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었을 때 느끼는 행복과 안정된 기분을 글을 쓰면서도 느낀다.
스프가 나왔어요. 평범한 육즙 스프였어요. 안에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투명한 액체를 통해 접시 바닥에 있을지 모르는 무늬를 볼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무늬는 없었어요. 접시는 수수했어요. 이어서 쇠고기와 야채, 그리고 감자와 함께 나왔지요. 이 검소한 삼위일체는 질퍽한 시장에 있는 소의 궁둥이와 가장자리가 노랗게 오그라진 싹양배추, 그리고 월요일 아침에 값을 깎으며 흥정하는 망태기를 걸친 아낙네들을 생각나게 했어요. 제공된 음식은 충분했고, 탄광 광부들은 확실히 이보다 못한 음식 앞에 앉아있을 터이니, 인간의 일용할 양식에 대해 불평할 이유는 없었어요. 말린 자두와 커스터드가 나왔어요. 커스터드로 기분이 좀 풀렸더라도, 말린 자두는 무정한 야채(과일이 아녜요)이며, 수전노의 심장처럼 힘줄이 많고, 80년 동안 와인과 안락함을 거부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도 나누어주지 않았던 구두쇠의 혈관 속에나 흐를 법한 액체를 배출한다고 누군가 투덜거린다면 세상에는 말린 자두조차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되새겨보아야만 해요. 다음에는 비스킷과 치즈가 나왔고, 물병을 아낌없이 쭉 돌렸어요. 비스킷이란 게 원래 건조한 것이지만 이 비스킷들은 속까지 별나게 팍팍했기 때문이지요. 그게 다였어요. 식사는 끝났어요. 손님이나 방문객이 “저녁식사가 영 별로였어요.”라고 말한다거나 “우리끼리만 여기에서 식사할 수 없었을까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 비슷한 말을 했더라면 낯선 사람에게는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그럴듯한 집의 내밀한 경제 사정을 염탐한 셈이 되었을 거예요. 아뇨,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어요. 실제로 대화는 잠시 시들해졌지요. 인간이라는 존재의 틀은 본시 마음과 몸, 두뇌가 모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지 분리된 칸막이 안에 제각각 들어가 있는 것이 아녜요. 그건 백만 년이 지난다 해도 확실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양질의 저녁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예요. 식사를 잘 하지 않으면 생각도, 사랑도 잘 할 수 없으며 잠도 잘 들지 못해요. 소고기와 말린 자두로는 척추 속에 있는 등불이 켜지지 않아요.
소설이 아닌 강연집을 정리한 에세이 『자기만의 방』. 여성의 자유ㅡ몸의 자유보다 지적인 자유ㅡ에 대해 그녀 이전의 여류작가였던 브론테 자매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 이야기와 위에서 인용한 남녀대학 오찬 메뉴의 차이점 등, 독특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여성들이 지적인 자유를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열쇠인 금전적인 자유(고정적인 수입)와, 혼자서 생각의 범위를 넓혀갈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읽어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이 책이 나온 뒤에 흐른 80년의 세월 동안 우리가 과연 그녀의 시대보다 더 성장했는지 반성하게 만든다. 자기만의 방에 대한 언급 이외에도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여류작가가 글로써 자신의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뤄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의식의 흐름대로 천천히 이야기해주고 있다. 강연회라고는 하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는 모양새가 강연 원고라고 하기보다는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글이다.
