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을 알게 되었다>를 시작하며
여러분 안녕 안녕!
어떻게들 지내셨어요? 오늘은 비가 오네요. 남도의 들판이 술렁대는 소리가 들리네요. 저는 방송사 봄 개편으로 영화음악 프로그램과 재즈 프로그램을 맡아 무척 바빴고 그 사이에 소곤소곤 출렁출렁 대는 여행기도 한 권 쓰느라 눈이 침침해져서 ‘이제는 놀아야 할 때야.’라고 생각을 하고는 책을 탁 덮고 컴퓨터를 확 끄고 벚꽃을 가슴에 꽂고 막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 언니를 한 명 만나서 고기를 잔뜩 구워먹고 배를 두드리며 놀게 되었는데 그녀가 나에게 말하기를 “혜윤, 너 말버릇 중에 ‘나, 깨달았어.’ 그런 말투 있는 것 알고 있어?”라고 하더군요. 그 말 듣고는 “그래서 양질전환의 법칙은 인간적인 거야. 매일매일 깨닫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괜찮은 인간이 되는 날도 있지 않겠어?”라고 얼렁뚱땅 대답했지요.
그러고 보니 내가 최초로 뭔가 깨달았단 말을 써먹은 어린 시절 일이 생각나더군요. 아마 여덟 살 정도 되었을 때 일인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우리의 뽀빠이와 올리브 만화영화에서인데 늘 유혹당하는 올리브는 먹성 좋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뭐라고 구애를 하냐면 “당신의 머리카락은 스파게티 가락처럼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 사이는 베이컨과 계란 사이처럼 가까워요.” 이렇게 말하는 거죠.
그때 나는 마치 쿵푸팬더가 그러했듯 돈오돈수의 경지에 고고히 떠올랐습니다. ‘아! 사람은 진정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세상에 구애를 하는구나.’ ‘자기만의 표현법을 갖는 것이 바로 세상에 말을 거는 방식이겠구나!’ ‘결국 뭔가를 좋아해야만 다른 것도 열렬히 좋아할 수 있게 되는구나!’ 등등등. 그날 저는 여덟 살짜리의 눈높이로 백팔번뇌를 거의 다 해결했습니다. 다툼이 있다고? 그건 ‘치즈버거를 먹을래? 와퍼를 먹을래?’ 같은 것 아닐까? 나를 사랑한다고? 그럼 뭘 좋아하니? 너만의 표현법을 들려줘. 너의 세계를 보여줘 등등등.
그래서 그날 연재의 제목을 살짝 바꾸려고 맘먹었어요. “어느 날 …을 알게 되었다”로. 이를테면 저는 『시라노』를 읽고 코 큰 남자가 왜 멋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재즈』를 읽고 하이힐 신은 여자가 왜 아름다운지를 알게 되었고 『더 리더』를 읽고 스타킹을 어떻게 신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고,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읽고 중산층 아파트 단지에 사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지요. 뭔가를 매일 깨닫고 잊어버리고 또 깨닫고 또 까맣게 잊어버리면서 허물 벗고 피부가 단단해지면서 사는 것, 저에게는 참 매혹적인 일입니다. 어제 일이 오늘 또 새로운 거지요.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에 나오는 주인공은 그의 거실 벽감 색조들을 쾌활한 색, 우울한 색, 세련된 색, 야만스러운 색 등으로 각각 꾸며놓고 자신이 읽는 책의 정수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색깔의 자리에 들어앉아 책을 읽곤 했지요. 여러분들은 저를 변화무쌍한 색깔로 생각해 주세요. 여러분들이 읽는 책의 뒷 배경이 되어서 목을 길게 빼고 ‘뭘 그리 읽나?’ 호기심으로 초롱초롱 바라보고 있을 테니까요. 맞춤형 울트라 변신 색깔 벽지, 관심있죠? 그리고 어느 날은 내가 책이 될 테니 여러분이 저의 색깔이 되어 주세요. 맞춤형 울트라 변신 색깔 벽지와 책 사이가 우리 사이지요?
