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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것은 없다 -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사랑은 뜨겁지도 않고, 격정적이거나 거칠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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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년)
음악: 마이클 갈라소(Michael Galasso), 우메바야시 시게루(梅林茂)
감독: 왕가위(王家衛)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Christopher Doyle), 리핀빙(李屛賓)
주연: 장만옥(張曼玉), 양조위(梁朝偉)

<화양연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사랑은 뜨겁지도 않고, 격정적이거나 거칠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아쉬움, 미련, 갈등 같은 모든 감정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두 주인공의 욕구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처리했다.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갈 듯하다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멈추어 서버린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화면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고, 아련하게 들여다본다. 사랑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하던 관객들의 기대감은 깨지지만, 감정선은 그대로 이어진다. <화양연화>는 아련한 사랑에 대한, 미묘한 감정에 대한 영화다. 두 연인의 소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대사나 스토리가 아니라 이미지로 표현된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색채들이 영상미를 만들어내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나가고,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는 이미지가 되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주제가 심화된다. 그 중심에 「유메지의 테마」(Yumeji’s Theme)가 있다.

차우(양조위) 혼자 골목길에 서 있다. 근처의 다른 골목에서 리첸(장만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와 동시에 「유메지의 테마」가 흐른다. 음악은 리첸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첼로의 음색은 그녀의 고독함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미묘한 긴장감까지 느끼게 만든다. 카메라는 좁고 비탈진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비춘다.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리첸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친다. 김이 솟아오르고, 백열전등이 흔들린다. 다른 등불들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하나만 좌우로 흔들린다. 의도적인 세팅이다. 흔들리는 등불은 갈등하는 리첸의 내면과도 같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외로움에 고민하는 리첸의 심정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 국수집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리첸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과는 다른 세계에 있다. 그녀가 계단을 올라와서 모퉁이를 돌아가면 백열등 하나만 외로이 남아서 거리를 비춘다. 리첸이 지나간 그 공간으로 차우가 들어온다. 같은 시간대인지 다른 시간대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많은 동작들은 슬로 모션으로 우아하게 진행된다. 며칠이 지난 후 두 사람은 같은 계단에서 마주친다. 리첸의 바뀐 옷만이 시간이 경과했음을 알려준다. 차우가 인사를 건네지만 리첸은 조용히 지나쳐간다. 차우의 존재를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이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지나친 자리에는 가로등 불빛만 남아 그들의 세계를 비춘다.

시간은 담담하게 흘러간다. 일상은 반복된다. 다시 며칠이 지난다. 리첸은 보온통을 들고 우아하게 걸어간다. 그녀의 등장을 알리듯이 「유메지의 테마」가 반복되어 흐른다. 좁은 계단을 사이에 두고 리첸은 차우와 마주친다. 음악은 로맨틱하게 흐르지만 두 사람은 머뭇거린다. 두 사람은 마주 보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거기에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유메지의 테마」는 슬픔의 왈츠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연주되는 슬픈 탱고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사랑한다. 그러나 두 사람을 둘러싼 상황은 그들의 사랑을 만류한다. 주변뿐만 아니라 두 사람조차도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 긴장감은 팽팽해진다. 첼로 현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멜로디가 되어 흐르듯이, 두 사람은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치한다. 다가갈 수 있지만 다가가지 않기에 두 사람의 동작은 아름답고, 슬픈 탱고가 된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불륜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감이 겉으로 드러난 이유지만, 음악을 듣다보면 그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두 사람의 감정 속에는 사랑에 대한 희구가 있지만, 그만큼이나 강한 망설임이 있는 것이다. 「유메지의 테마」는 이처럼 막연한 감정, 미련, 아쉬움 등을 담아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엇갈리고, 차우는 엷은 미소를 짓는다. 두 사람이 지나친 자리는 다시 빈 공간이 된다. 백열등만 포도(鋪道)를 비추고, 그 위에 비가 쏟아진다. 가로등이 비추는 이 작은 공간만이 두 사람이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자, 감정의 접점이기도 하다. 다른 곳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지만, 이 공간에서만큼은 두 사람이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다. 백열등 불빛만 비추는 좁은 공간을 공유하면서 두 사람의 내면은 가까워진다. 차우는 가로등 아래 서서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는다. 국수집에서 내려온 리첸은 고개를 돌려 계단 위를 올려다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다. 아마도 차우에 대한 생각일 터이지만, 아무것도 말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있지만 서로 다가가지는 않는다. 리첸은 손수건을 만지작거린다. 리첸의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손수건은 상대방에 대한 갈망을 상징하는 소품이기도 하다. 그녀는 무언가를 망설이고, 고민하는 중이다. 리첸은 다시 계단 위를 바라본다. 바닥에 비가 떨어진다.

「유메지의 테마」는 외롭고 쓸쓸하다. 고독한 정서와 리첸의 아련한 감정을 담고 있다. 반복해서 듣고 있노라면 슬픈 정서가 밀려온다.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두 주인공, 그래서 슬픈 사랑의 춤은 계속된다. 「유메지의 테마」는 이렇게 영화 전체를 관통하면서 흘러간다. 단순한 배경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리첸의 속내와 두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는 언어로서 말이다. 그 음악이 지속되는 한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과 애정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가 없다. 음악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가까워져선 안 돼요. 처음부터 그런 운명이니까요. 미안해요.” 「유메지의 테마」에는 리첸의 그런 감정이 담겨있다.

