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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내가 뚜껑 없는 주발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꽤 자주. 온기, 냄새… 다 휘발되고, 그런 것이 있었다는 흔적만 간신히 남는다. 나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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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뚜껑 없는 주발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꽤 자주. 온기, 냄새… 다 휘발되고, 그런 것이 있었다는 흔적만 간신히 남는다. 나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내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시간의 흐름과 속도, 나아가서는 그 방향이다. 옛날에는 매일, 매시간, 매분은 그 다음날, 시간 혹은 분 쪽을 향하여 이를테면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그 모두가 그 순간의 의도에 의하여 흡수되곤 했다. 잠시 동안 어떤 의도도 없을 때는 마치 무슨 공허 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시간은 빠르고 유용하게 흘러갔으며 보다 유용하게 쓰이면 쓰일수록 빨리 지나갔고, 그 뒤에는 내 역사라고 하는 기념물들과 찌꺼기더미가 남았다.


한동안 내 정서의 더듬이는 과거를 향해서만 꿈쩍거렸다. 탓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망할 내력의 비극적 포장. 습관은 고약했다. 중증의 피해의식과 깊은 열등감 때문이었다. 벗어나고자 하는 그 비스무리한 시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변명과 핑계, 얼토당토않은 자기합리화가 줄줄이 흘러나와 나를 젖게 했다. 결국 난 잊기로 작정했다. 아랫니가 두 개나 빠지는 꿈을 꾼 날, 잠을 잤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던 것처럼. 하지만,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무언가를 이루는 것 같아.” 로페가 말했다. “도망치는 사람은 결국 모든 걸 잃어버려.”
나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예외도 있어.” 로페가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두 가지 면을 모두 갖고 있어. 찾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 내 말은 대체로 그렇다는 뜻이야. 하지만 한번 도망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져. 계속해서 멀리 도망치게 되는 거지. 나도 도망가고만 있었어. 시궁창 같은 삶을 살고 있었지.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끔찍한 겁쟁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살기 위해서는 뭔가를 찾으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싸워야 한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거지.”
- 『이야기꾼』, 쉘 요한손

그 무엇보다도 집.

집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포도나무다.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열린 적이 있었던가? 완두콩만 한 초록 알갱이들이 더 이상 여물지 못하고 시큰 달짝지근한 향기를 풍기며 하늘 총총 매달려 있던 집. 울 엄마 가끔 앉아 울던 부뚜막이 있던 집.

그리고 다락방. 늘러 붙은 곰팡이 냄새와 한 줌도 안 되는 볕살. 어디든 들추기만 하면 말라비틀어진 영혼이 여남 개씩 엮인 채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음침 더하기 음산함. 제아무리 반듯한 것들도 그곳에선 후줄근해지고 또 괴이해질 만했다. 게다가 어떻게 움직여도, 아무리 조심해도 내 몸의 어딘가는 반드시 무언가를 건드리게 되어 있는 그 좁디좁음이라니. 뒷마당이 좁았던 국화집. 근데, 왜 국화집이지? 꼭 부둣가 선술집 이름 같잖아.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 국화가 누구야?”
“무슨 국화? 어떤 국화?”
“영란이 할머니가 만날 우리더러 국화집이라 그러니까.”
“그 국화가 그 국화여? 꽃 국화를 두고 하는 소리 아녀. 맹추 같으니.”

엄마는 내 창의력의 부재를 야단쳤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이사 오기 전의 우리 집이 국화로 지천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랜 동안 이웃들에게 국화집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내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 건지. 생전 집구석에서 국화 코빼기도 본 적이 없는 내가.

그리고 골목. 땅으로 꺼지듯이 아래로 내려가던 골목. 그 골목에서 나는 유괴를 당할 뻔했었다. 납치였던가? 그날, 그는 처음으로 멀쩡한 낯이었다. 거무칙칙한 평소의 잠바때기도 아니었다. 조금 구겨지긴 했어도 바지 속으로 단단히 집어넣은 흰 셔츠가 모범적이었다.

“오빠하고 놀러 가자!”

저절로 한 걸음. 외면할 수 없는 깊고 짙은 눈빛. 순종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을 만큼 친절하면서도 무거운 말투. 게다가 그가 타고 온 빛나는 새 자전거에서 흘러나오는 무지막지한 자성까지.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를 향해 전진했다. 너무 더뎠던 탓일까? 그가 자전거에서 내리려는 듯 움찔, 했다.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그대로 도망쳤고, 그가 나타날 만한 장소마다에서 나를 꼼꼼히 숨겼다.

고작 저런 것들이라니. 쳇!

나는 그에게 어디로 이사했느냐고 묻지 못한다. 이제는 집이라는 형태를 띤 그리움을 갖고 싶지 않다. 내게 있어 모든 집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그리움이거나 영원한 망설임이었다. 세상의 집들이 내게 드러내 보이던 배타성 앞에서 절망했던 어린 시절부터 왜 사람들은 저마다 집을 가지고 사는가를 되새겨 묻던 사춘기를 지나, 방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복덕방을 뒤지고 다닐 때, 복덕방 간판만 보아도 콧날이 시큰해오던 이십대까지 집은 내게 불가항력이 어려움이었다. 모든 집들이 내게 박탈감을 안겨 주며 등을 돌린다는 삭연함과는 달리 나는 또 세상의 모든 집들이 일제히 입을 열고 나를 삼킬 것 같은 공포도 함께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러나 더 불행한 일은 내가 집들에 대한 기대나 미련 혹은 소외감들로부터 전혀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점이었다.
- 「민달팽이」, 김형경

작은 리어카는 책만으로도 숨차했다. 그 책들 사이사이를 비집고 흑백텔레비전과 검은 라디오, 그릇 몇 개와 비누 따위들을 박아 넣었다. 리어카가 뒷걸음질 쳤다. 나는 왜 그리도 책에 집착했던 것일까. 내 집이 아닌 곳에 그것들을 풀어놓아 뭘 어쩌겠다는 심사였을까. 세 발짝만 떼면 끝이 나는 좁은 공간. 거기서 책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대학 사 년 동안 네 번의 이사가 있었다. 학교를 기준으로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거국적인 사건이 순서대로 일어났다. 우정이 작살났고, 연탄가스를 마셨으며,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마지막, 언니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집으로는 가지 않았다.