*
“나는 너의 예술작품이 되고 싶어.” 나는 오래전 누군가에게 이렇게 졸라댔던 것 같다. 그때 내게는 두 개의 꿈이 있었는데 두 배 속도로 돌린 트로트 카세트테이프나 만능 기계 같은 것을 싣고 팔러 다니는 트럭 운전사의 여자 친구 혹은 아내가 되는 것 하나와, 누군가의 예술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은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단 생각이 든다. 나는 한 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예감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지방을 진정 사랑해서 그 지방 숲의 향기가 감도는 말을 하는 여자가 되고 싶은 꿈은 되짚어 보면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당신은 정말 친절하세요. 혹시 제가 조금이라도 명석해진다면 그것은 오직 당신 덕분일 거예요.” 이런 문장을 어느 날 듣거나 읽거나 말하게 된다면 그때는 여러분도 언제나 여러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외지고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 맘을 더 움직이는, 꽃이 만발한 골짜기를 갖고 있는 셈인데 그게 왜 그러하냐는 지금부터 이야기해 볼 작정이다.
『골짜기의 백합』의 첫 문장,
“사랑하는 여인은 매번 우리로 하여금 양식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게 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소. 그것은 그녀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오. 그대들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조그마한 거절에도 슬퍼하며 입술이 토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기적적으로 거리를 뛰어넘고 피를 바치고 미래를 희생하기도 하지. 오늘날 그대는 나의 과거를 원하고 있으니 여기에 있소.”
이 첫 문장과 함께 과거 골짜기에서 일어났던 일의 전모가 폭풍처럼 밝혀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주인공 펠릭스는 쓰디쓴 젖을 빨고 자란 아이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시골 보모에게 맡겨졌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구박덩어리가 된다. 매정한 어머니와 매일매일 만나는 것이 고역이었던 그는 차라리 버림받은 것을 축복으로 여기고 정원에서 혼자 조약돌을 가지고 놀거나 벌레들과 놀거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작은 행복을 느꼈다. 그의 고독의 밑면에는 끔직한 고통이 숨어 있었는데 그렇게 사춘기를 맞은 그는 자신에 대해 어떤 젊은이도 나만큼 사랑할 준비를 갖추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기숙학교가 있던 파리에서 고향인 투르로 돌아온 얼마 뒤 루이 18세의 부르봉 왕가의 귀환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여인들에게 춤을 청하기엔 너무나 소심했던 그는 구석 벤치에 뾰로통하게 앉아 있었는데 허약하고 발육이 덜 된 그의 용모를 보고 그를 열두어 살 정도의 아이로 착각한 방심한 귀부인이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옆자리의 여인을 보는 순간 그녀야말로 축제보다 더 눈이 부신 존재고 차라리 그녀가 자신의 축제라고 느낀다. 특히, 그녀의 분홍빛 어깨 아래 매끄러운 피부는 실크처럼 햇볕 아래 눈부시게 반짝거렸는데 손보다 더 대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던 그는 갑자기 그녀의 등으로 달려들어 어깨 전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여보세요.” 하고 외치고는 사라져버렸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갑자기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그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여성 전체를 사랑할 나이에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시간. 천체의 결합. 필연적인 사랑의 조합, 그리고 단 한 명의 여인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투렌의 골짜기에 산다는 걸 알게 되었고 드디어 그곳을 찾아내 골짜기의 호두나무에 몸을 기댄다. 그날 이후 그는 사랑하는 골짜기에 돌아올 때마다 늘 그 호두나무 밑에서 쉬어 갔고 마침내 초대받은 그녀의 거실에는 ‘그의 좋은 본성을 발달시키고 나쁜 것들을 말라죽게 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거만하고 우울하고 신경질적이고 끝없이 험담과 불평을 늘어놓는 히스테리 기질의 모르소프 백작의 아내이자 병약한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 앙리에트는 오로지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결혼 생활의 고단함을 견뎌냈다.