1962년 홍콩, 이 사랑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 왕가위 감독은 먼저 자막으로 다 밝혀버린다.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어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감독은 이미 결말까지 다 말해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빤한 사랑 이야기를 왕가위는 자신만의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겠노라고 자신감 넘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차우와 리첸은 같은 날 옆집으로 이사를 온다. 차우의 부인과 리첸의 남편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차우의 부인은 야근이 잦고, 리첸은 일본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다. 어느 날 차우는 리첸에게 자기 부인이 똑같은 핸드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리첸은 차우에게 자기 남편에게도 똑같은 넥타이가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자기 파트너들이 서로 불륜 관계에 빠져있음을 안다. 두 사람은 고독을 공유한다. 그러나 배우자들과 똑같은 불륜을 저지르기에는 너무나 소극적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스테이크 하우스에 냇 킹 콜의 노래가 흐른다. 「Aquellos Ojos Verdes」(초록색 눈동자)이다.

「유메지의 테마」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면서 감정의 흐름을 지탱해 준다면, 냇 킹 콜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두 연인 사이의 아련한 연가처럼 흘러나온다. 냇 킹 콜의 영어 앨범이 아닌 라틴 말로 부른 노래들을 택함으로써 장면은 이국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음악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관객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올 뿐 아니라, 절묘하게 드라마를 이어주고, 또한 세심하게 두 주인공의 감정을 담아낸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세 곡이 연이어 나오는 시퀀스들을 보면 음악이 얼마나 유효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화양연화> 포스터.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를 뜻하는 이 말은 동명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유메지의 테마」가 흐를 때 택시를 타고 돌아오던 두 사람은 처음으로 손을 잡는다. 리첸은 차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두 사람의 관계가 드디어 이어지는 것일까. 장면이 바뀌면 라디오가 클로즈업된다. 한 청취자가 「화양연화」를 신청했다는 DJ의 멘트가 흘러나온다. 오래된 옛 유행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花樣年華)을 노래한다. 노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극적으로 다가갔고 사랑하는 마음을 느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암시한다.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다. 「화양연화」의 노랫가락이 아련히 흘러나올 때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은 벽으로 막혀있다. 마음의 벽이자, 현실의 벽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 있지만 그 사이에는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노래를 들으면서 같은 심정에 빠져 있음을 반영하듯이. 카메라는 트랙으로 이동하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두 사람을.

이어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카메라는 서서히 전화기를 향해 다가가지만 아무도 받지 않는다. 실내에는 전화벨 소리, 타자기 소리, 시계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이다. 차우의 독백이 허공에 메아리친다. “티켓이 한 장 더 있으면 나와 같이 가겠소?” 이때 냇 킹 콜이 부르는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Quizas, quizas, quizas)가 흘러나온다. 노래 가사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어쩌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녀를 기다리는 차우의 모습만이 클로즈업된다. 노래 제목처럼 차우는 리첸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 ‘어쩌면’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두 사람 다 적극적인 행동은 취하지 못한다. 차우는 떠나고 리첸은 혼자 앉아있다. 초록색 의상과 빨간 커튼이 대비를 이룬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마음속에 두고 있던 이가 떠나가 버린 것이다. 카메라는 울고 있는 리첸을 오래도록 비춘다. 리첸의 독백이 이어진다.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 건가요?” 화면은 암전되고, 1963년 싱가포르로 넘어간다.

이렇게 세 곡이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두 사람의 감정을 보여준다. 「유메지의 테마」에서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 가까워지고 있지만, 「화양연화」에서 오히려 지나간 시간이 가장 행복한 때였음을 알게 된다. 「키사스」에서 차우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싱가포르로의 동행을 요구하지만, 리첸은 사랑을 알면서도 떠나보낸다.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공들의 대사를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영상을 통해서 두 사람의 감정과 상황을 막연하게 공유하는 수밖에 없다.

1년 뒤, 리첸은 차우를 찾아 싱가포르로 오지만 만나지 않는다. 재떨이에는 립스틱이 묻은 담배만 남아있다. 리첸은 차우에게 전화를 걸지만 말을 꺼내지 않는다. 차우가 여보세요, 하는 소리만 허공에 퍼진다.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가 다시 흐른다. 3년 뒤 차우는 홍콩에서 살았던 집을 방문한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모두 다 이사를 떠나버렸다. 리첸이 어린 딸과 함께 그 집에 살고 있음을 차우는 알지 못한다. 냇 킹 콜의 목소리는 ‘혹시나’ 두 사람이 극적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암시하는 듯이 계속 흐른다. 차우는 리첸이 살고 있는 집 문을 응시한다. 그러나 리첸은 나오지 않는다. 차우는 떠나간다. 자막이 뜬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Tip 1] 「유메지의 테마」는 ‘폭력 미학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일본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 감독 스즈키 세이준(鈴木淸順)의 <유메지>(夢二)에 사용되었던 음악이다. 스즈키의 영향을 받기도 한 왕가위 감독은 이미 영화에서 한 번 사용되었던 이 테마를 <화양연화>에서 다시금 유효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아니, 원작에서의 이미지보다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재창조해내고 있다.

[Tip 2] 「Quizas, quizas, quizas」는 쿠바 작곡가 오스발도 파레스(Osvaldo Farres)의 1947년 곡으로 냇 킹 콜의 노래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 나오는 오마라 포르투온도(Omara Portuondo)의 유쾌한 연주도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강력 추천하고 싶은 버전은 <트리오 로스 판초스>(Trio Los Panchos)의 것으로, 원곡이 담고 있는 라틴 볼레로 풍의 느낌을 아주 잘 살린 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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