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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무엇이 우리를 영원히 젊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가상의 열정에 관한 자서전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나에게는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자서전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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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 아니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 어느 날, 나는 열 손가락의 손톱 밑에 검은 때가 잔뜩 낀, 흰옷을 입은 마른 인도 남자가 타준 단맛이 강한 인도차를 마시고, 빈민가의 통통하고 발랄한 소녀가 그려준 칼리 여신의 헤나로 보란 듯이 팔뚝을 무장한 채, 헐렁한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어스름 빛 아래 타지마할 호텔 앞 교차로에 서 있었다. 금시계, 담배, 대마초를 차례차례 권하는, 검고 탐욕스러운 얼굴의 뚱뚱한 행상을 뿌리치고 이슬람교도와 시크교도와 꽃을 꽂은, 큰 눈을 가진 네거리의 소와 자동차의 경적과 총천연색 사리의 물결 속에서 파파야와 매연과 녹슨 철문과 시궁창의 냄새가 뒤섞인 거리의 냄새를 폐 속 깊숙이 들이마실 때 야릇한 슬픔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젊고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가르마를 반듯하게 탄, 흰옷 입은 남자들의 머리 냄새와 아이 손을 잡아채고 걷는 열대 여인들의 화장품 냄새, 겨자와 카레 냄새, 묘한 허브 냄새, 양고기 타는 냄새, 거리에서 밤을 새운 환자 냄새 속에서, 서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나는 거리의 탐욕스러운 수집가가 되는 것 말고는 소망할 게 별로 없어져 버렸다. 나중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1장을 읽게 될 때 그날의 그 감정이 아주 뚜렷하게 살아났다. 그 감정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품안에서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 순간을 희망 없이 사랑했단 것이다.

장미향이 가득한 여름 바람 부는 정원이 딸린 화실에서, 푸른 연기가 흘러나오는 담배를 입에 문 헨리 경은 친구 화가인 바질 홀워드가 그린 아름다운 초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특별히 뛰어난 작품인 초상화의 주인공 이름이 도리언 그레이란 것을 알게 된다. 바질 홀워드는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이 일생에서 극도로 위험한 순간에 처했다고 뭔가 속삭여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헨리에게 고백한다. 운명이 그를 위해 최상의 기쁨과 최상의 슬픔을 예비해 놓은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인데, 느낌이야 어쨌든 그는 이제 도리언 그레이를 매일 보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도 그리스 조각상처럼 놀라운 피조물인 도리언 그레이를 보게 된다. 헨리는 도리언에게 젊음이란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중 하나이며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당신은 어디를 가든 세상을 매료시킬 수 있을 것이고, 아름다움이야말로 재능의 한 형태이며 젊음의 아름다움 속에 통치자의 신성한 권리가 담겨 있다고 말해준다.

그는,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움은 피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사람의 사고만큼 피상적이지 않고 사람의 외양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천박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정한 수수께끼는 바로 눈에 보이는 것 속에 있으니까. 그는 계속해서 ‘젊은 시절에 젊음을 만끽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쾌락주의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바람이며, 당신은 바로 그 쾌락주의의 가시적인 상징이 될 수 있고, 세상은 한동안 당신에게 속할 것이니 당신이 인생을 허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며, 그것이 그런 이유는 젊음이 지속될 시간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한다.

헨리의 그 말은 도리언 그레이를 크게 동요시킨다. ‘젊음, 젊음, 젊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오.’라는 헨리의 말을 가슴에 담은 도리언은 자신의 삶이 갑자기 아주 부산하게 맹렬한 색채를 띠게 되는 걸 느낀다. 그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놓은 그림을 우두커니 서서 응시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언젠가는 저 얼굴이 주름져서 쭈글쭈글해지고 눈이 침침해지고 입술의 진홍빛이 사라지고 인생이 육체를 망쳐놓는 날이 오겠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 6월의 특별하게 젊은 날은 다시는 오지 않겠지. 만약 다른 수가 있다면, 내가 언제나 젊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난 뭐든지 바칠 텐데, 그럼 그것을 위해 세상에 내가 바치지 못할 게 뭐가 있을까? 내 영혼이라도 기꺼이 내줄 거야.”

그는 소멸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진 모든 것을 질투하고 자신을 그린 초상화까지도 질투해 이렇게 말한다.