어느 날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앙리에트 부인에게도 고통스런 유년기의 기억이 있단 걸 알게 된다. 그녀는 아들들이 죽은 집안에서 딸로 태어나 차갑고 의무적인 보호만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펠릭스에게 사랑이란 말은 입 밖에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자신의 마음은 모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자신이 남편을 사랑하는 이유는 의무나 영원한 천복을 노려서가 아니라 불행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예정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펠릭스에게 고결하고 거짓말을 모르고 희생할 줄 알면서도 사심이 없는, 자신만을 위한 영혼으로 남아달라고, 고통이 넘칠 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참을 수 없을 때 내지르는 비명을 들어 줄 수 있는 친구로 남아 달라고 말하며 달빛 아래서 굵은 눈물을 흘린다. 펠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받아 마시며
“이것이 내 사랑의 첫 영성체입니다. 저는 부인의 영혼과 결합하겠습니다. 다른 생각 없이 부인께 제 자신을 바칩니다. 부인께서 바라는 대로 되겠습니다.”라고 외친다. 그때 그는 별빛이 쏟아지는 창공 아래 서서 몇몇 대담한 사람들이 어떻게 서로 빛을 나누며 더 높은 존재로 끌어올려지는지 헤아려본다.
“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천재들이여, 인정받지 못한 가슴들이여, 차가운 마음와 갇힌 마음 막힌 귀를 만난 이들이여, 결코 불평하지 마라! 누군가의 가슴이 당신에게 열리고, 누군가의 귀가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누군가의 눈길이 당신의 것과 마주칠 때의 무한한 기쁨을 당신만이 온전히 맛볼 수 있도다.”
여기서 발자크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명언이 하나 나온다.
첫사랑을 할 때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녀의 아이들이 내 아이요. 그녀의 집이 내 집이고 그녀의 이해관계가 내 이해관계이고 그녀의 불행이 나의 가장 큰 불행이다. 그녀의 옷과 가구들을 모두 사랑한다. 내 돈을 잃는 것보다 그녀의 밀이 쓰러지는 것을 더 애석하게 생각하고 손님이 벽난로 위의 골동품을 건드리면 꾸짖을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훗날에는 불행히도 우리가 다른 삶을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여인에게 우리의 떨어진 기력을 젊은 감정으로 되살려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 자기 안에서 연인을 사랑했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연인 안에서조차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우리의 고단한 부끄러움이 사라질까?
때는 바야흐로 조금 더 흘러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복고의 시기라서 왕당파인 모르소프 백작가도 특혜를 받게 되지만 모르소프 백작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ㅡ이를테면 사소한 것에 대한 끊임없는 푸념, 전혀 증상이 보이지 않는 아픔에 대한 하소연, 선천적인 불만족, 항상 누군가를 괴롭혀야 하는, 새로운 희생양을 요구하는 성미, 몰인정함, 아내에게만 휘두르는 한심스런 권력ㅡ때문에 그들 가족은 골짜기에서 고립과 은둔의 생활을 계속한다. 앙리에트는 어느 날 펠릭스에게
“나는 당신이 없었다면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거예요.”라고 고백한다. 펠릭스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그녀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자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격려란 것을 느꼈고 그녀를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시를 짓듯 골짜기를 헤매며, 빽빽한 이끼 위를 걸으며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식물학자의 자세가 아니라 시인의 자세로 꽃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꽃이 핀 곳을 찾아 광야 한복판, 늪, 바위 꼭대기 멀리까지 마다하지 않고 갔고 식물이 나지 않는 경사가 가파른 돌투성이의 광야에서 오로지 금빛 수술을 보이기 위해 보랏빛 꽃잎을 펴는 도도한 아네모네를 보고 내 사랑의 분신으로 생각했다. 들판에서 생명이 며칠 새 피어나는 것을 보고 만든 그의 꽃다발을 앙리에트는 수없이 지켜보았고 그들의 사랑은 꽃에서 꽃으로 전염되었고 그들 자신이 꽃다발의 일부분이 되어 황홀한 교감을 나눴다. 5월의 들판. 향기로운 작은 들판, 수천 개의 꽃가루 입자가 공기 중에 반짝거리며 그치지 않는 비처럼 떨어질 때 한 여인이 수많은 순종의 결심들과, 억제되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영원한 열정과 관능과 행복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끝없이 내면의 전투를 벌이며 혼란스런 몽상 속에서 한없이 긴 시선으로 꽃다발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골짜기식 사랑이고 언어였다.
