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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곰의 먹이가 될 것인가? - 만인이 평등한 이유

곰 앞에서 만인이 평등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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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방패’로 삼는 행위는 용인될 수 있는가? 내 목숨을 구하고 그 결과로 무고한 사람이 죽게 되는 경우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두 명의 탐험가가 있다. 한 명은 비관주의자 페넬로페이고 다른 한 명은 낙관주의자 오필리아라고 해 두자. 두 사람이 산악 지대를 탐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멀리서 곰이 나타난다. 크고 굶주린 곰은 무엇이든 잡아먹을 기세다. 그들을 발견한 곰은 맛있는 아침 식사를 상상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달아나는 게 좋겠어.”
낙관주의자 오필리아가 재촉한다.

“아무 소용없어.”
비관주의자 페넬로페가 곰을 보면서 절망스럽게 내뱉는다.
“곰보다 빨리 뛸 순 없잖아.”

그러자 낙관주의자 오필리아가 능글맞게 웃는다.
“안 그래도 돼. ‘우린’ 곰보다 빨리 뛸 필요 없어. ‘내’가 ‘너’보다 빨리 뛰면 되거든.”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냅다 뛰기 시작한다.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행동은 무엇일까? 그 곰의 아침 식사 거리로 한 명만 필요하다고 가정하면, 둘 중 한 명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성은 그런 자기희생을 요구할까? 그리고 누가 희생해야 할까? 여러분이 묻기 전에 얼른 한마디 덧붙이자면, 두 여자 모두 그들이 힘으로 곰을 물리칠 수 없다는 걸 안다. 도망치는 것만이 살 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것은 아무리 엄격하게 따져도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행동이다.

오필리아의 능글맞은 웃음은 잠시 지우도록 하자. 두 탐험가는 자신들이 큰 곤경에 처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오필리아가ㅡ또는 페넬로페가ㅡ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도덕성이 요구하는 한계를 벗어나는 일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누가 더 빠른지 또는 누가 더 몸을 잘 비틀고 방향을 잘 꺾는지 모른 채 우선 곰으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운명이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분명하다. 그들은 오필리아가 더 빨리 달리고 탈출에 성공할 것이며 페넬로페가 곰의 아침밥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오필리아는 약자인 페넬로페가 패배하게ㅡ더 정확히 말하자면, 곰의 먹이가 되게ㅡ만드는 셈이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자신을 희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결국 그녀가 자신을 희생한다면, 우리는 왜 페넬로페가 그녀 대신 희생하면 안 되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그리고 둘 다 곰의 먹이가 되는 것도 완전히 무가치한 일이다. 그들은 상대방이 없으면 죽고 못 사는 연인 사이가 아니다.

이 이야기를 약간만 수정해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방의 다리를 거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당신은 그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그러나 한 여자가 다른 여자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은 얼마나 공평한가?

출처: //public-domain-photos.com

우리는 지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집중력을 발휘해 보자. 당신의 목숨을 구하면 그로 인해 무고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지는 경우만을 생각해 보자. 혈연, 수명 등의 복잡한 조건을 피하기 위해 두 개인의 책임, 행복의 가능성, 사회적 기여도가 비슷하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느끼는 것이 허용 가능한지를 시험할 수 있는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우선 오필리아와 페넬로페가 줄을 서 있고, 오필리아가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미친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와 권총을 발사한다. 오필리아는 몸을 숙여 총알을 피하고, 그 결과 총알은 페넬로페에게 날아가 꽂힌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느라 페넬로페의 죽음에 일조한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페넬로페가 총에 맞을 것을 알았더라도ㅡ경고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고ㅡ고의로 페넬로페를 죽게 하지는 않았다. 페넬로페의 죽음은 오필리아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 아니다. 줄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숙였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페넬로페는 무고하고 불운한 구경꾼이었다.

위의 시나리오를 ‘순서’가 약간 다른 시나리오와 비교해 보자. 오필리아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앞에 서 있는 페넬로페를 떠민다. 이때 오필리아는 사전 동의도 없이 페넬로페를 총알받이로 이용한 셈이다. 물론, 오필리아의 이런 행동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이 시나리오의 도덕적으로 중요한 핵심은 누군가를 방어 수단으로 이용하여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또 다른 비교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기차가 고삐 풀린 말처럼 당신을 향해 달려온다. 당신은 철로에 묶여 있지만, 무선 조종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 열차의 진로를 측선으로 돌리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측선의 선로 위에는 철도원 한 명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 열차의 방향을 돌리면 당신은 목숨을 구할 수 있지만 그 철도원은 죽게 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만, 분명 다음 시나리오의 행동보다는 나쁘지 않다.