자기만의 방과 척추에 불을 켜주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27년 전의 나의 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나만의 방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틈만 나면 올라갔던 이층의 큰 방엔 여고 시절 철학교수와 국어선생님을 꿈꾸던 두 고모의 책들과, 엄마가 할부외판원에게 사주신 학습만화들과 세계명작들이 함께 불규칙적으로 섞여 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오래된 LP들, 내겐 조금 높아서 의자 위에 방석을 여러 개 겹치고 앉아야 했던 원목책상과 다루기 힘들어서 아빠에게 늘 틀어달라고 졸랐던, 옛날 라디오프로그램들을 녹음한 릴 테이프들. 옛날에 지어진 일본식 집이라 늘 방바닥에 냉기가 흘렀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실 때까지, 틀어박혀 얼른 숙제를 하고 문주란이나 샘 쿡, 비틀즈의 LP를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원효로 1가 구석은 놀이터 하나 없는 삭막한 곳이었다. 80년대 초 윤노파 살인사건이 일어난 그 골목이었고 출판사와 인쇄소, 철근을 자르는 공장들이 늘어서 있어 늘 시끄럽고 아이들이 놀 만한 놀이터 한 군데 없었던 곳. 가끔 철문을 잠근 출판사의 옆 담에 매달려 무슨 책이 나오나 구경하려다 아저씨에게 야단맞기도 하고 다른 인쇄소에서 제본하고 남은 두꺼운 파지들을 받아다가 가는 허리에, 눈에는 각종 도형들이 들어가 있고 가는 허리 밑으로는 드레스가 거의 180도로 펴지는 공주들을 그려 잘라 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낮고 넓었던 창틀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책을 읽었다. 놀 곳이 없었다는 것을 핑계 삼아 그때부터 나는 혼자 시간 보내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배운 셈이다.
열 살쯤이던가, 장맛비가 연달아 퍼붓던 초여름 그 날도 그랬다. 살짝 어둡지만 책은 읽을 만했던 오후, 낡은 책장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버지니아의 책. 살짝 젖은 걸레로 먼지를 닦아내고 늘 그랬듯 창틀에 자리를 잡았다. 고모들은 항상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펜으로 줄을 그어놓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날 펼친 그 책에도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었다. 밑줄이 특히 많이 쳐져 있던 책은 특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뭔지 모르게 멋있다고 생각했던 글들이었다고 기억되는데, 특히 루이제 린저, 전혜린, 프랑소와즈 사강, 이덕희의 책들에는 두세 번씩 그은 밑줄들이 가득했다.
지금도 집중하지 않으면 난해하게 느껴지는 『자기만의 방』을 어린이였던 내가 제대로 이해했을 리 없다. 단지 밑줄을 그어놓은 부분을 중심으로 읽어 내려가는 내 눈에 띈 부분은 잘 먹지 않으면 다 잘 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쇠고기와 말린 자두로는 척추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는 것.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내 척추와 머리에 불이 켜졌다. ‘어떤 좋은 것’을 위해서는 척추에 불이 켜져야 한다는 것. 그때 보았던 그 한 구절이 평생 내 삶에 있어 어떤 주문 내지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줄 줄은 미처 몰랐다.
버지니아 울프와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함께 세월이 꽤 지난 지금은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 사촌조카들을 잘 대접하고 싶다는 핑계로 한창 식사 준비에 바쁜 메이드에게, 쪄서 시럽에 절인 생강을 사오라며 리치몬드에서 런던 가는 기차 시간표를 무표정하게 읊던 영화 속 니콜 키드먼의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생강케이크를 구울 때나 스콘에 따듯한 생강 마멀레이드를 곁들일 때는 더더욱. 더불어 그녀 언니와 함께 이끈 지식인 클럽인 블룸즈버리Bloomsbury, 런던에 머물던 시절 대영박물관을 갈 때마다 스쳤던 러셀 스퀘어와 블룸즈버리 스퀘어가 있는 블룸즈버리 구역, 피카딜리의 포트넘 앤 메이슨에 진열되어 있었던 화려한 블룸즈버리 햄퍼Hamper도 더불어 생각난다. 절인 생강과 당밀, 각종 향신료 향이 풍기는 절임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는 포트넘스의 풍경보다 더 영국적인 게 또 있을까?
생강과 버지니아 울프. 강한 힘과 열기를 갖고 있는 생강과 지적인 힘과 척추에 불을 붙여줄 무엇인가를 항상 원했던 버지니아. 당대의 지식인들과, 친구들과 집과 공원에서 차 또는 피크닉 음식을 앞에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을 그녀의 애프터눈 티 테이블에도 포트넘에서 산 과자나 절인 생강, 좋은 품질의 홍차가 올려졌을까? 아니면 아침에 먹고 남은 굳은 빵 한쪽을 홍차에 곁들이는 가난한 지식인이었을까? 가난했다 하더라도 그녀가 글로써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비평과 앞서가는 생각들을 보면 음식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좋은 취향을 갖고 있었을 것 같다.