  “어째서 내가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속에 담겨 있죠? 매 순간이 지날 때마다 내가 빼앗기는 그 어떤 것이 저 그림 속에 담겨 있을 텐데. 만약 저 그림이 변하고 내가 항상 지금과 같을 수만 있다면.”

도리언 그레이는 인생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충동에 빠졌다. 그는 공원에서 빈둥거릴 때나 광장을 지나갈 때도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도대체 그들은 어떤 부류의 삶을 사는지 왕성한 호기심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어느 날 저녁 7시에 도리언 그레이는 모험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기괴한 회색 도시 런던에 나를 위해 기다리는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는 길을 나섰다가 이내 광장에서 길을 잃게 된다.

그리고 그는 대략 8시 30분쯤에 거대한 가스등 불꽃이 치솟고 현란한 광고 전단을 갖춘 황당하리만치 작은 극장 앞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지저분한 셔츠 한가운데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박은 옷을 입고 싸구려 시가를 피우고 있는 유대인을 만나게 된다. 그 유대인은 셰익스피어의 애호가인데 마침 그날 공연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그는 유대인의 권유로 연극을 보게 된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중년의 로미오에 이어 등장한 것은 꽃다운 조그만 얼굴에 보랏빛 우물 같은 눈동잘 가진 아름다운 소녀 줄리엣이었다. 도리언 그레이는 여태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녀가 열일곱 살 난 시빌 베인이란 이름을 가진 배우란 걸 알게 된다. 그는 헨리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매일 밤 그녀를 보러 갔어요. 그녀는 어느 날 저녁에 로자린드였다가 다음날 저녁에는 이모겐이었어요. 난 으슥한 이탈리아의 무덤에서 죽어가는 그녀를 보았어요, 연인의 입술에서 독을 빨아들이고서 말이죠. 그녀가 남자용 반바지와 허리가 잘록한 상의, 우아한 모자 차림의 예쁘장한 소년으로 변장하고서 아덴의 숲 속을 헤매는 것도 보았죠. 그녀는 실성한 채로 죄 많은 왕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서는 루파풀을 걸치라고 주고 쓰디쓴 약초를 맛봤죠. 그녀는 순결한 여인으로 나와 질투심에 가득 찬 검은 손에 가느다란 목을 졸리고 말아요.”

평범한 여성이라면 사람의 상상을 절대 끌어내지 못하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신비감이 있고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야말로 삶의 진정한 비밀이라고 도리언 그레이는 생각한다. 가난하고 순진한 여배우였던 시빌 베인 역시 즉각 도리언 그레이에게 매료되어 그를 매력적인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어느 날 밤 둘은 입맞춤을 나누고 은밀히 약혼한다.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와 바질 홀워드를 초대해 그녀의 연극을 감상하게 하는데 놀랍게도 그날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 볼썽사나워서 관중들은 그녀를 향해 야유를 퍼붓는다. 그녀는 파랗게 질린 도리언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리언, 도리언, 당신을 알기 전까지 내 삶에서 연기는 유일한 현실이었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타났어요. 당신은 진정한 현실이 어떤 것인지 내게 가르쳐주었어요. 오늘 밤 난 처음으로 로미오가 늙고 추한 데다가 화장을 한 것을 의식했어요. 과수원을 비추는 달빛은 속임수고 대사는 비현실적이고 내 말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내게 진정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해주었어요. 난 사람들이 야유를 할 때 비웃었어요. 그들이 우리의 사랑에 대해 뭘 알겠어요?”

그러나 사랑했던 여인의 들뜬 고백에 도리언은 이렇게 응수한다.

  “당신은 내 사랑을 죽여버렸어. 당신은 내 삶의 낭만을 망쳐버렸어. 당신에게 예술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세상이 당신을 숭배하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당신은 뭐지? 예쁘장한 얼굴의 삼류 배우일 뿐이라고.”

