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태생의 작가 에밀 시오랑(Emile Cioran, 1911-1995)을 리뷰하기로 마음을 다잡자마자 벽에 부딪혔다. 시오랑의 지명도가 다소 떨어지거나 무단?중복 번역된 그의 책 대부분이 절판 상태라 그런 건 아니다.
나를 멈칫하게 한 것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 지음, 산책자, 2009) 에필로그의 한 대목이다. “국역본들을 읽고 제대로 된 시오랑론을 쓴다는 건 치기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나대로의 시오랑론을 꿈꾸었으되, 아직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이자 변명이다.”
이를 어쩌나! 감히 나는 잘 쓴 시오랑론은 바라지도 않는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 에필로그를 읽고 지난 3월의 굴욕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다. 나는 어느 포털사이트에서 올 초부터 마련한 그날의 세계인물 리뷰에 필자로 참여했다가 첫 글을 올린 지 겨우 이틀 만에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출당한 바 있다.
나의 전격적인 퇴출은 내 글에 붙은 부정적인 댓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생각해도 오싹한 반응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뭔 말 하는지 모르겠다. 2. 3월 18일까지 그날의 세계인물 가운데 제일 재미 없다. 3. 앞으로 주최 측에서 이 필자의 글은 교정 교열을 많이 봐야 한다.’
내 셈법이 정확하다면, 에밀 시오랑 편은 내가 1997년 이맘때부터 쓰기 시작한 번역서를 중심으로 엮은 외국 사상가와 저자 리뷰의 195번째 글이다. (국내 저자 리뷰를 더하면 200번째가 된다.) 같은 형식의 글을 오래 썼다 하여 품질까지 보장하진 않는다. 다만 꾸준히 써 온 덕분에 이력은 붙었다.
로쟈의 한국어판 시오랑에 대한 불신은 원제목과 동떨어진 번역서 제목에서 기인한다. 내 수중에 있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한 우리말로 옮겨진 시오랑의 책은 5종이다(편역서 한 권은 제외). 시오랑의 대표작은 얼추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말 제목으로는 어떤 책이 옮겨졌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 또 다양한 이름 표기 방식은 혼란을 가중한다.
“에밀 시오랑의 이름은 루마니아어 발음에 따라 ‘치오란’이라고도 표기되는데, ‘찌오런’은 조금 과도해 보인다. 루마니아 태생이긴 하지만 20대에 프랑스로 건너와 시오랑이 평생 산 곳은 파리다. 그리고 외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운명에 대해서 비통해 하긴 했지만 시오랑은 프랑스 체재 이후에 대부분의 에세이를 루마니아어가 아니라 새로 배운 프랑스어로 썼다.”(『로쟈의 인문학 서재』, 406쪽)
좀 부풀려 말하면, 외래어표기법은 출판사마다 다 다르다. 나는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이 늦게나마 번역되길 바랐다. 그런데 웬걸, 패디먼의 책은 진작 우리말로 옮겨졌다. 게다가 나는 그 책을 갖고 있기까지 하다. 『일생의 독서계획』(김주영 옮김, 태학당, 1995)의 저자 클립톤 파디먼이 그 패디먼이었다니!
최근 출간된 『안동림의 불멸의 지휘자』(웅진지식하우스)에서는 일부 외래어 표기가 낯설다. <피가로의 결혼>을 <휘가로의 결혼>이라고 하는 건 그나마 부담감이 덜하다. 필하모니를 휠하모니라 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시카고를 쉬카고로, 필라델피아를 휠라델휘아라 하는 게 얼마나 현지음에 가까운 표기인지 모르겠다.
“본문의 외래어 표기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지 않고 가능한 한 원어 발음을 존중하면서 저자의 표기 원칙에 따라 통일하였다.”며 미리 일러두긴 했어도 파시즘을 화씨즘이라 한 건 영 아니다. 그러면 파쇼는 화쑈가 되나?
『로쟈의 인문학 서재』 에필로그를 통해서야 수전 손택의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이병용?안재연 옮김, 현대미학사, 2004)에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시오랑론”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손택의 두 번째 평론집 국역본을 갖고 있지만 그런 줄 몰랐다(이 책은 손택의 이름을 수잔 손탁으로 표기).
그도 그럴 것이 손택의 에세이 표제인 「반(反)자기사고-찌오런에 관한 고찰」만으로는 이게 시오랑론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찌오런의 경우, 우리식 표기법으로는 에밀 치오런으로 해야 하나, 그곳 원래 발음인 ‘찌’와 우리식 표기인 ‘치’의 차이가 심해 이 경우는 원음에 가깝게 표기했다.”(‘역자 후기’)
수전 손택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시오랑은 보수주의자다. 시오랑에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생육 불가능의 흥미 없는 관점이다. 때문에 과격한 혁명에의 희망을 그는 성숙한 정신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기시킨다.
시오랑은 “루마니아 태생인데, 그곳의 저명한 지식인 망명자 대부분이 비정치적이거나 노골적으로 반동적이었다.” 젊은 날 에밀 시오랑은 극작가 으젠 이오네스코, 신화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와 함께 루마니아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로 여겨졌는데, 엘리아데는 파시즘에 부역한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엘리아데는 적어도 파시즘 성향이었다.
