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칼럼에 소개된 모든 서점은 직접 다녀온 실제로 존재하는 뉴욕의 서점입니다. 그러나 구성된 이야기는 픽션으로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칼럼은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AAWW(Asian American Writer's Workshop)(☞ 보러 가기)에서 돌아오는 길에 로버트에게 물었다.
“저기 그런데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뭔데?”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책을 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면 세상의 모든 책이 불타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나도 항상 궁금한 것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점이야. 네가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쓸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그런 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건은 터질 수가 있지.”
“제가 미래에 쓸 책은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그 책까지 모조리 타 버렸어. 실제로 불타 버린 건 아니야. 데이터가 사라졌다는 말이지. 그 책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되어 있어. 지난번에 말했다시피 내가 과거로 오게 된 건, 사라져 버린 책 중에 중요한 것을 수집하기 위해서야. 당신의 책도 포함해서 말이야. 처음엔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몇 가지 책들을 실제로 만져보니 얼마나 황홀했는지 몰라. 이제 30년이 지나 그런 것도 무덤덤해졌지만. 그 책을 가지고 미래로 갈 방법도 막막하고…….”
문득 머릿속이 핑, 하고 돌아갔다. 이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시간이 있으시다면 집에서 보여드릴게 있습니다.”
“뭔데?”
나는 웃음을 지었다.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쓴 원고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6시인데 문을 일찍 닫아도 되나요? - 크로포드 도일 서점(Crawford Doyle Bookseller)
크로포드 도일 서점에 들렀을 때엔, 오후 다섯 시 반쯤이었다. 주인장은 밖에 놓여 있던 할인 도서 매대를 안쪽으로 들여 놓고 있는 중이었다. 퇴근길에 들르는 사람도 꽤 있어서 스무 평 남짓 밖에 되지 않는 매장은 꽤나 북적거렸다. 점원들이 다들 바쁜 탓에 귀찮게 질문을 하기도 뭣해서 서점 안을 천천히 구경했다. Upper East 지역의 코너 북스토어와 비슷한 분위기의 동네 서점이지만 좀 더 문학과 역사 서가가 돋보였다. 안쪽에는 초판본 도서가 유리 진열장에 고이 모셔져 있기도 했다.
| 서점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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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0년간 명맥을 유지해 오던 벌링턴(Burlington) 서점이 문을 닫았을 때, 이곳의 단골손님인 줄리 크로포드와 존 도일 부부는 이 서점을 인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신없던 내부를 깔끔하게 서가로 꾸미고 높은 천정을 활용해 2층 서가를 만들었다.
“서점을 열 당시에 벌써 대형 서점은 작은 서점들을 위협하고 있어서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어요. 더 심각한 영향을 받은 건 아마존닷컴 같은 인터넷 서점이죠. 아무래도 사람들이 좀 더 싸게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려고 하니까요. 고객 서비스와 좀 더 특화된 서가로 살아남는 방법밖에 없어요. 저희는 단골손님에게는 책을 배달해 드려요. 뉴욕에 관한 흥미로운 책들도 많이 있고, 영국에서 수입된 책들도 꽤 있죠. 우리가 페넬로페 피츠제럴드의 팬이라서요, 하하.”
책을 정리하는 매니저 토마스 탈봇 씨가 수줍게 말한다. 문 밖에 있는 할인 도서 매대를 옮기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주인장이었다. 보통 서점들은 저녁까지 문을 여는데 이곳은 왠지 문을 닫는 분위기였다.
| 매니저 토마스 탈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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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문을 일찍 닫아요? 여섯 시도 안됐는데.”
“아…… 우리 서점 닫는 시간이 여섯 시예요. 서점의 매출은 주로 주말에 50% 정도 이루어진답니다. 아직 매디슨가의 특징을 잘 모르시나봐요.”
그렇다, 여기는 다운타운과는 달리 모든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는다. 늦게까지 문을 여는 곳은 레스토랑과 몇몇 바 정도가 다다. 근처가 고급 아파트가 밀집한 주거지라 그런지 늦게까지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래도 이 정도의 규모의 서점이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는 법. 책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고, 그 사랑이 넘치는 총 아홉 명의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일을 하는지라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로버트 휘티스라는 분을 알고 계신가 해서요. 접신학 도서관에서 일을 하시는…….”
토마스의 한쪽 눈이 실룩거렸다.
“그…… 글쎄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책이 불타 버린다면 어떤 책을 구할지, 답은 생각해 놓으셨겠지요?”라고 내가 물었다.
