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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데 산티아고, 그곳을 걷는다는 것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단지 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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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지 않고, 뛰지 않고, 그저 걷는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걷고, 걷고,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그들은 변화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길, 그 길이 카미노다.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단지 걸을 뿐이다. 차를 타지 않고, 뛰지 않고, 그저 걷는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 걷고, 걷고,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그들은 변화한다. 기적이 일어나는 길, 그 길이 카미노다.

카미노는 스페인어로 <길>을 뜻한다.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이 오랜 기간 무력과 문명을 사용하여 접전을 벌이던 역사 속에서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하는 유럽인들의 순례길을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즉 산티아고 가는 길이라고 한다. 스페인을 마호메트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운동이 유럽인들을 순례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길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이 순례자의 길 위에 서면 사람들은 변한다. 분명히 그 길을 걷기 전의 자신의 모습과 걷고 난 후의 자신의 모습은 다르다.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다만 그 길을 따라 그들도 인생의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그곳이 카미노인 것이다.


취재 중 만난 한국인 L씨. 이혼에 실직까지, 인생의 쓰나미를 겪은 그는 한반도 횡단을 마치고 이곳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일밖에 모른 채 가정을 소홀히 여겨 아내에게 이혼을 당한 중국인 아저씨, 암으로 투병 중인 독일인 할아버지, 직장을 잃어버린 스위스 여자도 모두 이 길에서 만났다. 이곳에는 나처럼 용기 없는 사람들이 많이 걷고 있다. 또 이곳에는 나처럼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 많이 걷고 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무함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무게가 주는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그 길을 걸으며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내면의 순례자들을 그렇게 손짓하며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어떻게 변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변화는 무엇으로 가능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대답을 나 자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단지 일을 하기 위해 카미노, 그 길 위에 섰다. 작은 배낭과 지팡이 하나뿐인 순례자들의 단출한 짐에 비해 20킬로그램이 넘는 카메라와 장비까지 들고 고통스러운 걸음걸음을 떼야 했다. 출장 전 가졌던 기대에 비해, 촬영 초기 나는 조급해했다. 매일 걷기만 하는 이 단순한 그림으로 과연 60분짜리 다큐멘터리가 나올 수 있을지 막막했고 불안했다.

그런데 걷고 또 걸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가벼워졌다. 일만 생각하던 집착을 버리고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도 했고, 나에 대한 생각조차 잊고 그저 카메라에 의지한 채 걷기만 하기도 했다. 카메라와 장비의 무게는 그대로 어깨를 짓눌렀지만, 마음은 어느새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자 취재에 대한 조바심도 줄어들고 표정도 밝아졌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 마지막에 있는 알베르게(Alberge, 순례자 숙소)에서 만난 미국인도 걸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온 짐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무거워서 버렸지만 걷다보니 물건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카미노에서 만난 성자의 말대로, 순례는 이렇게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미노에선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도 맛볼 수 있다. 스페인 곳곳에선 순례자의 전통이 살아 있다. 카미노가 통하는 길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낯선 이방인인 순례자들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예로부터 순례자들이 묵던 전통적인 숙소인 알베르게 중 한 곳에서는 옛날 순례자들이 그랬듯이 칵테일을 나눠 마시는 풍습이 살아 있다. 칵테일은 나라, 인종, 언어에 관계없이 순례자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꼭 남겨둔다. 그 마지막 잔은 다음번 순례자를 위해 남겨두는 것이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이 알베르게의 전통이다. 즉, 오늘 내가 마신 칵테일에 천 년 전의 순례자가 마신 칵테일이 섞여 있는 것이다. 칵테일 한 잔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자 수천 년 전 고행의 길 카미노에 선 순례자들이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것 같다.


그럼 이제 다시 물어보자. 정말 카미노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것일까? 결국 변화를 가져오는 경험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는 것 아닐까?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은 스스로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그 중에서 걷는 여행은 나의 마음을 순례길과 동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는 것 아닐까.

카미노를 다녀온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카미노를 걷는다. 마음이 불편할 때, 속이 시끄러울 때, 사는 일에 욕심이 앞설 때, 나는 문득 카미노,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걷는다.

|공진구


※ 운영자가 알립니다
<그때 카메라가 내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는 사이출판사와 함께하며, 매주 화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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