프리다가 일어나서 전화기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사이 나는 문득 그 전화가 걸려 온 목적이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 집에서는 미소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알려 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웃을 수 없는 집이 싫었다. 가끔은 웃기도 해야 하는 내가 죄스러웠다. 배부르게 먹는 일도, 내가 안 아픈 것도, 다 죄스러웠다. 집 생각만 하면 속이 상했다. 그래서 집으로는 가지 않았다.

고향이 망명지가 된 사람은 폐인이다.
출항했던 곳에서 녹슬고 있는 폐선처럼
옛집은 제자리에서 나이와 함께 커가는 흉터;
아직도 딱지가 떨어지는 그 집 뒤편에
1950년대 후미끼리 목재소 나무 켜는 소리 들리고, 혹은
눈 내리는 날, 차단기가 내려오는 건널목 타종 소리 들린다.
김 나는 국밥집 옆을 지금도 기차가 지나가고.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빨리 죽어주길 바랐던
아버지가 파자마 바람으로 누워 계신
그 옛집, 기침은 콜록콜록, 참으면서 기울어져 있다.
병들어 집으로 돌아온 자도 폐인이지만
배를 움켜쥐고 퀭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신 아버지,
삶이 이토록 쓰구나, 너무 일찍 알게 한 1950년대;
새벽 汽笛에 말똥말똥한 눈으로 깨어 공복감을 키우던
그 축축한 옛집에서 영원한 출발을 음모했던 것;
그게 내 삶이 되었다.
그리움이 완성되어 집이 되면
다시 집을 떠나는 것; 그게 내 삶이었다.
그러나 꼭 망명객이 아니어도 결국
폐인들 앞에 노스탤지어보다 먼저 와 있는 고향.
가을날의 송진 냄새나던 목재소 자리엔 대형 슈퍼마켓;
고향에서 밥을 구하는 자는 폐인이다.
- 「타르코프스키 監督의 고향」, 황지우

고향에서 안식을 구할 수 없는 자도 다를 건 없었다. 폐인이 아닐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랴. 거기서 내가 자란 것을.

이 세상에 태어나 만신창이가 되지 않는 감정은 없다. 그러나 둔펑과 미 선생은 집에 돌아오면서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떨어진 꽃과 같은 낙엽을 밟으며 함께 길을 걸었다. 둔펑은 우체국 앞을 지날 때 그에게 잉꼬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 『경성지련』, 장아이링

나도 충분히 너덜거려왔다. 헤진 자리를 보면서 안심하는 사디즘적인 면모도 더불어 키워왔다. 건강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고, 나잇값을 못했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미워하기 싫다. 더군다나 ‘미움’이란 것에도 내성이라는 게 생겨버렸는지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일이 전만큼 절망이지도 않다.

소원 하나.

내가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우리 정서에 맞는 오두막 같은 집을 짓겠다. 물론 집안 넓이는 사람이 쉰 명에서 백 명쯤 앉을 수 있는 크기는 되어야겠지. 정면에 보이는 강단 같은 거추장스런 것도 없이 그냥 맨 마룻바닥이면 되고,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는 예배면 된다. ○○교회라는 간판도 안 붙이고 꼭 무슨 이름이 필요하다면 ‘까치네 집’이라든가 ‘심청이네 집’이라든가 ‘망이네 집’ 같은 걸로 하면 되겠지. 함께 모여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씩은 가까운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도 모셔 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마을 서당 훈장님 같은 분께 공자님 맹자님 말씀도 듣고, 단옷날이나 풋굿 같은 날엔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

옆에서 작은 집 짓고 살고 싶다는. 뭔가를 찾아야 하기 전에, 잃는 것이 없도록 총명한 기운으로 말이다.

+

우리는 절대로 집을 가질 수 없다. 그 안에 들어와 살 뿐. 즉 ‘생활’할 뿐. 어쩌다 운이 좋으면 집이랑 친해질 수 있다. 그러자면 시간과 노력과 참을성이 필요하다. 일종의 ‘말없는 사랑’이랄까. 우리는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하나하나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 힘과 연약함도. 그리고 수리를 할 땐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안에 자리 잡은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가 지나고 한 해 한 해가 지나면 집과 그 안에 사는 사람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이 싹튼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우정이. 그때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으리라. 이 집이 절대로 우리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를 평생토록 든든하게 지켜주리라는 것을.

하지만……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미우니?”
“위층.”

몇 해 전인가, 내 멋대로 축복을 내린 적이 있었다. 내용인 즉은,

오전 내내 꽁꽁 언 고사리 손으로 공들여 만들어 놓은 눈사람
반나절 만에 뽀개놓은 싹수없는 손모가지 위에
버짐과 튼살과 사마귀와 습진과 옴의 축복이
넘치도록 임할 지어다.


그 축복 다시 베풀고자 한다.

우리 개에게도 있는 염치와 배려가 도통 없는 것으로 보아 위층에서 움직이는 생물은 분명 사람이 아닐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소리가 허구한 날 ‘그렇게’ 날 수는 없을 거라고 사료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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