우리의 펠릭스는 수많은 세월이 지나서도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들 주위를 감싸던 골짜기의 자연에 만연하던 정신도 함께 떠올린다. 잡목들 사이에 산책하던 그녀의 굽이치던 하얀 드레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수술이 가득한 꽃받침, 욕망하는 여인, 투렌 지방의 포도밭에서 나는 꿩 비름의 하얀 뭉치, 어느 즐거운 포도 수확의 날 그녀가 홍조를 띠고 싱싱한 웃음을 머금은 채 양산을 펴고 밑에 서 있던 어린 아몬드나무. 이 모든 것들의 이미지는 하나로 흐르고 흘러 ‘내가 도달한 사거리에서 손가락으로 참된 길을 가리켜 주기 위해 솟은 위대한 자태’가 된다.
마침내 다시 파리로 떠나는 그를 위해 그녀가 몇 날 밤을 밝혀 쓴 편지는 아름답고 고결한 기사도적 처세술에 관한 최고의 충고들이기에 앞서 또 하나의 골짜기식 사랑법이다. 외로운 골짜기에 묻혀 사는 한 여인이 이런 식의 말을 한다.
- “친구여, 당신 세계에서 적이 없는 인간은 불쌍한 인간입니다.”
- “당신 자신에게만 엄격하세요.”
- “누군가를 사랑하다면 그 여인은 당신에게 세상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 “모두를 섬기되 한명만 사랑하세요.”
- “우리는 헤어졌고 당신이 내 손에 입을 맞출 수는 없지만 당신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터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앙리에트.”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감히 세상을 도도하게 멸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감히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것,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열정이 넘치는 이유, 그것 역시 바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기 때문이다.
그녀의 조언을 따른 펠릭스는 마침내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허름한 옷을 걷어치우게 되는데 그때 당대의 가장 특출난 미녀, 레이디 더들리의 육체적 사랑을 받게 된다. 이 모든 소식을 알게 된 앙리에트가 그와의 연락을 끊어버리자 펠릭스는 골짜기를 향해 후회에 사로잡혀 뛰어가지만 레이디 더들리는 동행하며 밤에 골짜기의 들판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정절, 성스러운 사랑, 모성애, 이런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앙리에트가 결국 보게 된 것은 멋진 말에 올라타 아끼는 개와 함께 펠릭스를 기다리던 레이디 더들리의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레이디 더들리의 매력은 마술적이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할 줄 아는 여자다.
“나는 아직 당신을 완전히 닮지는 않았어. 나는 도덕을 싫어하거든, 하지만 당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게. 모든 애무와 키스마다 성서의 구절을 끼워넣을게. 내가 아는 도덕의 전부는 천사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애무를 베푸는 거야.”
그녀에게 사랑은 이상이 아니었고 그때그때 요구에 따른 필요였다. 그녀는 두려움도 후회도 정숙함도 없이 타올랐고 식어버린 자신의 마음에도 충실했다. 그녀는 원하는 걸 갖기 위해 몸과 재산과 권력과 혀를 쓸 줄 아는 쾌락적인 여자였다. 그래서 훗날 앙리에트는 이런 류의 상반된 처절한 고백을 한다.
- “만약 내가 삶을 잘못 선택했다면 그녀는 옳았어. 애인을 저렇게 기다리다니 얼마나 행복할까?”
