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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진주 목걸이

수백 년 전에 그려진 그림 속에서도 진주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진주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광채 때문이다. 특히 여인을 그린 초상화의 장신구로는 진주가 단연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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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분만한 후 몸이 회복되는 동안 가졌던 첫 느낌은 무언가 엄청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오히려 상실감에 가까운 기분이었다. 이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푹 꺼진 배를 어색하게 더듬어보며 내 몸이 마치 진주알을 뱉어낸 껍데기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알맹이 빠진 빈껍데기 말이다. “가만 있자, 내가 진주 목걸이를 어디 두었더라.” 불현듯 결혼할 때 엄마가 선물해 주신 진주 목걸이를 찾아 걸어보았다. 오래도록 꺼낸 적 없이 잊고 지냈었는데, 출산 이후부터는 이상하리만큼 그것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몸과 마음의 허허로움을 그것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것일까.

금속이나 돌과는 달리 조개 속에서 자라난 진주에는 신비로운 생명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진주 목걸이를 두르는 행위는 그날의 내 자신에게 이슬 같은 생기를 부가하는 일종의 신성한 의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마치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그리는 화가의 붓 터치가 그림 속 인물에 생명감을 불어 넣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에는 진주를 행운의 부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본래 진주는 장식품이기 이전에 주술적 목적으로 더 애용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인도네시아의 어느 부족은 진주를 허리에 두르고 다니면 곧 수태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에는 사후의 환생을 기원하며 죽은 이의 입에 진주를 물려주는 곳이 있다고 한다.

얀 베르메르, 「진주 귀고리 소녀」, 캔버스에 유채, 44.5×39cm, 1665~66, 헤이그 마우리초이스 미술관

수백 년 전에 그려진 그림 속에서도 진주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진주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광채 때문이다. 특히 여인을 그린 초상화의 장신구로는 진주가 단연 으뜸이었다. 지나치게 눈이 부실정도로 번쩍거리지도 않고 날카롭게 각지지도 않으며, 빛을 흡수해 잠시 머금었다 우유 색으로 발산해내는 진주는 여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살아있는 듯 한결 돋보이게 한다. 네덜란드의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 1632~75)가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진주를 그려 넣은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2003)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림 속 소녀는 허름한 태생의 하녀지만 베르메르를 둘러싸고 있는 무심한 부자들과는 달리 화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으로 나온다. “창을 닦아도 될까요?” 소녀는 진지하게 묻는다. 먼지만 닦아내도 창으로 스며드는 빛의 강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예민한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그녀의 모습을 그리던 화가가 무언가 결핍된 듯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불현듯 소녀의 귀를 뚫어 진주 귀걸이를 걸어주는 장면이다. 수줍게 움츠러든 소녀의 얼굴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살아있는 찬란함을 그려 넣고 싶었던 것이다. 화가가 달아준 진주 귀고리는 존재감 없이 눈에 띄지 않게 늘 배경처럼 살아오던 하녀를 생명감을 머금고 광채를 내뿜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콜린 퍼스,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스틸 컷, 2003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진주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취하면 오히려 지나치거나 탐욕스러워 보일 뿐이고, 무언가 꼭 하나 부족한 사람에게 걸어주면 그 모자람을 보완하여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베르메르의 개념으로 진주가 잘 어울리는 여인을 또 한 사람 소개한다. 초기 바로크 시대 영국으로 날아가 보면 그 중심부에 여왕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가 저렇듯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영국의 왕실 화가가 60세 무렵의 여왕을 그린 기록적인 성격의 초상화이다. 역사적인 인물을 그림으로 만나보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다. 책으로 치면 픽션이 아닌 실화를 읽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마르쿠스 기래어츠(Marcus Gheeraerts the Younger), 「엘리자베스 I세」, 패널에 유채, 241.3×152.4cm, 1592년경, 런던 내셔널 초상화 갤러리

가진 것이 너무도 많은 여왕 신분의 여인에게 진주 장식은 좀 과해 보이는 듯하다. 부담스러운 그녀의 옷을 보라. 둔탁한 드레스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날개 모양의 깃이 달린 망토까지 동원되었다. 혹시 결혼예식용 옷은 아닐까. 언뜻 보기에는 신부 혼자 서있는 듯하지만, 곧 신랑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신랑은 바로 지금 그녀가 딛고 서 있는 영토(지도)이다. 여왕의 말대로 “국가와 결혼”했으니 말이다. 머리부터 치맛자락까지 주렁주렁 진주가 박힌 그녀의 옷은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갑옷처럼 보호막을 치고 있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자신에게 취약한 부분을 감추려고 오히려 과장되게 꾸민 게 아닌가 싶다. 얼굴에도 가면을 쓴 듯, 감정 변화를 전혀 읽어낼 수 없도록 과도하게 새하얀 회칠을 했다. 무엇이 여왕으로 하여금 이토록 철저히 자신을 무장하도록 만들었을까?

