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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사과합니다

베트남 하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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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이면 객답게 머무르다 갈 일이지, 8천 6백만 명을 상대로 뭘 어쩌겠다고 성질을 부렸나. 하노이의 길에 돌아가 서서 반성하고 후회한다. 하노이에서 사과합니다. 내 탓이오, 내 탓…….


‘신 카페’에서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하노이에 도착했다. 남국의 더위에 전 어깨에 배낭끈을 움켜쥐고 마지막 도시 하노이에 섰다. 오만 인상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지쳐 있었거든. 생각보다 뜨거운 5월의 태양 아래,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 이사 나간 집의 스펀지 수세미마냥 탄력이라곤 없었다.

어느 정도의 피로는 배낭여행자의 기본 표정이다. 여행은 수세미처럼 나를 문질러댄다. 기름기를 닦고 있는 줄도 몰랐던 껍질의 코팅을 긁어 벗겨낸다. 여러 날에 걸쳐 문지르면 미세한 흠과 흠을 입어 피곤하지만, 새로운 무엇을 쉽게 흡수하는 순수하게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나는 그런 ‘좋은 피로감’을 느끼려 여행을 해 왔다.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피로를 넘어서 아팠다. 벗겨도 너무 벗겨냈나, 의욕 과잉이랄까, 여행을 조금 했답시고 겁없이 제풀에 벗어젖혔나 보다. 생수 한 병에 500원을 부르면 적당히 400원 주고 웃어주면 될 걸, 250원이 적정가임을 안다며 바락바락 호치민에서부터 하노이까지 한 달을 매일같이 싸우며 올라왔다.


여행 직후 써낸 책에는 기껏 놀러가서 싸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사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더랬다. 잘 웃고 잘 당하고, 당해도 모르고 웃으면서 ‘여행자라서 그저 행복해요’ ‘시간을 즐기는 게 최고라지요’ 관조하는 바보로서 진정 멋있는 챔피언이었는데, 베트남에서 괴물로 변한 건 여행을 향한 연애가 끝난 탓이었다. 십 년 가까이 정말이지 열과 성을 다해 밤이고 낮이고 오매불망 여행을 그리며 사랑했건만, 언제부터인가 짜릿함이 꺾이더니 똑같이 배낭을 메고 걸어도 재미가 약해졌음이 이곳 베트남에서 확실해졌던 것이다.

첫 개인전 직후 떠난 혼자만의 여행에 꽂혀 오로지 여행에 의한, 여행을 위한, 여행의 삶을 살았는데 이봐, 너를 사랑해서 내 인생을 바꿨단 말이야. 어어엉 우우웅 울분이 때마침 독한 베트남을 만나 대폭발을 일으킨다. 생수가 얼마라고요, 택시비가 얼마라고요, 뭐야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안 그래도 마음 허전한데 어디 붙어보자, 덤벼 다 덤벼, 가자 경찰서로, 프로페셔널 초강력 여행자 최수진이 댁들의 버릇을 낱낱이 고쳐버리겠어, 사기당한 300원을 돌려받고야 말겠어! 결과는 심신이 이사 나간 집 싱크대에 버려진 스펀지 질감이다.

하노이는 호치민보다 기질이 거칠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행자들이 입을 모아 하는 얘기로, 호치민이 경제의 중심지답게 비교적 쿨한 면모를 보인다면 정치적인 하노이 사람들은 그에 비해 좀 뻔뻔하다고도 평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북으로 올라갈수록 바가지가 심해진다고들 말한다.


베트남은 매우 길쭉하게 생겼다. 거리는 멀지만 여행자 대상의 버스편이 편리하게 발달되어서 2주 정도면 종단을 시도해볼 만하다. 북쪽인 하노이부터 내려가도 되고 호치민에서부터 올라가도 된다. “올라갈까요, 내려갈까요?” 인터넷 여행 게시판에 흔히 올라오는 질문이다.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해서 자세히 살피지 않고 호치민에서 시작했는데 북진할수록 가격을 속이는 일이 많아졌고, 뻔히 알면서 당할 수 없다보니 전투력이 나날이 증강, 중간 지점쯤엔 완연한 쌈닭으로 탈태하여 유네스코 벼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구시가를 씩씩 모락모락 김 피우며 쏘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한국 여행자들을 만났는데 반대로 남진해 온 그들은 나의 판단이 현명했다며 부러워하더라.

“왜죠? 내려갈수록 편해질 텐데요.”

“그러니까 지금껏 멍청하게 속은 것을 확인할 시간만이 남은 거잖아요.”

하노이에 대한 글인데 바가지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진다. 아직도 정신적 치유가 안 됐나봐. 여하튼 하노이에 도착을 하긴 했는데 어찌나 기운이 없는지 대성당이 뭐고 박물관이 뭐고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도시에서 쉬려면 카페가 제격이다. 길거리 앉은뱅이 플라스틱 의자에서부터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테라스 소파까지 두루 찾아 숨어 다녔다.






베트남은 세상에서 카페가 제일 많은 나라일 것이다. 책을 냈답시고 베트남 전문가 행세를 하다 보니 여행이나 출장 갈 일이 생긴 친구들이 여지없이 볼거리를 물어온다. 몇 군데 카페를 말하면 베트남에서 카페냐며 의아해하는데, 사실 카페라는 개념은 이 나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커피를 즐겨 마시기도 하지만, 단어의 넓은 쓰임새 때문이다. 커피를 파는 가게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업소에 붙일 수 있거든.

