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예스 책꽂이 >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철학자, 존 맥타가트는 ‘푸시킨’이란 이름의 고양이를 키웠다. 겨울에 맥타가트의 캠브리지 연구실을 방문한 사람들은 푸시킨이 의기양양하게 벽난로 앞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맥타가트는 구석진 책상 앞에서 떨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곤 했다. 사람들이 “왜 푸시킨에게 가장 따뜻한 자리를 내주는 건가?”라고 물으면 맥타가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고양이에겐 그 이상이 없거든.”
고양이와는 달리 인간은 종종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우리는 철학 수업을 받을 때나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뿐 아니라 술집과 클럽에서 또는 비행기 여행을 하거나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해변에서 조는 동안에, 그리고 잠은 오지 않고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만 들리는 한밤의 정적 속에서도 성찰을 한다. 그리고 흔히 있는 일이지만 상황이 어려워져서 차라리 고양이처럼 살고 싶어질 때에도―우리 어머니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황혼기에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양이가 되기보다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만이 하늘의 지도를 그릴 줄 알고, 남을 동정하고 공정하게 행동할 줄 알고, 술집 여자가 무슨 술을 주문할 거냐고 물을 때―그녀가 “비터Bitter(맥주의 한 종류, 또는 괴롭냐는 질문―옮긴이)?”라고 물으면―“아니, 그냥 피곤해서”라고 대답하면서 상대방과 함께 웃을 줄 안다.
인간의 삶에는 고양이에게는 없는 많은 것들이 있고,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일단 깊이 성찰을 하면 우리는 난관에 부딪힌다. 과연 무엇이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이 어떤 고귀한 목표를 위해 존재할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삶을 초월하는 목적을 찾다가 그 부재를 깨닫고 절망에 빠지거나 다른 목적을 완전히 배제하는 신성한 목적을 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인간적인 목적을 뛰어넘는 고귀한 목적을 찾을 필요가 없다. 삶의 순간들, 인간관계, 다양한 활동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가치, 역사, 발전의 인식 가능한 패턴을 발견할 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술―특히 연극, 소설, 오페라의 서사구조―은 허구의 삶, 즉 이야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드러낸다.
이야기는 관점을 제시하고 관계를 드러내고 충돌 지점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눈을 연다.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들의 과거가 그들의 미래와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들이 결국 어떤 가치관을 지지하는지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삶과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이야기는 신화와 전설, 설화와 극, 시와 오페라―그리고 오늘날에는 종일 방송되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취한다. 제우스, 아폴로, 디오니소스에 관한 고대 그리스 식 잡담 대신에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 크고 폭넓게 사색하면서 <섹스 앤 더 시티>, <CSI 과학수사대>, <위기의 주부들>의 다음 내용을 예측한다.
예술은 우리의 인생살이를 도울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과 결부시킨다. 우리는 인간의 삶이 출생 시의 우발적 사고, 머리카락의 흩날림, 우연한 마주침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본다. 우리는 나약함과 비극을 만나지만, 또한 결단과 선견지명을 만난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 신화에 의존하며 살았는지를 생각해보라.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이디푸스, 나르시스, 트로이의 헬렌 이야기들을 업데이트시킨 이야기들과 심리학 이론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우리의 경험은 단편적이고, 식별할 수 있는 패턴이 없으며, 감정은 항상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인생에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리고 3장 ‘욕망과 자유를 강요하는 만병통치약’에서 간략하게 묘사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실제 모습과 우리가 원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보이는 갈등과 보이지 않는 갈등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아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에 관한 이야기다.
