백록 혹은 공공연한 악과 은밀한 선‘잭 런던 걸작선’과 커트 보네거트의 장편소설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런던의 국내 초역 작품 둘 중 하나와 보네거트의 세 번째 작품을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보네거트 쪽으로 추가 기운 것은 소설 속 소설의 헌사가 눈에 들어와서다. 하워드 W. 캠벨 2세는 자신의 고백록을 마타 하리에게 바친다. 알고 보니 이건 겉치레였다.
액자소설이기보다는
『마더 나이트』 자체나 다름없는 ‘하워드 W. 캠벨 2세의 고백록’은 헌사가 말해주듯이 첩자의 이야기다. 고백록은 산만하게 자기변명으로 흐르기 쉽고 스파이 소설은 눈속임과 극적인 반전이 있게 마련이나,
『마더 나이트』는 단순 명백하다. 다만, 역설의 뒤범벅은 주의를 요한다.
누가 하워드 캠벨에게 바치는 편집자의 헌사보다 더 적절하게 이 유능한 간첩의 실체를 묘사하랴! “그는 너무나 공공연하게 악에 봉사하고 너무나 은밀하게 선에 봉사했다.” 공공연한 악은 나치 독일이다. 미국 출신으로 독일에 정착한 극작가인 캠벨은 2차 대전 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어권에 나치를 알리는 선전가로 크게 활약한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미국의 첩보원이었다. 캠벨의 장인이나 그의 정체를 눈치 챌 정도로 그의 연기력은 거의 완벽했다. 또 한 사람, 어린 처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는 “미국 간첩”이라는 처제의 혀 짧은 부름에 깜짝 놀란다. 전쟁이 끝나자 캠벨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 세계 ‘꼴통’ 이념의 산실, 다르게 표현하면 “진실의 원천”이 되어 있었다.
1961년 세상에 알려진 캠벨과 아돌프 아이히만은 가공의 인물과 실존인물이라는 차이점 말고도 여러모로 비교된다. 아이히만이 1960년 5월 은신처였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들에게 붙잡혀 압송됐다면, 캠벨은 제 발로 이스라엘 법정에 선다.
아이히만은 극형을 면치 못하나 캠벨은 그를 포섭했던 은퇴한 미국 정보원의 도움으로 무죄 방면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판이한 입장의 차이를 보인다. 아이히만은 일개 군인으로서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반면에 캠벨은 진정 ‘반성하는’ 첩자다.
커트 보네거트는 블랙유머의 대가답게 은근히 독자의 배꼽을 잡는다. 그런 장면을 하나 보자. ‘암흑시대에 빛나던 등대’와 ‘할렘의 흑인 지도자’가 나눈 대화다. “일본이 수소폭탄을 어디에 떨어뜨릴까요?” 캠벨이 물었다. “중국이오. 틀림없소.” 로버트가 말했다. “다른 유색인종에게 말이오?” 로버트는 캠벨을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중국놈이 유색인종이라고 누가 그럽디까?”
『마더 나이트』 혹은 ‘하워드 W. 캠벨 2세의 고백록’은 한번 손에 쥐면 못 내려놓는 흡인력 강한 이야기다. (<시사IN> 제80호, 2009년 3/28)
두 번째 장편소설
『타이탄의 미녀』(이강훈 옮김, 금문서적, 2003)에서 보네거트는 “특유의 풍자적 유머와 독설로 미국의 정치, 종교, 특히 기독교를 신랄히 풍자하고 있다.”(「커트 보네거트와 그의 문학」) 1959년 출판된
『타이탄의 미녀』는 체현자(體顯者) 윈스턴 나일스 럼푸드의 입을 빌려 ‘시간뒤틀림’을 예고한다.
“내 우주선이 크로노 신클래스틱 인펀디블룸에 들어갔을 때, 순간적으로 깨달았소. 지금까지 있어 왔던 모든 일들은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있을 모든 일들은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을 말이오.” 시간이 뒤틀린 기간 또한 얼추 짐작하게 한다. “체현은 59일마다 한 번씩, 모두 9년 동안 계속되었다.”
『타이탄의 미녀』 표지커버날개엔 “금문서적에서 출간된 커트 보네거트의 책들...”이라는 타이틀 아래 보네거트의 작품 두 권을 표지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서점 두 곳과 KORIS-NET(국가자료공동목록시스템),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 www.nl.go.kr 소장자료를 검색한 결과 어디서도 이 두 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타이탄의 미녀』 표지커버날개의 책 소개 글을 여기에 옮겨 적는다.
먼저
『챔피온들의 아침식사(Breakfast of Champions)』의 개요는 이렇다. “공상과학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와 성공적인 자동차 딜러 드웨인 후버가 만났다. 광고의 허위성, 군대와 병원의 문제점, 인종문제, 미국사업의 부정, 돈과 섹스에 집착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다양하게 제시할 뿐 아니라 수치스런 부분을 과감히 희화화시킨 문제작.” 공상과학 소설가는 과학소설가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자동피아노(Player Piano)』에선 “인간보다 효율적이라고 입증된 기계들이 인간을 대신하고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인간들은 열등한 기계로 전락하는 미래가 펼쳐진다. ‘효율성’, ‘경제성’, ‘품질’을 성 삼위일체로 숭배하는 현대 산업사회의 맹점을 예리하게 파헤친 보네거트의 처녀작.”
인터넷 자료검색에 따르면, 보네거트 작품 가운데 맨 먼저 우리말로 옮겨진
『제5도살장』(김종운 옮김, 을유문화사, 1980)은 『죽음과 추는 억지춤 또는 어린이들의 십자군 전쟁』(노종혁 옮김, 새와물고기, 1994)이라는 부제목을 앞세우기도 했다.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 봐』(노종혁 옮김, 새와물고기, 1994)는
『타이탄의 미녀』의 다른 제목이다.
『Mother Night』는 「태초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2007) 도리스 레싱의 「생존을 위한 비망록」과 함께 ‘오늘의 세계문학 28’(현중식 옮김, 중앙일보사, 1982)번을 이뤘다.
『타이탄의 미녀』는 『타이탄의 마녀들』이 원제목(『The Sirens of Titan』)과 더 걸맞아 보인다.
원작의 명칭이
『Jailbird』로 추정되는 작품의 한국어판은 두 종 검색된다. 서지사항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죄수와 여재벌』(이민휘 옮김, 신한사, 1983)”과 “『야망의 여재벌』(이민희 옮김, 대경출판사, 1984)”은 같은 책을 번역저본으로 삼은 게 거의 확실하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010)는 가장 최근에 번역된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