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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딘지는 몰라도 어떻든, 어디에든지 있어 말이 없고 잊혀져 있지만
몹시도 충실하게 있는 것이다.
| 홍경님, 「야간비행, 긴 밤이 끝나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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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의 초대로 전시회를 보러 갔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 작품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아담한 공간. 그중 한 작품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조종사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 비행기를 얹은 채 슬픔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이틀은 「야간비행, 긴 밤이 끝나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이마에서 왼쪽 눈까지 이어지는 나뭇결의 갈라짐이 흡사 깊은 상처처럼 보이는, 그런 작품이었다. 이 조각상을 보면서 당연하게도 나는 생텍쥐페리를 떠올렸다. 2차 대전 당시 정찰 비행 중에 영원히 실종된 그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한 권의 책과 함께.
『인간의 대지』는 생텍쥐페리가 우편항공기의 신참 조종사로 일하던 1926년에서 시작된다. 당시 비행기의 엔진과 기계설비는 요즘처럼 성능이 좋지 않아서, 예기치 못한 기후 변화나 장애물을 만나면 오작동하기 일쑤였다. 조종사들은 매번 이륙할 때마다 생과 사를 확신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하는 셈이었다. 실제로 생텍쥐페리가 23세 때 약혼녀 루이즈 드 빌모랭과 파혼하게 된 이유도, 늘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그의 직업을 탐탁지 않게 여긴 약혼녀 가족들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비행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속된 세상은 이미 희미해지고 곧 사라지려 하고 있다. 눈 아래 풍경이 아직은 불그레한 빛을 머금고 있지만, 무엇인지 벌써 거기에서 새어나가고 있다. 나는 이 시간만큼 값진 것을 아무것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비행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맛본 사람만이 나의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 나는 밤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비행한다. 나를 위해 가진 것이라고는 별밖에 없다.
|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ery, 1900~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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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의 경이로움을 묘사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습관처럼 그가 느꼈을 감정들을 상상해 봤다. 그런데 정작 떠오르는 건 나 자신의 소소한 추억들이 아닌가. 성냥팔이 소녀가 만들어낸 환영처럼 생생하면서도 아련하게 기억나는 그런 장면들. 그중 하나는 대학교 방송국에서 활동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저녁 방송이 모두 끝나고 불이 꺼진 라디오 스튜디오에 혼자 남아 음악을 들었던 적이 있다. 무슨 특별한 음악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당시 유행했던 발라드 음악들이었다. 지금은 제목조차 기억이 안 나지만, 기묘하리만큼 편안하고 고즈넉한 그때의 분위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한 평 남짓한 작고 밀폐된 공간. 그 어둠 속에서 콘솔의 불빛들만 별처럼 반짝거리는 가운데 혼자 음악을 듣는 기분은, 달콤한 고독과 더불어 마치 세상 끝에 위치한 아주 깊숙한 은신처에 숨어 있는 것 같은 아늑함을 느끼게 해줬다.
또 다른 장면 하나. 겨울비가 쏟아지는 밤, 히드로 공항에서 이륙하기 직전 비행기의 창밖을 내다보던 순간의 기억이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정좌석을 찾아 앉으며 무심코 시선을 돌리던 그때, 창밖으로 펼쳐지던 풍경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굵은 빗방울이 흩뿌리는 가운데, 온통 어둠뿐인 공항 주변의 건물들에서 노란 불빛이 물방울과 섞여 꿈결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장면은 왠지 감동적이었는데, 그건 아마도 지난 여정의 피로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안도감, 그리고 가벼운 흥분과 아쉬움이 뒤섞인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이륙 직전의 밤 비행기가 던져주는 알 수 없는 불안감도 겹쳐 있었으리라. 내가 정말 10시간 뒤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반쯤 섞인, 그런 종류의 불안감 말이다. 그건 살아있음에 대한 느닷없는 자각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인생이란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그때 느꼈던 전율과 알 수 없는 감동만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목숨을 걸 만큼 절실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고작 이런 추측이 전부다. 생텍쥐페리가 매 순간 위험을 무릅쓰고 비행을 감행했던 이유와 그가 비행 중에 느꼈을 감동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하지만 실제로 그가 수없이 많은 비행을 통해 경험한 감정의 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깊고도 넓은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의 생애를 관통했던 또 한 가지 삶의 이유.
물 없이 여기서 열아홉 시간은 살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엊저녁 이후 무엇을 마셨던가? 새벽에 이슬 몇 방울뿐! 하기는 북동풍이 여전히 불어 우리의 증발을 약간 늦추어 준다. 이 바람막은 또한 구름의 높다란 건축물들을 하늘에 마련해 준다. 아아! 저 구름이 우리 있는 데까지 떠내려 올 수 있다면, 비가 올 수만 있다면! 그러나 사막에는 절대로 비가 오지 않는다.