영화에서 우울하게 잠도 잘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담배만 연신 피워대는 장면을 보며, 항상 달콤한 생강을 차와 함께 곁들일 줄 아는 그녀가 왜 그렇게 우울해하고 고통스러웠을까, 궁금했다. 스스로가 다시 미쳐간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외투 주머니에 돌을 가득 넣고 강으로 들어가버린 그녀는 정말 그 어떤 것으로도 위안받고 치료받을 수 없었던 걸까? 달콤한 음식도, 통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도, 헌신적으로 옆에 있어주는 남편조차 왜 그녀에게 불을 붙여줄 수 없었을까?
하지만 그녀 덕분에 지금까지 난, 내 척추에 불이 켜지는 순간들을 위해 살아왔다. 그때 버지니아의 글 한 구절을 읽었을 때 막연하게 느꼈던 척추의 열기, 그런 느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고, 직업을 택하고, 결정들을 내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먹고 있는 음식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불을 켜줄 수 있는 존재인지 끊임없이 의심을 가지고 질문했다. 항상 뜨겁고 싶었기에 불이 꺼져가는 기운이 느껴지면 주저하지 않고 뭐든지 찾아 몰두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춤을 추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떠났다. 그래서일까, 끝내 불을 다 피우지 못하고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를 생각하면 더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미안해진다.
요리를 만들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늦은 밤 부엌 테이블 위에 작은 스탠드를 켜고 어린 시절 창틀에 앉았을 때처럼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때 만났던 버지니아를 다시 불러낸다. 그녀를 정말로 만나게 되면 설탕에 절인 생강을 넣은 마멀레이드를 곁들여 따듯한 스콘을 굽고, 그녀와 홍차를 마시고 싶다. 배가 고프다고 하면 로즈마리와 소금을 뿌려가며 쇠고기를 맛있게 굽고, 디저트로는 그녀가 끔직하게 생각하는 말린 자두를 와인 시럽에 충분히 졸여 부드러운 라이스 푸딩에 곁들여 주고 싶다. 잘 먹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
내가 꽤 자신 있게 끓일 수 있는 밀크 티 맛 어때요?
이 정도의 쇠고기 요리와 말린 자두 콩포트라면 당신의 척추에도 불이 켜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자기만의 방에 대한 글을 볼 때마다 뜨끔해진다고,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왔는데도 아직까지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독립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고. 욕심 없이 살면서 좋은 글만 쓰고 좋은 글만 보고 사람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에는 헤쳐 나가야만 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고. 왜 세상은 이토록 발전하고 없는 것이 없다는데, 왜 80년 전 당신이 ‘제발 이 둘만이라도’라고 바란 것조차 가지지 못한 건지. 정말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일까 투덜거리는 내게 그녀가 해주는 대답은 항상 똑같다.
우리가 또 한 세기를 산다면ㅡ개인으로써 살아가는 짧은 일생이 아니라 진정한 삶인 공동의 삶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ㅡ그리고 각자 연간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갖는다면, 자유의 습성과 생각하는 바를 정학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면, 공동의 거실에서 조금 벗어나 인간을 늘 서로와의 관계가 아닌 실재와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또한 하늘과 나무, 무엇이든지간에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시야를 가려서는 안 되기에 밀턴의 악령을 간과해 버린다면, 매달릴 팔은 없지만 홀로 가며 우리의 관계가 단지 남성과 여성의 세계만이 아니라 실재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때 기회는 올 것이며 셰익스피어의 누이였던 죽은 시인이 빈번하게 내던졌던 육체를 걸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요.
자유의 습성,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 이 두 가지야말로 자기만의 방과 경제적인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사실, 지구 어디더라도 자신의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라면 곧 자기만의 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난 깨닫고 있다. 그리고 내게는 그 어떤 방보다 부엌 테이블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라는 것도 또한 잘 알고 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었을 때 느끼는 행복과 안정된 기분을 글을 쓰면서도 느낀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그 막연한 희망으로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버지니아의 글을 보고 그랬었던 것처럼, 나의 글로 누군가의 척추에 불을 붙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올까?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아니, 이미 기회는 가까이 왔고, 내가 아름답게 키울 일만 남았다고 믿고 싶다.
