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서 최초로 얻는 친구는 누구일까요? 우선, 엄마 아빠는 빼겠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세대차와 부모에 의존해야만 살아날 수 있는 의지 관계는 친구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그럼 형제자매? 이것도 친구라고 부르기는 조금 애매하겠습니다. 가족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최초의 친구는 의외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 밖에 존재합니다. 아이가 가장 먼저 상대에게 나와 동일한 인격을 부여하는 대상은 인형이나 장난감, 모빌 같은 것들입니다. 특히 언어 체계가 잡히고 의사소통이 시작되면서 아이는 자신의 내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자의식을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상대에 투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인형이나 동물에게 친숙하게 말을 걸고 대화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런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어린 시절의 친구 이야기가 가장 절절한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누구나 반드시 거쳐 가는 어린 시절의 친구와, 그 친구를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유년 시절의 기록이 절절한 동화 한 권입니다. 아니, 동화가 아니겠지요. 브라질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이 책은 여러분 모두 익히 알고 계시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입니다.
1968년 처음 출간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주인공인 다섯 살 난 꼬마 제제가 만나는 새로운 친구와 그 친구를 통해 한 걸음 더 철이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성장 동화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흔한 이유만으로 전 세계 모든 어린이 필독서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흔한 성장 동화의 줄거리지만 어른과 어린이 모두의 마음을 흔들 만한 많은 공감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소설입니다.
작가인 바스콘셀로스가 ‘자전적’임을 이야기한 바 있는 이 소설은 정말 브라질 어느 시골 마을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고 두드러져 현실감이 남다릅니다. 지금의 MP3는 꿈도 못 꾸던 시절, 심지어 카세트테이프나 LP레코드조차 구경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의 유행가를 다루는 대목은 역사적인 스케치로 남을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또 가난한 집의 다섯 살 배기 아이가 아빠 선물을 사기 위해 구두통을 메고 거리로 나가는 장면은 동화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환상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냉철한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디고 서 있는 리얼리즘이 작품의 근간임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넌 무슨 일이든 관심이 많고 눈치가 빠르니 우리 집의 사정을 잘 알겠지? 아버지는 놀고 계시잖아? 아버지가 스코트월드 씨와 싸우고 회사를 그만둔 지가 벌써 6개월이 넘었단 말이야. 너는 라라 누나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도 모르고 있을 거야. 또 엄마도 시내에 있는 영국인 방직공장에 다닌다는 걸 모르고 있어. 안 그래? 이 바보야. 모두들 돈을 모아 새 집을 마련하려고 그러는 거야.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벌써 8개월 치의 집세가 밀려 있단 말야. 하기야 넌 어려서 이런 슬픈 사정을 모를 거야. 하지만 난 어려운 집안을 돕기 위해 성당에서 미사 돕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
위 대사는 소설 앞부분에서 동생 제제에게 집안 사정을 설명해 주는 형 또또까의 대사입니다. 어린 아이의 대사는 해고된 노동자와 사장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도 파악하고 있고, 집세가 8개월 치나 밀렸다는 생활감각수학(이 땅의 월급쟁이들이 머리가 아닌 피부로 계산하는 수학법)적인 면모까지도 보여 줍니다. 소설이 간간이 노출하는 이러한 현실감은 마치 세상으로부터 늘 격리되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일반적인 동화와는 명백한 차별점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지만 총명하고 똘똘하며 장난기가 악마 수준인 주인공 제제는 여느 어린아이와 다름없이 가난 따위에 크게 주눅 들지 않고 형과 누나, 동생 사이에서 장난 심하고 동생 잘 챙기는 아이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제제네 가족이 새로 이사 간 집 뒤뜰에서 제제는 마침내 자신의 첫 친구를 맞이합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라임 오렌지나무는 온통 가시투성이에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형과 누나들이 모두 그럴듯한 나무 하나씩을 ‘내 거’로 찜해놓아 순서에 밀린 제제는 그냥 라임 오렌지나무 하나를 갖기로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나무가 말을 한다는 점입니다.
남미 계열의 소설들에 우리가 함부로 붙이는 통념 중 하나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입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등에서 두드러지는 이 개념은 다분히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현상들이 소설 속 일상에서 마치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벌어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 눈물방울이 들어간 케이크를 먹은 모든 이가 펑펑 운다든가 하는 설정은 바로 이 개념과 상통하는 설정입니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도 그러한 남미 소설의 느낌을 바로 라임 오렌지나무와 제제의 대화에서 보여 줍니다. 나무는 제제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하고, 제제를 나무 위에 태우고는 마치 밤하늘을 달리는 망아지처럼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제제는 늘 괄시받던 현실에서 벗어나 나무와 친구가 됩니다.