“다…… 당신이?”
“네, 제가 바로 북 원더러(Book Wanderer)입니다.”
매니저 토마스 탈봇(Thomas Talbot) 씨가 구하고 싶은 세 권의 책
| | | 『The Transit of Venus』 Shirely Hazzard | 『The Old Wives' Tale』 Arnold Bennett | 『Bleak House』 Charles Dick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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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awford Doyle Bookseller 1082 Madison Ave. (8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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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이렇게 붙잡고 있어 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내가 도움을 줬지, 피해를 준 건 없는데 말이야.”
로버트는 비슷한 말을 계속 중얼거린다. 몸은 의자에 묶여 있어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다. 책이 뒤죽박죽 쌓인 나의 거실 한가운데 그는 묶여 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크로포드 도일 서점에서 하나를 건지긴 했는데 말이야.”
나는 『The Transit of Venus』 속에 감춰 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물론 그것은 『도서관을 태우다』의 원고 일부였다. 내가 앞으로 쓰게 된다는 소설 말이다. 바보, 나는 그 따위 말을 왜 믿었던 것일까? 나는 그걸 싱크대 개수구에서 태운다. 마치, 그레이스가 태웠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렇게 불타고 있는 원고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쓴 건 아닌 것 같아서…… 누가 썼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 나름 당신에 대한 조사를 조금 해 봤어. 미래에서 온 게 확실해? 그런데 30년 전 전에도 브루클린에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또 뭐지? 그리고, 서점을 태우고 있는 사람도 당신이지?”
접신학 도서관과 AAWW까지, 그가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힌트가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 내가 알아낸 것은, 그는 브루클린의 레드 훅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 수많은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지만 거절당해 결국 자비 출판으로 몇 권의 책을 펴냈다는 것, 그리고 그중의 한 권은 미래의 책이 모두 사라진다는 『도서관을 태우다』라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죄다 털어 접신학 도서관이라는 사재 도서관(이라고 해봤자 열댓 평 정도의 허름한 서점 같은 곳이지만)을 만들어서 초능력과 뉴에이지, 동양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쯤 그레이스가 나타났던 것이다. 미래에서 책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여자 말이다.
“왜, 그 책을 쓸 사람이 동양에서 건너온 신출내기 소설가인 거지? 나는 이미 그 책을 쓰고 있었다고. 왜 내가 아닌 거야? 이상하지 않아? 내가 쓴 거 읽어 봤지? 절대로 너 따위가 쓸 수 없는 내용 아니야? 왜 나는 북원더러가 될 수 없는 거지?”
그의 의자가 앞뒤로 흔들렸다.
“어이, 진정하라고. 나는 그런 소설 따위는 쓰고 싶지 않으니까, 당신이 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그러나 서점을 태우는 짓은 너무하잖아. 자기가 쓴 원고를 끼워 놓는 이유는 또 뭐야? 내가 쓴 원고 봤지? 책의 반이나 썼어. 이제 한 자씩 지워 볼까 해.”
“너도 미쳐가고 있구나.”
꽈당 하고,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애써 발길질을 해 보지만 허사였다.
“누가 정말 미쳤는지는 두고 봐야지.”
나는 워드프로세서에서 Delete키를 하나씩 누른다. 화면에 가득 찬 것은 나의 소설이다. 아니, 글이다. 아니, 이런 것도 글이라고 할 수 있나? 원고지 500매로 가득 채운 ‘z’ 문자의 연속이다.
‘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
쓰기도, 지우기도 쉽다.
“나는 이제 뉴욕이 지긋지긋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너무 많은 것들이 도시에 몰려 있어서 뭔가를 꼭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영원히 찾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당신처럼 30년을 그냥 허비할 수 없어.”
뉴욕 최대의 어린이 책 전문 서점 - Books of Wonder
쇼윈도부터 카드 보드지로 만든 해바라기와 풀밭, 태양과 물뿌리개, 그리고 풀밭 아래로 놓여진 동화책이 눈에 띈다. 게다가 케익샵이 서점 안에 있으니 어린이를 자연스레 유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부는 100평이 넘을 정도로 넓고 깨끗하며 천정도 높아서 시원하다. 서가가 그리 높지 않은 것은 이곳이 어린이를 배려한 곳임을 알 수 있다.