- “저녁에 산책할 때 아이들 남편과는 무관한 추억과 상념들을 홀로 곱씹기 위해 그들보다 앞장서서 옮긴 몇 발걸음을 가혹하게 속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에게 입맞춤 받은) 여인의 이마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입맞춤을 머리카락에 받으려 몸을 낮춘 것도 죄입니다.”
앙리에트가 죽기 직전에 보인 행동들은 거대한 꽃다발을 침대 맡에 마련하고 뜨거운 입김을 그의 귀에 쏟아 넣으며 발을 동동 구르며, 장난감을 갖고 싶다고 어린아이가 보채듯 애가 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을 보지 못해 병이 났어요. 나도 말을 타고 싶어요. 나도 파리, 연회들, 쾌락들을 모두 경험하고 싶다고요.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어요. 아직 살아보지도 못한 내가 죽다니, 애인을 들판으로 마중 나가본 적도 없는 내가 어떻게 죽나요?”
이루지 못한 사랑의 번민을 쏟아낸 그녀는 결국 펠릭스 앞으로 놀라운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평화와 축복 속에서 성스럽게 죽는다. 처음 나간 축제에서 등판에 쏟아지던 키스를 받기 시작한 그 어리둥절했던 어느 날로부터 시작된 그 편지는 사랑과 욕망의 시선과 손길이 그녀를 어떻게 구원하고 어떻게 유리시켰는지를 보여주는 소설 속 또 하나의 반전이다. 펠릭스, 펠릭스, 펠릭스, 그의 이름, 그의 이름. 그녀의 편지를 읽고 나자 나는 ‘펠릭스, 펠릭스.’ 하고 불러볼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받은 펠릭스는 이렇게 생각한다.
‘오직 나만이 이 무명의 위대한 여인의 삶을 알고 오직 나만이 그녀의 감정을 기억하고 오직 나만이 그녀의 영혼의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녀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남편도 자녀들도 그녀를 완전히 알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고귀한 존재들이 그들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해본 총명한 역사가를 만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는가? 이것이 인간 세상의 온전한 진실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앙리에트가 있는가? 단 한 사람만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역사가들을 우리는 얼마나 그리워하고 원하는가?
라일락 나무 아래서
『골짜기의 백합』을 다시 읽다 보니 우리의 삶은 진정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부르는 것은 하나도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을 알겠다. 이 글은 되돌아보고 과거를 그리워하라고, 과거는 아름다웠다고 눈물을 떨구라고 쓰여진 글이 아니다. 삶의 감정은 과거를 말하는 순간에조차 현재적이므로, 결국 우리는 ‘골짜기의 백합’을 그리워하는 순간, 우리가 더욱 더 완성되기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삶을 누리기를, 내가 갖고 있는 보물에 하나의 보물을 더 보태기를, 누군가에게 내 삶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기를, 그래서 죽음보다도 강하게 연결되기를, 공기마다 나를 사랑하는 기운이 떠다니기를, 그래서 호흡할 때마다 따뜻한 기운이 나를 에워싸기를 갈망하고 있는 현재의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건 그녀가 이미 죽고 없어도 완수해야 할 우리 사랑의 역사이다. 파스칼 카냐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녀가 죽고 없어도 그녀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내 혈관을 돌아다니다가 나와 함께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연인이 다른 여자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보다 그가 죽을 정도의 고통을 당하기를 더 바란다.’ 무시무시한 진실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상처 역시 깊을 것이다.’ 진실이다. ‘천재에게 직감이 있듯이 사랑에도 직감이 있다.’ 이 또한 우리가 몸으로 겪어내 알고 있는 진실이다. 이런 사랑의 진실에 몸부림치다가 나의 사랑에 관한 한 너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고 그 발밑에 몸을 던지는 날, 우리는 한 사람만을 위한 역사가가 될 영원한 기회를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몸에 새겨진 역사와 지도는 어느 날 하나의 시선, 하나의 손짓, 하나의 키스로 시작되어 우릴 끌어올린 그 어느 날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