‘친구’는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제제는 장난이 과하게 심한 아이지만, 아이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는 그 장난은 자신이 아닌 ‘내 맘속의 악마’가 시키는 장난입니다(아이들은 누구나 자신은 진짜 그렇게 믿으면서 거짓말을 하는 자기 합리화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런 장난 덕에 제제는 늘 어른들에게 구박받고 누나들한테 매를 맞습니다. 자신의 진짜 마음은 어디 이야기할 구석이 없는 것이지요.
의외로 아이들은 그래서 외롭습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은 안락하지만,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아이 자아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은 없습니다.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렇기에 아이는 분명 말할 수 없는 대상이지만 ‘나의’라는 소유격을 붙일 수 있는 첫 상대를 자신의 친구로 삼습니다. 바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밍기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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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 바스콘셀로스(1920~1984) | |
나무 밍기뉴가 제제의 첫 번째 친구라면, 그의 두 번째 친구는 말 못 하는 나무 이상으로 놀라운 존재입니다. 대략 30에서 40 사이에 걸치는 것으로 여겨지는 남자, 일명 ‘뽀르뚜가’입니다.
돈이 많아 보이고, 늘 멋진 차를 타고 다니는 뽀르뚜가는 제제와 그 무리들에게는 두려움과 도전의 대상입니다. 뽀르뚜가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소문도 나 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 중 하나인 ‘박쥐놀이’(지나가는 자동차 뒤의 스페어타이어에 딱 달라붙어 다니는 놀이)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뽀르뚜가의 차에 박쥐를 도전했던 제제는 걸려서 한참 혼이 나고, 이를 갑니다.
그러나 뽀르뚜가로부터 다친 다리를 치료받고 감명받은 제제는 뽀르뚜가와 친구가 됩니다. 다섯 살 남자 아이와 30대가 넘어가는 아저씨와의 친구 관계는 제제-밍기뉴의 관계 이상으로 중요한 소설의 요소입니다.
뽀르뚜가의 존재는 여러모로 제제의 아버지와 대조됩니다. 제제의 아버지가 식민지인에 가난한 해고노동자고 늙은 반면, 뽀르뚜가는 본국인에 차까지 굴리는 젊고 힘찬 남성입니다. 아이에게 보이는 두 남성 어른―가부장이자 소사회의 지배자―은 강한 대비를 이루며, 사실 제제가 뽀르뚜가에게 보이는 호감은 단순한 ‘친구’의 의미로만 남지는 않습니다. 그 친구는 동경이자 미래이며 희망입니다.
다섯 살의 친구 둘은 그래서 아이의 내면이 가지는 여러 가지 모습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거울이 됩니다. 그 무렵의 아이들은 자의식 외부의 세계, 즉 현실을 만나면서 이른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거치게 됩니다. 아이의 환상은 말하지 못하는 나무와의 대화를 통해 그 나래를 펼치고, 아이가 세상과 살을 부대끼면서 갖게 되는 욕망―좋은 차, 젊은 힘, 남성으로서의 가치―은 뽀르뚜가와의 친구 관계를 통한 동경으로 나타납니다. 아이는 나무 밍기뉴와의 친구 맺기를 통해 아이로 남지만, 어른 뽀르뚜가와의 친구 맺기를 통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실제 소설은 뽀르뚜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아이가 어른의 세계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뽀르뚜가의 죽음은 하필 라임 오렌지나무를 베어버리는 시점과 겹치는데, 아이는 이미 환상의 세계였던 라임 오렌지나무와는 작별을 마음먹은 상황입니다. 아이가 우는 것을 어른들은 ‘나무를 베어서’라고 생각하지만, 제제 스스로는 ‘뽀르뚜가와의 이별’이 눈물의 원인입니다. 이는 소설이 가리키는 지점이 미화된 환상이 아니라 매우 현실적인 시각에서 아이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나무는 베였고, 뽀르뚜가는 죽습니다. 두 친구와의 이별, 그리고 자의식 너머의 세계와의 조우. 이는 모든 유년이 겪는 자의식 탈출의 공통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모든 어린 자아는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는 그러한 슬픔을 공유하며 자라 왔고, 그랬기에 그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모호한 경계의 지점에 대한 기억이 늘 흐려져 있는 상태 또한 공유합니다. 뿌옇게만 기억나는 그 시절을 매우 단단한 리얼리티의 관점에서 그려낸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는 그래서 읽는 이에게 추억과 눈물, 그뿐 아닌 한편에 비어 있는 상실감과 현실의 공포까지도 느끼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여러분은 친구가 있으십니까?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제 여쭤보는 ‘친구’의 의미가 점심밥처럼 가벼운 의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 ‘친구’가 있으십니까? 있다면 어떤 친구입니까? 각자 자신의 나이에 서서, 밍기뉴가 있으십니까? 아니면 뽀르뚜가가 있으십니까? 늘 나이를 먹고 늘 한편 더 철이 들어가야만 하는 건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 변화뿐인 인생 속에서 여러분은 어느 누구를 내 변화의 친구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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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