이 부분은 위고가 로지타에게 한 말, “이상을 잃는다면 너도 추악한 여자가 될 테지!”라고 했던 바로 그 말을 생각나게 한다. 이제 그녀의 눈물은 그에게 과장된 신파로만 느껴졌고 붙잡고 매달리는 애원하는 손길은 그를 짜증나게만 했다. 그녀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오랫동안 밤거리를 서성이던 그는 새벽이 가까워서야 마차를 타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그 시간에 시빌 베인은 자살해 버린다. 아직 그녀의 자살을 모르는 도리언 그레이는 자기 집 문손잡이를 돌리다가 무심코 바질 홀워드가 그려준 초상화를 보게 되는데, 그때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크림색의 비단 블라인드 사이로 스며들어 온 희미한 빛 속에서 초상화의 얼굴은 약간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표정이 달랐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깃들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돌아서서 창가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걷었다. 환한 새벽빛이 방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맹렬한 햇살은 그가 어떤 끔찍한 일을 행한 뒤 거울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초상화의 입가에 잔인한 주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움찔한 도리언 그레이는 큐피드 문양이 틀로 새겨진 타원형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았다. 거울 속 붉은 입술엔 주름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젊음을 간직하고 초상화가 대신 늙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소원을 말했던 걸 떠올렸다. 그는 그 순간 그림은 이미 변했고 계속 변할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즉 그의 초상화는 그의 치욕의 무게를 짊어지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격정적인 기쁨과 격정적인 죄악, 즉 모든 것들을 얻기로 결정되어 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몹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인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괴상한 것이라 해도 과연 언제나 젊음을 유지할 기회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이제 초상화는 그에게 최고의 마법거울이 된 셈인데 그 거울은 그의 영혼을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영원토록 안전할 것이다. 어떤 겨울에도 그는 전율하며 봄을 만끽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그에게 남은 일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자기 인생의 관객이 되는 것, 그래서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도리언은 며칠 뒤 그림을 자신이 소년 시절을 보냈던, 한동안 버려졌던 집안의 은밀한 방에 숨겨 둔다. 그리고 그 뒤로 도리언에 관한 난잡한 소문들이 런던 여기저기서 슬금슬금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마주한 사람들은 그 소문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그의 얼굴은 그만큼 청순했고 결백했고 세상의 모든 추악함과 의심을 아름다움으로 꾸짖는 듯했다. 그는 비밀스러운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면 홀로 오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점점 반했고 사악하게 늙어가는 초상화에 드러나는 영혼의 타락에도 점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가 누리는 쾌락주의의 목표는 경험 그 자체이지, 그 맛이 달든 쓰든 경험에서 열매를 얻는 것이 목표가 되진 않았다. 그는 생소한 것들의 영향력에 자신을 기꺼이 내맡겼고 그 다음에는 한때 빠져들었던 것들에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해엔 향기와 그 제조법에 몰두해 신비로운 기분이 들게 하는 유향, 열정을 자극하는 용연향, 불 꺼진 낭만의 기억을 되살리는 제비꽃, 두뇌를 혼란시키는 사향, 사람을 미치게 하는 호베니아, 영혼에서 우울한 기분을 몰아낼 수 있다고들 전해지는 알로에의 영향력을 파악하려 애썼고, 또 어느 해엔 음악에 몰두해 터번을 두른 인도인들이 주홍색 깔개 위에 앉아 코브라나 독사를 갈대 피리로 불러내는 시늉을 하거나 멸망한 민족의 무덤에서나 구할 수 있는 기이한 악기를 수집했다.

젊은이들조차 단식과 수련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었다는 리오네그르 인디언의 신비로운 악기인 주르파리스, 온종일 높은 나무에 앉아 있는 파수꾼이 분다는 아마존 부족의 튜레 같은 것들이 그의 수집품들 속에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지겨워지자 이번에는 보석에 빠졌다. 그래서 어느 가장무도회에는 진주 560개로 뒤덮인 의상을 입은 프랑스 제독 안 드 주아에즈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그 등에 둥근 모양의 진짜 에메랄드가 자라는 뱀이 있다는 이야기나 교황 요한의 궁전 박공 지붕은 석류석 두 개를 끼운 황금 사과 두 개가 있어서 낮에는 황금이 빛나고 밤이면 석류석이 빛난다는 이야기, 시체의 입에 장밋빛 진주를 던져 넣는 주민들을 봤다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영국의 찰스 왕이 42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탄 이야기 등을 수집했다.

