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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하늘에 울려 퍼진 ‘백두산은 우리 땅’

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행동은 역사에 이어 스포츠정신까지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알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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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었던 2002년 5월,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역사 왜곡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2004년이 되어서야 동북공정 사무처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정 내용을 공개하면서 한국에 처음 보도됐다.

온 국민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었던 2002년 5월,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역사 왜곡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당시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2004년이 되어서야 동북공정 사무처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공정 내용을 공개하면서 한국에 처음 보도됐다. 이에 격분한 한국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 등과 관련하여 앞으로 역사 왜곡은 없을 것이라는 5개항의 합의를 이끌어냈으나 이는 외교적으로는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구두약속에 불과했고, 2006년 중국의 역사 왜곡 작업은 거의 완료됐다.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끝이 났지만, 2007년 겨울 중국 창춘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게임은 동북공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 대회였다.

2007년 1월 26일, 출발부터 삐걱댔다. 당장 사흘 후에 비행기는 떠나는데 오디오맨은 여권을 잃어버렸고, 중국 대사관에서는 취재비자를 내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관광비자로 중국을 향해 출발했고, 미리 신청해놓은 아이디 덕분에 공항은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창춘은 추웠다.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7도인데다 추울 때는 영하 27도까지 떨어졌다. 숙소 냉장고가 좋지 않아 물을 창밖에 내놓았더니 30분도 되지 않아 꽁꽁 언 얼음 덩어리가 될 정도였다. 카메라 녹화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았고, 꽁꽁 언 오디오라인은 부러질 것만 같아 차 안에서 녹인 후 감아야 했다.

1월 28일, 후진타오 주석의 개막 선언을 시작으로 중국의 공업도시 창춘에서 동계 아시안게임이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중국 정부는 개막식 식후 행사부터 백두산을 창바이산이라 칭하며 그곳이 중국 땅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게다가 프레스 센터와 경기장에 비치된 각종 중국 관광안내서에도 창바이산의 관광코스가 실려 있었다. 한국인이 볼 때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바로 이것이구나 싶으니 분노를 넘어 위기감이 느껴졌다.

1월 30일, 역사를 왜곡하던 중국이 이번엔 점수까지 왜곡하는 것일까. 쇼트트랙 남자 500미터 결승전. 안현수 선수는 스타트는 늦었지만 폭발적인 스퍼트로 중국 선수들을 차례로 따라잡았다. 한 바퀴를 남기고 안현수 선수가 선두로 치고 나오자 뒤따르던 중국의 리예 선수가 갑자기 넘어졌다. 안현수 선수는 1위로 들어왔지만 곧이어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중국의 왕시안 심판장은 중국인 부심의 의견을 물어 안현수 선수를 실격시키고 2위로 들어온 중국의 후저 선수에게 금메달을 안겨줬다. 리예 선수가 제 풀에 중심을 잃고 넘어진 상황을 안현수 선수가 몸으로 밀쳤다고 판정한 것이다. 우리 선수단은 명백한 오심이라며 항의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오노는 자기 몸을 들이밀기라도 했지만, 리예 선수는 닿지도 않았는데 넘어진 거라 우리 선수단의 억울함은 더했다. 안현수 선수는 너무나 억울했는지 인터뷰도 거절하고 사라져버렸다. 이럴 때는 나도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1월 31일, 우후안 경기장. 어젯밤 안현수 선수 경기의 오심 판정 때문인지 빙상 경기장은 일찍부터 중국과 한국 응원단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오늘은 제발 오심 없이 한국 선수들이 무사히 금메달을 따기를 바라며 관중석 중간에(이곳엔 따로 ENG 카메라 존이 없다.) 자리를 잡은 나는 쇼트트랙 여자 3천 미터 계주경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허탈감을 느꼈다. 분명히 중국 선수들이 우리나라 선수들을 계속해서 밀고, 잡고, 막았는데도(마치 만원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중국인 심판들은 침묵했고 결국 금메달은 중국에게 돌아갔다. 한국의 여자 계주팀은 한동안 경기장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연이어 벌어진 남자 5천 미터 계주경기에서 금메달을 따 그나마 한국 선수단은 웃음을 찾을 수 있었다. 허겁지겁 남자선수들의 인터뷰를 마치고 시상식장으로 향하던 나는 여자선수들의 손에 종이 한 장씩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게 뭐예요?”
“저희, 세레모니 할 거예요.”

뭔가 특별한 세레모니가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시상식장 입장 순간부터 나의 카메라는 그녀들을 좇았다. 은메달이 여자선수들의 목에 걸리는 순간, 선수들이 무언가를 번쩍 들어올렸다. “백두산은 우리 땅”이란 일곱 글자가 창춘 우후안 경기장에서 빛을 발했다. 선수들의 백두산 세레모니에 한국 관중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졌고 중국인 대회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해했다. 나는 이 감격적인 순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카메라를 돌렸다.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백두산 세레모니는 연일 계속된 편파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녀들의 의사 표시임과 동시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의사 표시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겐 통쾌한 특종을 건져낸 순간이었다.


2월 1일, 사태의 심각성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중국 정부는 문제의 백두산 세레모니에 대해 보도 금지 명령을 내리면서 모든 TV와 신문을 통제했다. 출국하던 대한체육회장에게 중국 측 대회 관계자가 공항에서 고성이 오고 갈 정도로 크게 항의를 했고, 한국 선수단 측은 이에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시했다. 우리 취재단도 뭔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후속 취재를 위해 찾아간 중국 중앙방송 부스에서는 우리가 트라이포드를 세우기가 무섭게 모두들 달려나와 취재 협조를 거부했다. 첫날 환영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날 저녁에 있었던 한국과 중국의 남자 아이스하키 경기는 아예 취재를 통제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취재 통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두산 세레모니가 한국에서 뉴스로 나간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정부는 누가 영상 취재를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경기장에 설치된 CCTV 화면 중 그날분을 모두 확인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한국의 SBS가 단독 취재한 사실을 알아냈고, 그때부터 우리들에 대한 공안들의 24시간 감시가 시작됐다. 인터넷 송출을 위해 급하게 호텔로 향하던 나에게 중국의 사복 공안은 동행을 요구했고, 심지어 호텔 방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을 하는지 보여주길 원했다. 여권에 취재비자가 아닌 관광비자가 찍힌 나로서는 모든 것을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폐회식 날까지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며 호텔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허술하게만 보였던 취재 시스템이 한 번 통제되기 시작하니까 정말이지 너무나 무섭게 통제가 되었다.

2월 4일, 원자바오 총리의 폐회 선언으로 대회는 끝이 났다.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이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포츠선수들의 정치적 세레모니가 결코 옳다고 할 수는 없으며, 또한 외교적으로도 충분히 분쟁을 일으킬 만한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행동은 역사에 이어 스포츠정신까지 왜곡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알리고 우리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끝없이 펼쳐진 중국의 지평선이 부럽지 않았던 것은 그네들 가슴으론 결코 품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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