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니체는 나에게 불행과 슬픔을, 그리고 불안을 자랑으로 바꿔 놓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조르바는 나에게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다. - 카잔차키스
역사는 나에게 배워서 남 주냐, 고 가르쳐 주었다.
#1
배경과의 조화가 하도 절묘해서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기계란 게 있다면 그건 단 하나, 자전거일 거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스물네 살. 처음 자전거를 탔다.
아마도 ‘아씨, 쪽팔려!’ 따위의 말을 속으로 백 번도 더 넘게 했을 것이다. 그래도 가르침에 대한 그의 의지는 확고했고, 난 떨리는 발을 페달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난리법석 며칠째, 어느 날이었다. 대형 사고가 터졌다. 발단은 그가 손을 놓았다는 것. 웬만큼 타는 것 같아 보여 그랬단다. 사실은 담배에 불붙일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겠지만.
막 가더란다. 그러더니 쾅, 하더란다. 슬로우 모션으로 날더란다. 브라보!
한 손으론 체인 너덜거리는 자전거를, 또 한 손으론 정신줄 놓은 나를 질질 끌고 가면서 그가 웃다가, 한숨쉬다가, 그랬다.
각색의 피멍으로 곱게 물든 몸뚱이가 볼만했었다. 푸르딩딩, 불그죽죽. 철 이른 단풍이라고 해두자. 요란한 다리가 남우세스러워 그 염천에 반바지도 입지 못했다.
마흔 살. 난 아직도 자전거가 낯설다.
쪼개진 무덤 사이로 산발한 귀신이 눈 흘기면서 등장해야만, 총질 칼질로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야만, 공포가 될까?
자전거 타는데 앞뒤로 나타나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겐 공포다. 뭐만 보이면 서고, 뭐만 나타나면 멈추고. 게다가 딱 실격감이다. 박태환으로 치자면 레인을 제멋대로 벗어나는 셈. 그러니까 5번 레인에서 헤엄쳐야 할 박태환이 4번 레인에서부터 6번 레인까지 갈지자로 헤맨다고나 할까. 도대체가 직진을 못 한다. 물속이나 얼음위도 아니고 육지에서, 똑바로 앞을 가기가 그렇게 어려운지 처음 알았다.
#2
사회생활을 하면서 싫든 좋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사랑하되 진짜 사랑하지 않는 법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아프지 않기 위해 시작한 그 방법은 점점 마음이 상하지만 겉으로 웃을 줄 알게 되고 기분 나쁘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 많은 후회를 하게 되고 ‘나는 뭔가’ 하는 회의가 들게 되지만 그 회의와 후회가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는 조금은 기분 나쁘지만 웃어줄 수 있고 마음 상하지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으로 남의 마음을 해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는 사랑이 평화라고 생각하거든요.”
『달을 먹다』를 두고 치명적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 라고 한 인터뷰 내용 때문에 곤란한 질문을 꽤 받은 터였다. 사랑의 여러 가지 속성 중 하나라고, 그저 그 하나에 몰두해 썼을 뿐이라고. 이미 때늦은 해명이고 뒷북이었다.
온통 치명적이어서 오히려 우스웠던 모양이다.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 책으로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XX인데, 내 책을 읽고 오히려 XX이 되었다는 독후감. 상처가 지속되고 있었다. 한데 사랑을 평화라고 생각한다는 단호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나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내가 ‘치명적으로’ 하찮아졌던 순간이었다.
#3
그것은 내가 우리 종교의 진실성과 신성함을 의심한 건 아니지만 타인으로부터 주어진 신앙 같은 것에 대해 내겐 권리가 없는 듯했고, 자기가 아무런 이해도 없이 다만 어릴 때 배우고 받아들인 것을 사실 자기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이 우리 대신에 살고 죽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우리 대신에 믿어 줄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꼭 닫힌 문. 닫힌 것도 모자라 꽁꽁 잠긴 문
부수기 전에는 열 재간이 없다.
무수한 발길질에 다리에 알이 배기고
제발 열라 목 메인 간청과 나 죽는다, 협박 섞인 고함에 목소리가 부르트고
두드리다 두드리다 주먹 쥔 손에 굳은살이 잡히고
그럴 만큼 시간이 흘렀어도 꿈쩍도 않는 문
치사스러운 마음, 고단한 몸
결국엔 부수고야 말 것인지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설 것인지
이도저도 다 집어치우고 주저앉아 울어버릴 것인지
언젠간 열어주지 않겠나 희망 놓지 않고 구구로 잠자코 기다릴 것인지
아님, 하늘에 삿대질을 해대며 퍼부을 것인지
어려서부터의 신앙생활. 내 믿음이 진실인지 아님 습관인지 무척 헷갈려했던 때의 피곤함. 지금은 헷갈림 자체가 습관.
솔직히 난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해.
#4
지식은 매일 바뀌는 법이야. 사람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더 강화하길 바래. 밥을 많이 먹고 나서 드러눕지 마라. 빈속에 술 마시지 마라. 식사 후 적어도 한 시간이 지난 후에 수영을 해라, 라는 따위 말이야. 어른이 되면 아잇적보다 세상이 훨씬 복잡해지거든. 우린 자라면서 이런 변하는 온갖 사실들과 처신을 배우진 못했어. 어느 날 그런 것들이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특정한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시켜주길 원해. 당분간만이라도 말이야. 그들이 찾을 수 있는 사람 중엔 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거야. 그게 전부야.
눈싸움에 대한 오해
주먹 대신 날린다고 생각지 마라.
돌멩이 들어있는 눈덩이 혹은 냉동실에서 몰래 꽝꽝 얼린 눈덩이
거기에 맞아보면 그 소리 못한다.
동심으로 돌아가 의도는 순수했을 뿐이다 말하지 마라.
눈싸움으로 시작해 몸싸움으로 끝나는 동심
나 어려서 여럿 보았다.
그리고 제발,
한 개씩 던져라.
#5
다른 아이들 열 달 만에 걸음마 뗐다고 자랑할 때, 내 딸은 그냥 서있기만 했다. 그러더니 돌이 지나고 거기서 한 달을 더 보내고 나서야 걷기 시작했다. 날 닮아서 그렇다는 거 안다. 한데 나야 쉰둥이에 늦둥이라 그렇다지만, 애비 애미 쌩쌩한 이십대에 태어나 모유도 이년 사 개월이나 자신 내 딸은 뭐란 말인가. 아, 모질기도 하구나, DNA의 힘이라!
하지만 더디게 시작해도 발전 속도는 꽤 빠른 편이다. 줄넘기 하나를 못 넘어서 몇 주일을 고생하던 아이가 지금은 쌩쌩이를 백 개 가까이 한다. 어쩌면 나도 부모님이 젊고 건강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가르쳐주었다면 운동신경이 이 정도로 후지진 않았을 거라고 위로하고 싶다.
매사가 그렇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뤄지는 법.
나는 그렇다. 그 누구보다도 그렇다. 반면 안타깝게도, ‘왜 못해?’, 다그침을 받는 순간의 반사적인 퇴행 속도는 빛처럼 빠른 스피드 백 메가, 그거다.
#에필로그
그는 아무것도 찾아낸 게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이제 그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와 있었을 뿐 아니라 원점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원점까지의 거리가 너무 까마득해서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결말보다도 더 나쁘면 나빴지 좋지는 않았다.
배우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아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