이번에도 기차가 고삐 풀린 말처럼 당신을 향해 달려온다.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철로 근처에 서 있는 행인에게 고무탄을 발사하는 것이다. 그 행인이 고무탄에 맞아 정신을 잃고 철로 위로 쓰러지면 기차가 그를 치여 죽이고 멈추게 된다. 그래서 당신은 살아나게 되지만 그것은 행인을 방패로 이용한 결과다. 철도원의 죽음과는 달리 행인의 죽음은 당신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용한 수단이었다.

누군가를 방패로 이용한다는 것은 내가 겪게 될 불행을 그에게 전가시켜 고통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도덕적 요소가 관련돼 있다.

첫 번째 요소는 전가된 불행이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내 목숨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무고한 사람을 ‘방패’로 삼아 그녀의 매니큐어를 변색시키는 것이라면, 그 정도는 도덕적으로 충분히 용납될 것이다. 만일 그녀가 항의한다면 그녀는 자신의 균형 감각의 부족과 이기심을 드러낼 뿐이다. 만일 내가 어느 신사의 훌륭한 실크 스카프를 낚아채 허벅지 대동맥에서 쏟아지는 피를 막는다면, 나는 분명 그의 재산을 침해한 것이 된다. 그러나 실크 스카프 한 장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은 대단히 괜찮은 거래다. 물론 그 신사는 자신의 재산권이 침해당했다고 불평할지 모른다.

두 번째 요소는 전가 그 자체다. 방패의 예들에서 전가는 의도적이고 필수적이다. 나머지 예들에서는 남에게 불행을 떠넘기지 않아도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이 실제로 코앞에 닥쳤을 때 우리는 그런 구분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을 품게 된다. 당신에겐 기차의 진로를 바꿔 자신의 목숨을 구할 권리가 있지만, 만일 그로 인해 철도원이 죽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음에도, 당신은 그에게 불행을 떠넘기는 잔인한 행동을 해도 되는가? 물론 그가 의식이 있고 그래서 손톱의 매니큐어가 벗겨지든 안 벗겨지든 안전하게 피할 수 있다면 도덕적으로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설정한 상황에서 당신이 기차를 그에게 돌린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다. 의식이 없는 그 철도원은 당신에겐 말하자면 무고한 위협이다. 만일 당신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 즉 기차의 진로 바꾸기를 그의 존재가 도덕적으로 방해한다는 점에서다.

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페넬로페가 잡아먹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줄행랑치는 오필리아의 행동은 과연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결국 곰이 더 이상 오필리아를 쫓아오지 않으려면 페넬로페가 잡아먹혀야 한다. 이것은 마치 오필리아가 자신의 불행을 페넬로페에게 떠넘긴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기차를 혼수상태의 철도원에게 돌리는 것만큼이나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누구나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고 느낀다.

아마 방패 사례와 곰 사례의 차이는 두 이야기의 출발점에 있을 것이다. 곰의 경우 두 탐험가는 처음부터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굶주린 곰에게 포착되었다. 기차의 경우는 당신 혼자만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당신이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철도원은 안전할 것이다. 반면에 오필리아가 곰에 대해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 해도 페넬로페는 곰의 허기에 노출되어 있다. 만일 미친 사람이 아무나 쏘기 위해 총을 꺼냈다면 줄에 선 모든 사람이 불행의 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 미친 사람이 맨 앞에 서 있는 오필리아를 특별히 노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가 몸을 숙이고 총알을 피했다면 그녀는 부당하게 불행을 타인에게 전가시킨 것일까?

선로 위의 철도원, 오필리아 뒤에 서 있는 페넬로페, 달리기를 잘 못하는 페넬로페ㅡ우리는 이 모든 조건이 불공평하다고 선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오필리아가 줄의 맨 앞에 서 있는 것, 당신이 달리는 기차 앞에 있는 것도 불공평하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가난, 질병 속에 태어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것도 불공평하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수많은 도덕적 문제들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게 아닐까?

※ 운영자가 알립니다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는 마젤란과 함께하며, 매주 금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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