먼저 아폴로의 이미지는 명확한 한계, 뚜렷한 목표, 법칙이 있는 이성적 세계, 즉 명령에 따르는 주먹 쥔 손을 의미한다. 그 이미지는 단순함, 아름다움, 정밀함 같은 미적 개념들을 형성한다. 우리 인간은 종종 그런 이상을 갈망한다. 다른 한편으로 디오니소스의 이미지는 도취와 흥분이고, 환희와 열광 속에서 경계가 흐릿해지는 그 세계에서 우리는 손바닥을 펴고, 모두를 환영하고, 모두에게 양보한다. 우리는 부드러워지고 서로에게 녹아든다. 이렇게 분명한 이분법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또 그런 생각 자체가 아폴로적인 방식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배와 굴복, 평행과 뒤섞임 사이에서 충돌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만으로는 너무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인물들의 특수성, 소설가가 우리의 갈등을 선명히 드러내기 위해 제시하는 디테일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토마스 만의 『베니스의 죽음』은―중편소설이든,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든,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든―하나의 갈등을 보여준다. 아폴로를 의인화한 인물로, 엄격한 작가이자 미학의 찬미자인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신비한 소녀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다. 그 소녀에 대한 아센바흐의 아폴론적 미적 감상은 어느덧 디오니소스적인 집착과 관능적 욕망으로 바뀐다. 아센바흐는 노인의 성애, 젊음에 대한 갈망 때문에 절망에 빠지고 점점 쇠약해진다. 그러나 양의적인 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해변에서 맞이하는 죽음, 바다를 향한 그의 마지막 시선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생을 느끼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짧은 묘사는 매력이 없지만, 소설, 영화, 오페라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작품의 아름다움에 몰입하지만 그와 동시에 작품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내적 갈등과 관련시킬 수 있다. 최고의 예술에는 우리를 자아도취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해 우리의 삶과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설이 담겨 있다. 종교도 이런 기능을 한다. 신자들은 성서와 전통으로부터 파생된 이야기, 의식, 음악에 비추어 삶을 영위한다. 물론 신자들의 시선이 우리의 삶을 지나쳐 신과 내세를 향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낙관주의에 빠져 좋은 예술이 좋은 행동을 보장한다고는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비인간적인 악한들 중에도―홀로코스트를 운영했던 자들을 생각해보라―예를 들어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작품 같은 훌륭한 예술에 경탄했던 자들이 있었다. 예술은 우리를 대신해 옳고 그름을 선택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앞을 보고 살아야 하고 뒤를 보고 이해해야 한다.”라고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지점에 서기 위해 잠시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멈춘다 해도 우리에겐 왜곡된 그림이 주어진다. 과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부분적으로 미래에 달려 있다. 축구 경기에서 우리 팀이 종료 10분을 남기고 근소한 리드를 지키기 위해 공을 돌린다고 상상해보자. 그때까지 게임을 평가했던 방식은 일단 경기가 승리로 끝나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뀔 것이다. 형편없는 진형으로 평가했던 것이 경기가 끝나면 대단히 훌륭했다는 칭찬으로 바뀐다.
‘되돌아보기’와 되돌아보는 것은 둘 다 가치가 있다. 서사적 예술은 둘 다―되돌아보는 삶과 되돌아보기―를 보여준다. 임종을 앞두고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에게는 삶을 창조하고 그 삶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또한 그 삶을 새로운 눈으로 ‘되돌아볼’ 자유가 있다고 말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죽음의 고통은 일단 죽으면 타자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해석하고 고정시키고 분류하는 동안에 우리는 무기력하다. 그러나 서사적 예술은 우리가 그런 시도를 항상 복습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람들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에 대한 해석을 두고 어떻게 논쟁하고 비평하는지를 생각해보라.
또 하나의 역설이지만, 지상의 삶은 너무 많은 것과 너무 적은 것을 모두 제공한다. 이곳엔 비극이 펼쳐진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지구를 순회하는 여행자의 삶이기를 바라지만, 또한 우리는 작고 안정된 공동체 안에서 나무처럼 성장하는 삶을 갈망하기도 한다.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삶과 세속적인 삶―왕족의 삶과카사노바의 삶―을 모두 열망하고, 도시적인 여자, 여류시인, 고급 창부의 삶과 현실적인 여자의 삶을 모두 열망한다. 생활방식은 서로를 배제한다. 우리는 모든 생활방식을 살아볼 순 없다. 폭풍은 고요함을 배제한다. 어둠은 무지개를 배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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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케이브> 저/<김한영> 역11,700원(10% + 5%)
유쾌한 공상과 기발한 역설로 오늘을 도발한다 일상을 전복하는 철학의 카타르시스! 해학과 유머로 무장한 질문을 통해 삶을 관통하는 33개의 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 속에 자리한 철학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