Untitled Document
따듯한 요거트 스콘(Warm yogurt Scones)
재료
중력분 250g
베이킹 파우더 3 티스푼
소금 1/4 티스푼
차가운 버터 깍둑 썰기 해서 90g
플레인 요거트 200g
요리법
1.
중력분과 소금, 베이킹 파우더는 모두 섞어 한번 체쳐 놓는다. 오븐은 230도로 예열한다.
2.
잘게 썬 버터를 가루 재료 안에 넣고 손으로 비벼 더 잘게 부순다. 빵가루 같은 상태로 만들 것. 분쇄기가 있다면 가루재료와 버터를 넣고 갈아주면 된다.
3.
요거트를 넣고 잘 저어 대충 한 덩어리의 반죽으로 만든다. 되도록 손을 대지 말고 고무주걱이나 스패츌러로 작업할 것.
4.
반죽에 밀가루를 뿌려가며 조금 반죽하다가 밀대로 밀어 2cm두께, 5cm너비가 되도록 한 뒤 둥근 커터기로 자르거나 칼로 자른다. (골고루 부풀 수 있도록 두께가 고른지 신경 쓰며 밀어줄 것.)
5.
예열된 오븐 중간 단에 넣어 10분 정도 윗면이 갈색이 되도록 구워준다.
6.
잼이나 마멀레이드를 곁들여 따끈할 때 먹는다.
# 설탕에 절인 생강은(한약 먹을 때 먹는 편강하고는 완전히 다른 식 재료) 구하기가 힘들어 가끔 생강 향의 마멀레이드를 먹고 싶을 때는 생강차(가루 아님)를 오렌지 마멀레이드에 조금 섞어 먹는다. 날 생강을 으깨거나 채 썰어서 잼과 섞으면 잼이 금방 상하게 되므로 이미 만들어진 차를 섞는 것이 좋다.
차유진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손녀딸'이라는 닉네임으로 더 친숙하다. 이 닉네임의 기원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C통신이 처음 전파될 무렵 국내 치초로 생긴 무라카미 하루키 동호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그녀는 하루키의 소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 "분홍 옷을 즐겨 입고 요리를 잘하고 얼굴이 예쁘고 영리한 뚱뚱한 손녀딸"에서 자신의 닉네임을 따왔다.
경원대학교 섬..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여성 문학 비평의 정전(正典)이라 일컬어지며 페미니즘 문학을 논할 때는 늘 일순위로 손꼽히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화자가 뜬금없이 ‘자기만의 방’을 화두로 꺼내면서 시작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
『김미경의 마흔 수업』 김미경 저자의 신작.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절망과 공허함에 빠진 이들에게 스스로를 치유하는 말인 '딥마인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정한 행복과 삶의 해답을 찾기 위해,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는 자신만의 딥마인드 스위치를 켜는 방법을 진솔하게 담았다.
이창용 도슨트와 함께 엿보는 명화 속 사랑의 이야기. 이중섭, 클림트, 에곤 실레, 뭉크, 프리다 칼로 등 강렬한 사랑의 기억을 남긴 화가 7인의 작품을 통해 이들이 남긴 감정을 살펴본다. 화가의 생애와 숨겨진 뒷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현대적 해석은 작품 감상에 깊이를 더한다.
2024년은 필사하는 해였다. 전작 『더 나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에 이어 글쓰기 대가가 남긴 주옥같은 글을 실었다. 이번 편은 특히 표현력, 어휘력에 집중했다. 부록으로 문장에 품격을 더할 어휘 330을 실었으며, 사철제본으로 필사의 편리함을 더했다.
유쾌 발랄 슈뻘맨과 함께 국어 능력 레벨 업! 좌충우돌 웃음 가득한 일상 에피소드 속에 숨어 있는 어휘, 맞춤법, 사자성어, 속담 등을 찾으며 국어 지식을 배우는 학습 만화입니다. 숨은 국어 상식을 찾아 보는 정보 페이지와 국어 능력 시험을 통해 초등 국어를 재미있게 정복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