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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피를 팔아 살아가는 팍팍한 이야기 - 『허삼관 매혈기』

1996년 첫 출간된 『허삼관 매혈기』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어느 특별할 것 없는 옆집 아저씨 같은 주인공 '허삼관'을 통해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그러면서도 삶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 그대로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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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중국의 모습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참 시끌벅적합니다. 성조의 높낮이가 뚜렷한 중국말의 특징이기도 하고, 상거래에 있어 천재적이라는 중국만의 특성도 있겠습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싫을 때도 많지만, 우리네 재래시장의 시끌시끌한 흥정 소리가 그렇듯이 거기서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시간도 많습니다.

북경 올림픽을 통해 중국이 전 세계에 보여줬던 반짝반짝하고 세련된 이미지 뒤에 숨겨졌던 빈민가의 모습에 대해 간간이 방송하던 뉴스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전면의 세련됨이 아닌 그 후미진 구석 어딘가에서 살아가는 중국 서민들의 모습은 같은 개발도상국의 역사를 밟아 온 한국인들에게도 어딘가 공감대를 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위화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그런 현대 중국의 서민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책입니다. 1996년 첫 출간된 『허삼관 매혈기』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어느 특별할 것 없는 옆집 아저씨 같은 주인공 '허삼관'을 통해 시끌벅적하고 정겨운, 그러면서도 삶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 그대로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중국 어느 변두리 시골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허삼관은 그닥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인물입니다. 마을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허삼관은 피를 팔면 큰돈을 한번에 쥘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처음 피를 팝니다.

방직공 신분으로 좀처럼 만져볼 수 없는 뭉칫돈을 얻게 된 허삼관은 그 돈으로 장가를 가기로 결심합니다. 동네에서 이름난 미녀인 허옥란은 꽈배기 튀기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허삼관은 피 판 돈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만들어 냅니다.

피를 팔아 큰돈을 얻고, 그 돈으로 삶을 바꾸어 나가는 이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소설 『허삼관 매혈기』는 진행됩니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가족들을 먹이고, 맏아들이 때린 옆집 아들의 치료비를 내주고, 피를 팔아 바람도 피웁니다.

삶에서 고비가 되는 매 순간을 허삼관은 피를 팔아 넘깁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매혈’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데, 가장 첫 번째가 단어 자체가 함의하는 ‘피를 파는’ 모습 자체입니다.

피는 삶이자 삶의 에너지입니다. 특히, 동양에서 피는 그 에너지로서의 의미가 매우 큽니다. 효자들이 죽어가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자기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어머니에게 먹이는 일화들은 피를 생명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입니다. 그러한 의미를 가진 피를 파는 행위는 곧 삶을 팔아 삶을 영위하는 언어적 역설을 보여주며, ‘피로 번 돈’이라는 직관적인 묘사를 가능하게 해 주는 효과를 갖습니다.

가난한 하층민의 삶으로서 허삼관은 결국 자신의 삶을 계속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를 팔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을 살아가는 모습은 피를 팔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가 봐도 어딘가 모를 전율을 남기는데, 이는 피가 단순히 붉은 액체만으로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허삼관이 판 것은 피지만, 읽는 이에게 그 피는 피 이상의 것으로 충분히 각인됩니다.

이런 피 파는 허삼관의 모습은 더구나 가장이라는 한 남자의 일대기이기 때문에 또 다른 비장함을 갖습니다. 소설 속에서 피를 파는 허삼관의 모습은 마지막 매혈이 있기 전까지는 모두 가족을 위한 매혈입니다. 가장으로서의 허삼관은 아내와 아들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 파는데, 피라는 극단적인 장치를 동원해 보여주는 아버지, 혹은 가장으로서의 삶이 갖는 팍팍함이라는 것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숙연하게 합니다. 자신의 삶을 뽑고 팔아가며 가족을 떠받치는 한 중국 남자의 삶이라는 소재는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반적인 모습을 상징하기에 독자들에게 전하는 감동이 깊습니다.

위화(余華, 1960~ )

허삼?과 그의 가족, 그의 이웃과 그가 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매우 이기적이고, 핏줄에 집착하며, 치사하고 좀스러운 모습도 자주 보여주는 정말 일상적인 이웃들의 풍경입니다. 허삼관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 아내가 결혼 전에 만난 남자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피를 팔아 국수를 사 먹는 길에 첫 아들을 두고 가버립니다. 내 피를 팔아 먹는 국수인데 남의 자식을 먹일 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것이 소설 속의 현실입니다. 허삼관은 동네에서 바보 머저리로 소문난 사람이었고, 게다가 남의 자식을 밸도 없이 데려다 키운다는 소리에 이골이 난 상태입니다. 오죽하면 그 분함으로 허삼관은 둘째, 셋째 아들에게 나중에 크면 첫째 아들의 본 아버지네 딸들을 강간하라고까지 시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지저분하고 잔인하게 말을 하면서도 그러나 허삼관은 첫 아들에게 국수를 사 먹이고, 남의 자식이라며 놀리는 주변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며 살아갑니다. 온갖 궂은 소리를 다 해가면서도 그는 가족이라는 자신이 책임지는 테두리 안쪽을 위해 또 피를 팔러 읍내에 나갑니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모진 세상에 속고 휘둘리며 눈물을 흘려도, 그렇게 당한 마음의 상처를 풀지 못해 세상을 저주하고 아내에게 모질게 굴면서도 절대 자신의 말만큼 모진 행동까지는 하지 못하는 유약한 남자가 주인공 허삼관입니다. 비단 허삼관 본인뿐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말들을 함부로 내뱉으면서도 일정한 ‘선’을 넘지 못합니다. 마을은 마을이고, 공동체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입은 걸지만 마음은 여린 이 중국 어느 촌구석의 사람들은 그러나 시대적인 격변을 맞으면서 더욱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문화혁명이라는 혼란 속에 허삼관네 아이들은 시골로 끌려가고, 끌려간 시골에서 아들 녀석이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는 허삼관은 그 먼 길을 피를 팔며 여비를 벌어 따라갑니다.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해 이제는 피를 팔아도 얻을 수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 허삼관 같이 늙은이의 피는 잘 사 주지도 않는 시절이 와서야…… 허삼관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피를 팝니다.

젊은 시절부터 늘 먹고 싶었던 것, 항상 피를 팔면 빠져나간 피를 보충하기 위해 먹었던 돼지 간볶음과 황주. 다른 목적 없이 그냥 그걸 사먹고 싶어서 피를 팔려고 했던 허삼관은 병원에서 거절당하고, 이제는 다 성장한 아들들은 허삼관에게 돼지 간볶음과 황주를 대접합니다. 그가 피를 팔며 겪어 온 격동의 중국사회, 아이들을 키우며 보냈던 힘겨운 시간들이 쌓아 왔던 소설의 감정은 마지막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면서 감정의 격동을 불러일으킵니다.

80년대 일요일 아침 TV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드라마에는 이른바 ‘순돌이네’로 유명한 임현식네 가족이 나옵니다. 시즌 1에서 임채무네 건넌방에 세 들어 사는 단칸방 가족의 가장인 순돌 아빠는 동네 전파상 주인인데, 가끔 동네 부잣집 아줌마에게 온갖 설움을 당하는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던 순돌 아빠가 친구 만수 아빠에게 하던 한 마디가 『허삼관 매혈기』를 읽는 내내 겹쳐 들려왔습니다.

“그래도 내가 순돌이 그놈 하나 크는 거 보고 살아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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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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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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