그 뒤 그의 관심은 자수품과 북유럽의 벽걸이 융단으로 옮겨갔다. 그는 아름답고 훌륭한 사물들에 시간이 가져다주는 파멸에 대해 슬퍼했고, 자신은 파멸을 면했음에 안도했다. 그는 네로 황제가 드리웠던 거대한 천막과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드리워진 거인족의 보랏빛 돛과 향연에 필요한 모든 산해진미를 드러내 보이는 식탁용 냅킨을 어떻게 해서든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오를레앙의 샤를의 ‘부인이여, 저는 기쁨에 넘칠 뿐’으로 시작하는 가사가 옷소매에 수놓아져 있고, 그 가사에 곡을 붙인 악보가 금실로 꿰매져 있으며, 당시 사각형이던 각각의 악보가 네 개의 진주로 꾸며져 있던 웃옷과, 카트린 드 메디치같이 세상 모든 진기한 여왕들의 침실 휘장, 침대 다리의 양각 무늬 등을 보고 싶어 했다. 이렇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은 망각을 위한 수단이었고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한기 같은 공포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것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11장이다.

언제나 수집가에게 넋을 잃고 마음을 빼앗기는 나는 이 장면에서 몇 번이나 멈칫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다시 읽게 되는데, 읽을 때마다 또 다른 수집가였던 발터 벤야민이 생각난다. 발터 벤야민은 어느 글에서 선원들의 쇼핑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과연 이번에 혹은 다음번에 육지에 가게 될지 말지 모르는 선원들은 배가 막 입항 절차를 마치고 닻을 내리자마자 기념품, 목걸이, 그림엽서, 칼,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품 등을 들고 배 위로 올라탄 상인들에게서 조잡하고 판에 박힌 물건들을 사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선원들에게 도시는 방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쇼핑의 대상이고, 선원들의 가방에는 홍콩에서 구입한 가죽 혁대나 낯선 도시의 성모상, 장식용 나이프 등이 아무런 체계 없이 과장된 풍경 사진들과 나란히 놓여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집품이 아니라 선원 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드넓게 펼쳐진 바다 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내 식대로 이 이야기를 해석해 보자면, 선원들이 주저주저 소금기 밴 돈을 상인의 두툼한 손에 내미는 이유는 가보지 못한 도시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니라 명확하게 그들의 삶이 바다에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의 기념품은 그들의 소속, 즉 오로지 바다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향수와 보석과 테피스트리, 자수품 같은 사물에 빠져드는 도리언 그레이는 런던의 호사스러운 저택 한가운데 안락의자에 있으면서 무엇을 기념했던가? 안타깝게도 그, 개인에게는 기념할 게 없었다. 기념했다면 그건 한 개인이 아니라 소멸을 피해 차라리 젊음과 아름다움의 제물이 되기를 갈망해 온 인류 전체였다. 그는 희망 없이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 없이 희망했다. 매 순간을 생생하게 즐기려던 그는 6월의 햇살 아래 ‘내가 젊고 저 그림이 나이 들었으면…….’ 하고 소원을 비는 순간, 매 순간의 경이로움을 놓쳐버렸다. 그는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는 대신 영원 속에서 조각 조각난 순간들만을 보게 되었다.

이제 갖가지 추악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어 가던, 그의 서른여덟 살 생일 하루 전날. 그 초상화 앞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얼마 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은 그 그림의 모델이었단 걸 후회한다고 말한다. 이제 세상 모든 기도의 후렴구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가 아니고 ‘우리의 불의를 당장 벌하여 주시옵소서’로 바뀌는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도리언 그레이는 생각하기에 이르는데, 진정으로 새 삶을 살기를 원했던 도리언 그레이는 살인을 했던 칼을 들고 자신의 초상화 앞에 선다. 그날 밤 길고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런던 거리에 울려 퍼진다. 누구의 비명이었던가? 그림 혹은 그? 그 전 어느 밤, 도리언 그레이의 젊음의 비밀을 아무것도 모르는 헨리 경은 도리언 그레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네가 한때 사랑했으며 미묘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특정한 향기, 우연히 다시 마주친 잊었던 시의 한 구절…… 그런 것들에 우리의 삶이 달려 있는 게 아닐까?”

도리언 그레이가 이 말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음에 도리안 그레이의 지극한 슬픔이 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위대한 자서전이다. 그 자서전의 주제는 출생과 각종 질병, 노화, 불의의 사고, 죽음 같은 신체적 사건이 아니라 진짜로는 결코 삶과 맞닿은 적이 없는 열정과 고독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즉 ‘삶 속에서 열정과 고독이 생겨나나? 열정과 고독 속에서 삶이 생겨나나?’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도전적인 자서전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이해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했으니 나는 행여라도 그를 이해하는 척의 실수를 해서 감히 그를 무덤에서라도 분노하게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의 슬픔은 확실히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세상을 속이고 싶어 하지만 먼저 속는 것은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우리가 파괴되어가는 것을 떨면서 느끼면서도, 풀어야 할 수수께끼나 비밀 같은 것이 우리 삶에 명백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모두 자기 인생의 주연도 조연도 관객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짊어질 고통을 창조하는 것도, 고통을 벗어나는 것도, 고통을 즐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도리언 그레이의 이야길 듣고 우리 대신 누군가 살아주는 걸 차라리 거부하겠다고 선언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기다림은 남는다. 정말로 우리가 영원히 젊고 아름다울 기회란 내 앞에 없는 것일까? 다른 모든 기회들처럼 기다리지 않는 순간에만 찾아올 것인가?

