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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어느 나라 촬영팀이, 어느 나라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으러 올까

수단의 원시부족을 취재하면서, 이들이 사는 원시적인 삶이 우리가 사는 문명의 삶보다 못 하다고 하는 건 우리의 선입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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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봄, 나는 케냐의 한 서점에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최후의 누바족』이라는 책으로, 독일의 사진작가 레니 리펜슈탈이 1962년부터 77년까지 나일강의 중간 지점인 수단에 살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시부족을 찍은 사진집이다. 나일강 7천 킬로미터에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해야 하는 내게 이 책은 성경과도 같은 울림을 주었다.

“바로 이 책이다!”

1996년 봄, 나는 케냐의 한 서점에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최후의 누바족』이라는 책으로, 독일의 사진작가 레니 리펜슈탈이 1962년부터 77년까지 나일강의 중간 지점인 수단에 살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시부족을 찍은 사진집이다. 나일강 7천 킬로미터에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의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해야 하는 내게 이 책은 성경과도 같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도 일단 수단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수단의 내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증기선 <스티머>는 길이가 약 50미터인 모선에 밧줄로 연결한 화물선이 10여 대가 붙어 있어서 전체 길이가 100미터나 되었지만, 실제 모습은 전쟁이 나서 피난 가는 행렬처럼 초라하다. 그래도 일등칸은 낫겠지 했던 기대는 선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두 평 남짓의 공간에는 매트리스도 없는 2층 나무 침대가 놓여 있고 사방에는 쥐가 뛰어다니면서 우리를 맞이한다. 목적지 말라칼까지는 800킬로미터, 일주일이 걸릴 선실생활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하다.

그래도 낮은 밤보다 낫다. 낮에는 서서 보냈던 사람들이 밤이면 누워야 하기에 공간이 부족하고, 그러다 보니 선실 복도나 통로는 말할 것도 없고 각 층마다 하나밖에 없는 화장실 앞에서도 잠을 잔다. 화장실까지 가는 50미터 거리를 잠자는 사람을 피해가며 장애물 통과하듯 조심조심 가다보면 어느새 10분 이상이 소요된다. 식수가 마땅치 않아 계속 설사를 하게 된 우리들로서는 정말 고행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화장실에 도착해도 사람들이 입구를 막고 있으니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힘들다. 결국 비상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나는 배의 난간을 붙잡고 몸을 돌려서 나일강을 등지고 배의 끄트머리에 매달렸다. 그러고는 엉덩이를 나일강에 대고 주저앉았다. 강이기에 배의 흔들림은 많지 않았지만, 만일에 배가 흔들려 잡고 있는 난간을 놓치게 된다면 칠흑 같은 암흑 속의 나일강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보는 이가 없으니 당연히 강에서 끌어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러다가 뉴스에 실종자로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갑자기 아랫배에 힘이 빠진다. 난간을 잡고 있는 시간은 더 지체되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언제 아프리카의 나일강에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냐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수단 중부의 사바나 지역에는 약 140명의 딩카족들이 살고 있다. 이들도 누바족처럼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다. 딩카족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소다. 결혼할 때도 신랑이 신부 집에 소 스무 마리를 주어야 신부를 데려올 수 있다. 아직도 축첩제를 실시하고 있는 이곳에선 소가 많으면 그만큼 부인도 많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부부싸움이 날 일이지만 이곳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하다. 모계사회인 이곳에서 부인이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조강지처가 부릴 노동력이 하나 더 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소가 가장 귀중한 재산인 만큼 그들은 어려서부터 소를 관리하는 법을 배운다. 다섯 살만 되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굳어진 소똥을 손으로 잘게 부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건조해진 소똥으로 양치를 하고 소가 소변을 누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서 그걸로 손과 얼굴을 씻는다. 심지어 소젖을 많이 얻기 위해 <코트 덩>을 거치기도 한다. 코트 덩이란 암소의 생식기에 입김을 불어넣어 소를 기분 좋게 만드는 과정이다. 자신보다 더 큰 소의 생식기에 입김을 불어넣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딩카족 사람들의 삶에 대한 처절한 의지를 보여준다.

딩카족 다큐멘터리는 사진집에 근거하여 진행했다. 마을의 추장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가능한지를 일일이 타진한 후 카메라를 돌렸다. 45도를 웃도는 뜨거운 날씨 탓에 대부분의 촬영은 일출 전에 시작하여 오전 10시에 끝내고 오후 5시에 다시 시작한다. 어둠은 일단 더?를 잊게 하고 낮에 들판에 나갔던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오지에서의 나의 촬영은 언제나 야간에 승부수를 건다. 역광조명을 통해 피사체의 라인을 살리고, 그들이 가리고 싶어 하는 부분을 적절히 어둠으로 배치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보여주려고 한다. 특히 사냥을 나가기 전, 보름달 아래서 풍요를 기원하는 <문 댄싱(Moon Dancing)>은 내가 좋아하는 촬영 소재다. 그러나 이번엔 문제가 생겼다. 춤을 추던 열네 살 된 여자아이 세 명이 쓰러져 촬떿이 중단된 것이다. 너무 열정적으로 춤을 추다가 그만 혈압이 떨어져 쓰러졌는데 약이 없다. 간단한 구급약마저 없는 그들이 우리에게 약을 달라고 한다. 원인도 모른 상태에서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고 줄 수 있는 약은 소화제밖에 없다. 제발 깨어나기를 빌고 있는데, 옆에서 간호하며 짧은 영어 실력으로 통역을 하던 사람이 푸념을 한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약이 없어요. 조금만 몸이 아파도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아직도 그렇게 자연 앞에 무방비 상태로 벌거벗겨진 채 생로병사를 맡기고 있었다.


수단의 원시부족을 취재하면서, 이들이 사는 원시적인 삶이 우리가 사는 문명의 삶보다 못 하다고 하는 건 우리의 선입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보기엔 미개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엔 오랜 세월 그들이 터득한 삶의 질서와 가치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떠난 후 그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적응할 무렵 또 다른 문명인들이 그들을 부를지도 모른다. 이번엔 어느 나라의 촬영팀이, 또 어느 나라의 관광객이 기념사진을 찍으러 올까? 그렇게 문명인들과 한 발 두 발 만나다 보면 그들도 조금씩 다른 세상에 눈을 뜰 것이다. 하지만 혹시 그것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에서 밀려나게 되지는 않을까? 만약 우리가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세상이란 원래 이런 곳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영원히 믿으면서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의료 혜택만큼은 그들에게도 보급되었으면 한다.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하니까.

| 이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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