젊은 시절 엘리자베스에게는 스스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선천적으로 재주가 많았고, 어머니처럼 상대방을 유혹할 줄도 알았다. 어마어마한 학업량을 거뜬하게 소화해냈고, 학업시간 이후에는 와일드한 승마와 사냥을 즐겼다. 춤을 즐길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춤 솜씨는 수준급이었으며, 악기 연주는 물론 성악과 작곡에도 뛰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생기 넘치면서도 너무나 친밀감이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여왕은 사랑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평생 가족도 친구도 만들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감정으로 얽힌 관계는 오직 배신과 죽음뿐이라는 공식이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부모도 형제도 모두 상처였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왕비의 시녀였던 앤 볼린(Anne Boleyn)에게 반해 종교와 법안까지 바꾸는 말 많고 시끄러운 재혼을 감행했고, 그 둘 사이에서 엘리자베스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이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 앤을 단두대에 올렸다. 이후 아버지는 아들을 낳기 위해 줄이어 결혼을 했고, 엘리자베스는 매번 왕비 자리에 올랐던 여인들이 앤처럼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아버지의 잦은 재혼으로 인해 엘리자베스의 위치도 덩달아 매우 불안정했다. 게다가 이복언니 메리(Bloody Mary)는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동생을 늘 질시하고 경계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런던탑에 갇혀 지내기까지 했다.

그녀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믿지 않게 되었다. 오직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만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녀보다 높은 서열에 있던 메리 공주와 에드워드 왕자가 일찌감치 죽어 준 것이었다. 막 왕위를 물려받았을 무렵 25세의 엘리자베스는 이미 사기, 위선, 기만, 모략에 대처하는 기술에 있어 대가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그녀를 능가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의지하는 대신 권력을 택했다. 임종을 앞두고도 집무를 쉬어야 한다고 권하는 신하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꾸짖는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은 감히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니지 않느냐.” 여왕에게 몸이 죽어간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고, 오히려 왕좌의 권위를 동정 받는 상태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종결을 뜻했다. 왕좌는 엘리자베스에게 어린 시절의 고통과 상처를 보상해주는 그 무엇이었고, 또 자신이 생존을 위해 유지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좌는 진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진주조개에게 있어 진주는 부드러운 살 속을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모래알에서 생겨나고, 그 아픔을 잊기 위해 조금씩 액을 분비하여 키워간, 생존을 위한 투쟁의 흔적일 뿐이었다.

언젠가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역사적으로 기억할 만한 최고의 지도자로 엘리자베스 1세를 꼽았다. 그녀는 여성이 공직 진출을 꿈에도 꾸지 못했던 시절 왕위에 올라 국력이 보잘 것 없던 영국을 황금시대로 이끌었다고 타임스는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 명성이 바로 엘리자베스가 일생일대의 고독과 투쟁해서 맞바꾼 진주의 광채인가 보다. 하지만 줄줄이 달려있는 그림 속 여왕의 진주들을 보면서 마치 온몸으로 흘러내리는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단 한 번도 사랑하는 이의 품안에서 마음 놓고 울어보지 못한 빈껍데기만의 여왕을 대신하여 진주가 찬란한 눈물을 흘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주은이 추천하는 관련 도서

베르메르, 매혹의 비밀을 풀다
고바야시 요리코,구치키 유리코 저/최재혁 역 | 돌베개 | 2005년 02월

화가 베르메르를 쉽고 재미있게 다룬 입문교양서로 손색이 없다. 화가가 활동하던 17세기 네덜란드 모습을 배경으로 작가의 활동시기를 나누어 일목요연하게 설명해놓았다. 보통의 어려운 미술입문서와 달리 저자들이 글을 이끄는 솜씨가 박력 있어, 소설처럼 잘 읽힌다. 작품 이야기는 물론이고, 베르메르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위작과 도난에 얽힌 추적의 과정도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 1세
앨리슨 위어 저/하연희 역 | 루비박스 | 2007년 12월

원제인 ‘엘리자베스 1세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시기의 역사적 사건은 물론이고,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집대성한 책이다. 작가인 앨리스 위어가 대중적인 역사 쓰기를 지향하는 만큼 역사가 소설처럼 입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역사를 업적이나 주변 정세 이해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궤적을 좇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초상화만큼 흥미로운 책읽기 방법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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