흐뭇한 예를 들자면 ‘최수진 무역회사’ ‘최수진 여행사’ ‘최수진 화실’ ‘최수진 심부름센터’. 또 뭐가 있을까? ‘최수진 반도체’. 캬, 문어발식 계열사 확장에도 베트남 현지법인의 이름은 간단하게 ‘최수진 카페’. 회사의 정체성은 일단 들어와 확인하세요. 카페에서 밥 먹고 카페에서 잠자고 카페에서 버스표 사고 카페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식이니, 적어도 카페라고 쓰인 간판의 숫자만큼은 세계 최다가 맞을 것이다. 베트남어 표기는 Ca Phe이지만 Cafe, Caffe라고도 쓴다.





숙소에서 나와 타마린드 카페Tamarind Cafe에서 야채 스프링 롤을 먹고 터벅터벅 걷다가 간판이 예쁜 로컬카페를 만났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데 그러려면 안에 들어가선 안 되니 두리번두리번~ 오호, 맞은편에 또 다른 카페가 있네. 바깥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스케치북과 크레용을 꺼내 들었다. 짙은 검정색의 뜨거운 커피 Ca Phe Nong이 나왔다. 현지인들은 Ca Phe Sua Da, 연유가 들어간 아이스커피를 주로 마신다. 지나치게 달아서 자주는 못 먹지만 투명한 유리잔 안에 깔린 하얀 연유와 한약만큼 진한 커피의 색감 대비가 예쁘고 휘휘 저어 홀짝이는 운치가 나름 괜찮다. 더운 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단맛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역시나 뜨거운 한낮이지만 커다란 가로수가 늘어져서 골목에 그늘이 꽤 있다. 베트남의 태양은 생각보다 강해서 현지인들은 빛과의 전쟁이다. 모자와 마스크, 팔뚝까지 올라오는 장갑에 각종 화이트닝 화장품으로 막는다. 반면 여행자들은 선탠한 구릿빛 피부로 본국에 돌아가 휴가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처한 환경에서 얻기 힘든 품목이 아름다움이 되는구나.’ 대충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커피 값 5천 동. 빨간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주인 아주머니가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을 거슬러준다. 설마 바가지는 아니겠지?





몇 미터 가지 않아 다른 카페가 나타났다. 하노이를 메운 수많은 카페의 간판. 쉼 없이 사람이 들고난다. 물건을 팔고 연애를 하고 사업 협상을 하고 연유를 얼음에 휘저으며 땀을 식힌다. 열심히 살고 있다. 여행객을 봉으로 알고 정교하지 않은 상술을 부리는 경우가 있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자신과 가족의 삶을 책임지려 부지런히 애쓰는 것이다.

순간 걸음을 멈춘다. 어딘가 부끄럽다. 객이면 객답게 머무르다 갈 일이지, 8천 6백만 명을 상대로 뭘 어쩌겠다고 성질을 부렸나, 그도 모자라 인쇄되는 책에다가 하소연이나 끼적이고……. 하노이의 길에 돌아가 서서 반성하고 후회한다. 어렸을 때 엄마는 화내면 자기만 손해니까 먼저 사과하는 게 이기는 길이라 말씀하셨다. 하노이에서 사과합니다. 내 탓이오, 내 탓…… 솔직히 네 탓도 크지만……. 아니 질끈, 내 탓이오.


여행에 대한 마음이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성질내며 꾸겨버릴 일은 아닌가보다. 애정이 식어 허탈하고 더위에 못 견디겠다던 2년 전의 하노이를 짚어보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정의 내가 보인다. 여행길이 길다. 여행의 기억도 지금의 여정 속에서 새로워진다.


최수진
『베트남 그림 여행』
1998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영상과 애니메이션, 드로잉으로 두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걷기를 좋아하고, 참견하기를 좋아하며, 얄팍한 외국어 공부를 즐기는 걸로 보아 선천적으로 여행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1년에 한 달은 반드시 새로운 세상과 만나야 한다는 소망을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두 차례 베트남에 다녀왔다. 처음 한 달은 베트남을 종단하며 눈인사를 나누었고, 두 번째 한 달은 사파에서 머물며 ‘여행 아닌 여행’을 다녀왔다. 그녀가 여행 중에 겪은 재미난 에피소드와 아름다운 풍경은 따뜻한 그림과 유머러스하면서도 아련한 추억이 묻어나는 『베트남 그림 여행』에 모두 담겨 있다. ‘수진안네’라는 닉네임으로 일상의 내면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개인 홈페이지(www.soo-jin.com)가 보물 1호이다. 최근 출간된 『스타일리시 싱글여행』(2007) 중 ‘상하이’편을 직접 쓰고 그렸다.
하노이 & 하롱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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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그림 여행

<최수진> 글,그림,사진13,500원(10% + 5%)

『베트남 그림 여행』은 화가 최수진이 두 차례 다녀온 베트남에 관한 추억 모음집. 베트남으로의 첫 번째 여행. 한 달 동안 베트남 종단하며 그녀가 얻은 건 베트남을 향한 사랑의 열병이었다.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도 그녀의 눈에 어른거린 건 베트남의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결국 주섬주섬 여행 가방을 챙긴 그녀는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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