| 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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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 오브 원더는 뉴욕 최대의 어린이 전문 서점이다. 주로 미취학 전까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을 판다. 뿐만 아니라 외국어로 된 어린이책(주로 스패니쉬), 어린이 사전과 지도, 논픽션 및 십대 독자를 위한 소설까지 총 망라한다. 1981년 전 세계의 북페어를 돌아다니며 아동문학 책을 수집해온 피터 글래스만이 이 서점을 열었고, 현재까지 뉴욕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아동서점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곳은 새로운 동화책뿐만이 아니라 중고 및 희귀본, 절판본 도서도 취급한다. 특히 서점은 오즈(Oz) 섹션을 마련해서
『오즈의 마법사』와 관련된 다양한 책을 한 서가를 할애해서 보여준다. 책뿐만 아니라 수집용 머그잔, 게임, 퍼즐과 핀 등도 마련되어 있다. L.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는 씌어진 지 90년이 넘은 미국 전통 아동문학의 선두적인 작품으로 다양한 판본과 시리즈가 나왔다. 그래서 이 책의 섹션이 뉴욕의 대표적인 아동 서점에 있다는 게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 일러스트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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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안쪽 한편에 마련된 갤러리에는 동화책 일러스트를 전시하고 있어서 둘러보기에 좋다. 장자끄 상뻬의
『꼬마 니콜라』를 프로모션 하는 보드와 섹션이 인상적이다. 천정도 넓어서 시원하고, 크기도 대형 서점의 어린이 책 코너와 맞먹는 수준이다. 여기서 동화책
『올리비아(Olivia)』를 골랐다. 꼬마 돼지 아가씨의 뉴욕 이야기를 읽어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조카가 문득 생각이 났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하루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면 영원히 서점을 방랑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점 안에 있는 케이크 전문점(이건 어린이들에게 너무 심한 유혹이다)에서 오랜만에 당분을 양껏 흡수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동화책을 읽었다.
책을 계산하면서 점원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다른 어린이 서점이 있나요?”
“글쎄요…… 이곳이 제일 크긴 하지만 어퍼 이스트에 북베리가 있고, 컬럼비아 대학 근처에 레프트 뱅크 서점도 있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계산을 마치고 북베리 서점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어린이들을 위한 비밀의 방 - 북베리즈(Bookberries)
번잡한 렉싱턴 가에서 슬쩍 지나가버릴 수도 있는 서점이다. 아담한 동네 서점의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계단 몇 개를 올라 약간 높이 올라갈 수 있다. 일반적인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주목받는 책들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서점엔 어린이들을 위한 비밀의 방이 있다. 벽을 쳐 놓아 살짝 지나칠 수도 있는데 서점 안쪽으로 주욱 들어가면 동화책과 인형, 팝업 북 등을 진열해 놓은 코너가 있는 것이다.
내가 서점에 들어갔을 때엔 퇴근 시간이라 어린이 손님은 별로 없었다. 무뚝뚝하게 보이는 두 명의 점원은(사실은 주인일 수도 있으나 물어보지 못했다) 뭔가를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새로운 책들이 들어오는 날이라 컴퓨터에 입력해야 했을지도, 그 주의 매출을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이 바쁜 틈을 타서 살짝 어린이 서가로 들어가 보았다. 아담한 것이 딱 내 취향이었다. 요즘 동화책은 그림의 수준이 너무 뛰어나서 갖고 싶은 것들이 많다.
『신데렐라 팝업 북』을 열어보니 호박마차가 입체로 펴지는 요술을 부렸다. 오른쪽을 보니 작은 문이 보인다. 안은 어둡다. 왠지 들어가고 싶어진다.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옷장처럼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일까?
“저기, 그곳은 창고라서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됩니다.”
무뚝뚝한 직원1이 큰 소리로 말한다. 무뚝뚝한 직원2는 책망하는 눈길로 나를 노려본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어린이 서가를 빠져 나왔다. 그냥 나오면 혼이라도 날 것 같아서 신데렐라 팝업북을 계산했다. 두께가 웬만한 백과사전처럼 두꺼웠다. 조카를 주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주기 직전까지는 물론 내가 갖고 놀아야겠지.
| Bookberries 983 Lexington A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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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에 동화책을 두 권 담으니 묵직해졌다. 할렘으로 돌아가려다 나는 미드 타운에 있는 진저맨(Gingerman)으로 바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겼다. 이제, 맥주 마실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집으로 가져갈 책은 쌓여만 가고, 나는 ‘z’로 가득 채워진 이상한 원고만 달랑 하나 들고 간다. 이 모든 것이 쓸모없는 짓이었을까?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