이것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하라 사막 한복판에 불시착한 생텍쥐페리와 그의 동료 프레보가 닷새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눈에 띄는 거라곤 사방 천지에 온통 모래뿐인 사막 한가운데서 그들은 걷고 또 걷는다. 구조될지도 모른다는 한 가닥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한낮에는 작열하는 태양이, 한밤에는 영하의 추위가 극단의 괴로움을 안겨주는 곳. 치명적인 수분 부족으로 눈앞에 신기루가 끝없이 명멸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들은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지만, 생존을 위한 두 사람의 처절한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프레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약 이 세상에 혼자였다면 그냥 누워버렸을 거네.”
프레보의 대사는
『인간의 대지』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과 연결된다. 생텍쥐페리의 절친한 친구 기요메. 베테랑 조종사였던 기요메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아 안데스 횡단을 시도하던 중 실종되고 만다. 여러 차례 수색대가 떴지만, 고도 7천 미터의 봉우리들로 가득 찬 험준한 산맥에서, 그것도 한겨울에 그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곳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안데스 산맥은 겨울에는 절대로 사람들을 다시 돌려보내주지 않소.” 그러나 기적이 일어난다. 실종된 지 7일 만에 기요메가 살아 돌아왔던 것이다.
“생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 그건 오직 걸음을 내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똑같은 발걸음 말이야.”
6천 5백 미터 상공에서의 아찔한 추락. 하강기류에 휘말린 기요메의 비행기는 깊은 산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변변한 등산 장비 하나, 식량 한 톨 없는 상태에서 그는 깎아지른 절벽을 따라 영하 40도의 혹한 속을 걷고 또 걸었다. 동상에 걸린 그의 손과 발은 피투성이가 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갔다. 처음에 그는 강인한 의지로 극도의 고통을 견뎌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혹독한 추위와 절망적인 현실 인식이 그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걸음을 헛디뎌 눈 속에 배를 깔고 엎어지던 어느 순간, 그는 마침내 일어나기를 단념해 버렸다. 그것은 마치 ‘결정적인 일격을 받고 모든 정열을 상실한 권투선수가, 아득한 세계 속에서 1초 1초가 마지막 10초까지 떨어지는 것을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혼미해진 정신의 밑바닥에서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나는 내 아내를 생각했어. 보험에 들어두었으니 아내가 적어도 비참한 생활은 하지 않게 되겠지. 그래, 하지만 보험이라는 게…….”
빈사 상태에 빠진 기요메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보험 대상자가 실종되었을 경우에는 4년이 지나야만 법정 사망으로 인정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눈 덮인 가파른 언덕에 배를 깔고 엎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만약 그가 그 상태로 계속 있는다면, 여름이 되어 눈이 녹았을 때 흙탕물에 자신의 시신이 뒤섞인 채 안데스 산맥의 수많은 계곡 가운데 한 곳으로 굴러갈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띌 만한 곳을 찾을 때까지, 그는 다시 사흘 밤낮을 걷고 또 걸었다.
“먹지도 못하고 사흘을 내리 걸었으니……. 내 심장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리라는 걸 너도 짐작할 수 있겠지? 깎아지른 듯한 언덕에서 공중에 매달린 채 주먹만 한 구멍을 파던 중에 내 심장이 문제를 일으켰지. 심장박동이 멈추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불규칙하게 뛰곤 했는데, 만일 1초만 더 멈췄다가는 벼랑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놓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였네. 지금껏 난 그렇게까지 내 심장박동 수에 신경을 쓴 적이 없었어. 나는 내 심장에게 이렇게 말했어. ‘조금만 더 힘 내! 좀 더 기운을 내서 뛰어야만 해!’ 내 심장은 참으로 성능이 좋은 것 같아. 그 소리에 멈칫하는 것 같더니 다시 예전처럼 뛰기 시작했어. 이 심장을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아마 자네는 모를 거야!”
이것이 바로 기요메가 생환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그것은 생텍쥐페리의 다른 작품 속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네가 그 장미꽃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장미꽃이 그렇게 중요하게 된 거야.”
“내 장미꽃에 바친 시간 때문에…….”
어린 왕자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잊어버렸어. 하지만 너는 잊어버리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영원히 네가 책임을 지게 되는 거야. 너는 네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
“나는 내 장미꽃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어린 왕자는 머리에 새겨 두기라도 하듯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책임’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나는 지금껏 그 단어가 9시 뉴스나 도덕 교과서에만 등장하는 말인 줄 알았다. 정치인들의 세치 혀 사이에서 헛되이 공명하거나, 아니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런 단어라고. 그런데 갑자기 이 단어가 너무나 참신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마지막 순간에 가슴 사무치게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것,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을 안겨준다. 나는 그 단어를 ‘그리움’이라는 말로 가만히 치환시켜 보았다.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건, 사막 속에 숨겨진 오아시스처럼,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의 삶을 빛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그로 인해 생은 의미를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마음껏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머니, 제발 키스를 해주십시오. 저도 마음으로부터 키스를 보냅니다.”
- 생텍쥐페리, 『어머니에게 사랑을』
(* 이것은 생의 마지막 비행을 앞두고 그가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의 한 구절이다.)
편집자 주
본문은 문학출판사판(민희식 역, 1991)과 이른아침판(최복현 역, 2007)에서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