손택은 시오랑을 높이 평가한다. 시오랑은 “진정한 역량을 지닌 현역 저술가 중에서 가장 ‘섬세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의 하나이다. 뉘앙스, 아이러니 그리고 정제(精製)는” 시오랑 사고의 본질이다. 나는 시오랑에게서 ‘역설의 중첩’을 본다. 미국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 마냥 다리를 두 번 꼰달지.
에밀 시오랑은 고립무원의 괴팍한 사상가가 아니다. 손택은 시오랑을 키에르케고르, 니체, 비트겐슈타인로 이어지는 전통의 계승자로 본다. “이와 같은 후기 철학적인 현대적 철학 전통은 전통적인 형식의 철학적 화법은 이미 붕괴되어 없어졌다고 하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들에겐 아포리즘, 수기, 메모 같은 불완전한 화법과 우화, 시, 철학적 이야기, 비평적 해석 같은 위험을 무릅쓴 화법이 주된 가능성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전 손택이 “단절된 논증”이라고 표현한 시오랑의 방법론은 라 로슈푸코나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객관적 아포리즘과는 구별된다.
“그의 에세이가 제공하는 것은 진단(diagnosis)이다. 정통 요법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활이 하나의 객체, 하나의 사물로 바뀌어 가는 것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신적으로 좋은 취미로 인정해준다.” 손택은 시오랑의 “목적은 진단에 있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격언집
『독설의 팡세』(김정숙 옮김, 문학동네, 2004)는 시오랑 철학의 핵심을 담았다. 시오랑 책의 한국어판으로는 드물게 저작권 표시란이 있는 이 책은 우대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책 말미에 실린 ‘에밀 시오랑 연보’에서는 시오랑, 이오네스코, 엘리아데 세 사람을 20세기 초중반 루마니아 문학의 새로운 기대주라고 언급한다.
시오랑은 여러 개념의 정의부터 남다르다. 자유는 “건강한 자들이 늘어놓는 억지”다. 슬픔은 “어떤 불행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갈증이다.” 절망은 “대담해진 불행이며, 선동의 한 형식이고, 조심성 없는 시대에 대한 하나의 철학이다.” 광기가 “확산의 경제학”이라면, “정신적 정상 상태는 폐쇄 경제학이며, 실패의 자급자족이다.”
내가 가장 공감하는 시오랑의 아포리즘은 이렇다. “예전에 철학자는 사색을 하되 글은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멸 받지는 않았다. 인간이 효율성 앞에 무릎을 꿇은 이래, 천박한 인간들은 작품이라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생산하지 않는 사람을 ‘실패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 ‘실패자’들이 바로 현자였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구원할 사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현자일 것이다.”
이제 겹치는 아이러니, 수전 손택의 표현을 빌리면 “복잡한 혼합체”를 살필 순서다. “우울함이 사라질까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이, 우울함이란 치유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크게 안도할 것이다.” 하나 더 보자. “더 큰 고통의 희망이 없다면 나는 이 순간의 고통이 영원한 것이라 해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시오랑은 80대 중반까지 삶을 이어 갔다. 세상을 비관한 그의 장수는 또 하나의 역설이다. “원할 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자살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니다. “자살의 유혹과 싸우는 데 들인 끈질긴 노력을 생각한다면, 나는 충분히 구원받고, 신(神) 속에 녹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시오랑은 자살을 반박한다. “우리의 슬픔에 그리도 기꺼이 봉사했던 이 세계를 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자살은 낙관주의자의 몫이다. “그들은 낙관주의자가 더 이상 될 수 없는 낙관주의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살 이유가 없으므로 죽을 이유 또한 없다.”
산문집 『절망의 맨 끝에서』(김성기 옮김, 에디터, 1994)와
『절망의 끝에서』(김정숙 옮김, 강, 1997)는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나중 번역된 책은 「부조리에 대한 정열」의 본문 글귀를 제목으로 삼았다. 먼저 번역된 책의 그 대목은 “절망의 절정에서”다.
『동구로 띄우는 편지』(김정숙 옮김, 이땅출판사, 1990)와 『세상을 어둡게 보는 법』(김정숙 옮김, 이땅출판사, 1992)은 한국어판 제목이 다른 같은 책이다. 앞서 나온 책은 표지에 원제를 부제목으로 썼고, 저자 이름은 ‘E.M. 치오란’으로 돼 있다. 다시 나온 책은 간기에 원제목을 알파벳으로 표기했다. 저자 이름은 ‘에밀 시오랑’이다.
『내 생일날의 고독』(전성자 옮김, 에디터, 1994)과
『노랑이 눈을 아프게 쏘아대는 이유』(박현철 옮김, 산수야, 1995)는 다른 책이다. 앞의 책은 ‘명상집’을 내세운다. 뒤의 책은 산문집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일시적인 이 세상에서 우리의 격언들은 사회면 기사 정도의 가치만 있을 뿐이다.”(
『독설의 팡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