마냥 영원히 젊을 수는 없는 우리에게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자서전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루 곰곰이 생각하면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자서전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살아본 삶 더하기 살아보지 못한 삶’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리고 살아보지 못한 삶이 더 강하게, 더 젊은 모습으로 우리를 지상에 묶어두는 건지도 모르니까. 아니, 언제나 나를 더 젊게 하는 것은 확실히, 오히려 살아보지 못한 삶이다. 그러므로 낯익은 것보다 낯선 것이, 만족보다 불만족, 표현된 것보다 표현되지 않은 것이 우리를 더 젊게 한다. 가슴속에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나만의 한 점 불빛을 언제고 켜두는 것, 그것이 우리를 저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사히 지켜줄 수 있기만을 바란다.

아가씨는 오늘 밤 요술사 노릇, 천사들 그녀에게 꿈을 주도록, 허나 웃게 하오. 슬픔은 많기도 하니


이 글을 쓰는 내내 멜로디 하나가 입술과 눈동자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그게 뭘까 하룻밤을 꼬박 새고서야 생각해냈는데 바로 <어둠 속의 댄서>에서 시력을 잃어가던 비욕이 부르던 이 노래 「my favorite things」이다.

장미의 빗방울, 고양이 콧수염
밝은 구릿빛 주전자, 따뜻한 양털 장갑
노끈으로 묶은 선물상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

크림빛 망아지, 바삭바삭한 사과 파이
초인종소리, 썰매 방울소리, 국수랑 함께 먹는 슈니첼
달밤에 나는 기러기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야

푸른 비단 머리띠를 한 하얀 드레스의 소녀들,
내 눈썹과 코에 내려 앉은 눈송이,
봄빛에 녹아내리는 은색 겨울,
……


오스카 와일드는 ‘표피 아래로 내려가려는 자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이 글의 서문에서 썼다. 나는 이 말 때문에 어느 날 오스카 와일드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고유하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의 불빛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위험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무릅써야 하는가? 어떤 위험이 유일하게 무릅쓸 가치가 있는가?

어느 날 마음속에서 하나의 화살이 흔들리고 그 화살이 과녁도 없이 영원히 날아가기 시작할 때, 바로 그 날부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언제나 까마득히 젊고 순수한 도리언 그레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경구와 역설의 천재 오스카 와일드가 창조해낸 걸출한 냉소주의자 헨리 경의 매력을 놓치지 말란 말을 꼭 하고 싶다. 헨리 경이 던져주는 생각할 거리는 지금 잠깐 손으로 꼽아 봐도 일곱 가지 정도가 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 한 가지는 이런 것이다. 헨리 경은 어느 날 도리언 그레이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결혼하면 사람은 이타적이 되는데 이타적인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개별성의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이기적인 속성을 유지하려는 사람이 결혼하게 되면 이기적인 자신에다가 하나의 또 다른 타자의 삶을 덧붙이게 되는 것이므로 그는 반드시 하나 이상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내 상상 속에서 우주와 지구는 그 수가 무한히 늘어나는 방을 가진 호텔인데, 그 이유는 그 방에 투숙하는 자가 모두 고유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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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 독자들이 선택한 『돈의 속성』이 어린이들을 위한 경제 금융 동화로 돌아왔다. 돈의 기본적인 ‘쓰임’과 ‘역할’부터 책상 서랍 정리하기, 용돈 기입장 쓰기까지, 어린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다.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야

저마다 삶의 궤적이 조금씩 다르지만 인간은 비슷한 생애 주기를 거친다. 미숙한 유아동기와 질풍노동의 청년기를 거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늙어간다. 이를 관장하는 건 호르몬. 이 책은 시기별 중요한 호르몬을 설명하고 비만과 우울, 노화에 맞서는 법도 함께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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