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 나폴리 그리고 시라쿠사
여행의 시작이 된 그림
카라바조의 「성녀 루치아의 매장」은 우리에겐 아주 중요한 그림이다. 조너선 존스가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명작 목록을 만들게 된 동기가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시작되었다고 한 만큼 꼭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카라바조 이전에도 미술이 있었고, 카라바조 이후에도 미술이 있었다. 그러나 카라바조 때문에, 이 둘은 절대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다”라는 말처럼 그의 그림에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활동한 화가라고 믿기 어려운 독특함이 있다. 그중에서 우리 부자는 「엠마오에서의 만찬」 「토마의 의심」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좋아하는데, 이 그림 외에 어떤 것을 보아도 그림 속에는 그의 천재성이 녹아 있는 듯하다.
“민석아,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살인을 하고 도피 생활을 계속했는데, 시라쿠사 지역 영주의 환대를 받았대. 왜 그런 것 같니?”
민석은 어떻게 살인자가 환영받을 수 있느냐며 되물었다.
“이유는 단 하나야.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서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의회 귀족들 역시 새로 건축된 성 루치아 대성당에 그의 그림이 걸리기를 기대하고 있었어. 그는 이 의뢰를 받아들여 한 달 만에 「성녀 루치아의 매장」이라는 그림을 완성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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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다 메리시 카라바조, 「성녀 루치아의 매장」, 캔버스에 유채, 408?300cm, 1608, 벨로모 미술관, 시라쿠사 | |
「성녀 루치아의 매장」을 보면 주인공인 성녀보다 두 일꾼에게 먼저 시선이 간다. 묵묵히 일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 무겁고 엄숙하게 만든다. 뒤쪽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온갖 고문과 위기를 이겨냈던 성녀의 죽음에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거나, 그저 바라만 보거나, 가만히 묵도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은 슬픔과 놀람을 담고 있다. 그들의 슬픈 시선의 끝에서 성녀 루치아를 찾을 수 있다.
루치아는 라틴어로 ‘빛’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귀족의 딸이었으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젊은 나이에 호민관 가이오와 약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병이 성인의 도움으로 기적처럼 회복되자,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기로 약속한다. 그 당시에는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이 강했던 때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혼수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이오와의 약혼을 파기했다. 그녀의 행동에 몹시 화가 난 가이오는 그녀를 총독에게 고발했다. 그녀의 형 집행을 위해 정장 대여섯 명이 왔고, 루치아가 기도를 하자 그녀의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나중엔 소까지 매달아 끌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총독은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 옆에 장작을 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불 속에서도 타지 않았고, 심지어 펄펄 끊는 기름을 부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도 사람이었기에 340년 12월 13일, 목에 비수가 꽂힌 채 결국 순교했다. 카라바조는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는 성녀 루치아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냥 평범한 여자 같아 보이는데……. 특별한 점도 없고.”
민석은 그림에서 성녀라는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다.
“응, 보통은 루치아 뒤에 후광이 있거나 자신의 목을 찌른 비수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 그림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지. 그것뿐만이 아니야. 이 그림에서 주인공이 마치 성녀 루치아를 매장하는 두 일꾼처럼 보이지 않니?”
“어, 저 남자들이요? 굉장히 강해 보여요. 루치아를 땅에 묻어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선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아요.”
“응. 성녀 루치아를 굳건한 신앙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칠리아 사람들의 노력과 건강미를 강조해서 베네치아에게 빼앗긴 주도권을 되돌리겠다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 아빠는 그렇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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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바쿠스」, 캔버스에 유채, 95?85cm, 우피치 첹술관, 피렌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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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점쟁이 집시」, 캔버스에 유채, 115?150cm, 카피톨리니 박물관, 로마 | |
미켈란젤로가 죽은 지 7년 후, 또 다른 미켈란젤로가 태어났다. 바로 미켈란젤로 다 메리시 카라바조다. 그는 1571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처음엔 무명 화가로 여러 화가들의 화실을 떠돌며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우연히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1605년 델 몬테 추기경의 대저택에서 나오게 될 때까지, 그는 대저택의 작업실에서 무수히 많은 그림을 그렸다. 초기엔 「바쿠스」와 「점쟁이 집시」같은 크지 않은 그림들을 통해 델 몬테 추기경의 인정을 받았고, 후엔 대형 제단화들을 그려내면서 로마 미술계의 천재 화가로 큰 관심을 얻었다. 그의 걸작들에는 주로 성스러운 존재가 들어 있다. 하지만 그 모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인이 전혀 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 평범한 모습에는 카라바조 특유의 해석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성인들 또한 평범한 사람이었고, 이 평범함 속에서도 성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그림 앞에 사람들을 모여들게 만들었고, 렘브란트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이 영향을 받았다. 그가 그린 「그리스도의 매장」 역시 당시 로마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최고의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그를 선배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화가로 인정받게 해주었다.
“그런데요 아빠. 이 사람은 ‘미친’ 천재 화가로 불렸다고 하셨잖아요. 왜 그런 거예요?”
“아까, 살인자가 되어 도망 다닌 적이 있다고 했던 것 기억나지? 그는 한 식당에서 종업원이 자신의 질문에 무성의하게 대답한다고 칼로 찔렀어. 그리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밤중에 친구들과 함께 경찰서에 돌을 던지는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더구나. 1606년 5월 28일, 카라바조는 라누치오 토마소니와의 격렬한 말다툼 끝에 그를 찔러 죽였어. 이후 그는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된 거지. 그는 4년에 걸쳐 나폴리, 말타, 시라쿠사, 메시나, 팔레르모 등지를 떠돌아다녔대. 머물렀던 지역마다 최고의 명작들을 남겼고 그중 하나가 바로 「성녀 루치아의 매장」이란다. 비록 가는 곳마다 천재 화가로서 환영받았지만, 잠을 잘 땐 베개 속에 단검을 숨겨 둘 정도로 불안에 떨었다는구나. 결국 그는 그림을 통해 교황청의 정식 사면을 받으려 했어. 천재 화가가 작품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로마 지도자들이 그 사면 요청을 받아 주기로 한 거야. 그는 사면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는데 다른 사건에 우연히 휘말려 다시 체포되었어. 그리고 사면과 맞바꾸기로 한 그림 모두를 잃어버리게 되었지. 절망 끝에 열병에 걸린 카라바조는 결국 로마에서 하루 거리인 에르콜레에서 사망했는데, 그의 시신이 어디에 매장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대.”
이런 그의 격정적인 삶은 영국의 대표적 감독이자 예술가인 데릭 저먼을 통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 「카라바조」는 여러 실험적 시도와 아름다운 영상미 때문에 1986년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영화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