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산층과 번창하는 교외, 그리고 (지금은 약간 낡은) 신흥 엘리트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와 그 이후
내가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를 읽을 생각을 하고, 그럭저럭 다 읽은 것은 이 책을 훑어보던 중 눈에 들어온 미국을 다룬 책을 일별한 대목 덕분이다. 사실 책을 다 읽기까지 책장을 닫을 고비가 없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내 취향은 아닌 ‘(저)작자(作者)’다. 나는 웬만해선 『보보스』나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 같은 책을 못 읽는다. 그런 책에 난독증이 있어서다. 또 나는 “미국인들이 과연 천박한지” 여부와 “미국인을 멍청한 금발머리에 비유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관심 없다.
내가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보보스는 어떻게 세계 경제?사회?문화 혁명을 이끌고 있는가On Paradise Drive: How we live now(and always have) in the Future Tense』(김소희 옮김, 리더스북, 2008)를 읽을 생각을 하고, 그럭저럭 다 읽은 것은 이 책을 훑어보던 중 눈에 들어온 미국을 다룬 책을 일별한 대목 덕분이다. 사실 책을 다 읽기까지 책장을 닫을 고비가 없지 않았다.
외국 신문의 칼럼니스트에게 뭘 기대하랴마는 브룩스는 통계를 갖고서 장난치는 재주가 있다. “예를 들면 대도시인 피츠버그의 시내 인구는 지난 20년 동안 약 8퍼센트 감소했다. 반면에 피츠버그 교외지역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새로 개발된 땅의 부지가 43퍼센트 증가했다.” 시내 ‘인구’와 교외 개발 ‘면적’은 다른 층위다.
“또한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백인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아시아인들의 60퍼센트, 남미 출신의 50퍼센트, 흑인들의 40퍼센트가 교외에 산다.” 그래도 교외 거주자의 다수는 백인이다. “백인 비율이 8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카운티가 미 전체 카운티 중 절반에 이른다.”
브룩스는 어느 종교 연구기관이 1996년 발표한 연구 결과를 근거로 미국 종교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미국 내에 32개의 루터파 교단, 36개의 감리교단, 37개의 성공회교단, 241개의 유대교교단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들 기독교 계통 교단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다채로운지 궁금하다. 의심스럽다. “미국인들의 40퍼센트가 자신을 신교 정통파 교인으로 여긴다”던대.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률도 최고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진학률이나 취학률이 아니라 졸업률이 세계 최고라는 거다. 과연 그럴까? 살짝 맛을 봤듯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브룩스의 퍼센트 타령과 숫자놀음은 짜증스러울 정도다. 하나만 더 보자.
“오늘날 미국 가정 15퍼센트의 연봉이 10만 달러를 넘어섰다. 순자산이 100만 달러가 넘은 가구 수만 해도 700만 정도이니, 미국 상류층의 인구는 엄청나다고 할 것이다.” 부럽지 않느냐고? 하나도 안 부럽다. 나는 의료 “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미국인이 4,000만 명에 달한다”는 게 안타깝다.
그런데도 브룩스는 2004년께의 미국인들은 인도 연방정부의 총수입을 웃도는 400억 달러를 한 해 정원관리 비용으로 지출하고, “미국의 군사방어 비용은 후순위 국가 15개국의 군사비 총합보다도 크다”며 자랑이다. 브룩스는 또한 완곡어법에도 능하다. 침략에 사용되는 군사비가 “군사방어 비용”이란다. 그가 인용하는 조지 오웰이 땅속에서 웃겠다.
브룩스는 놀라고 또 놀란다. “놀라운 수치다.”(167쪽) “나는 ‘BMOC(big man on campus의 약어로 인기 있는 대학생을 지칭-옮긴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학생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200쪽) “놀랍다. 우리는 지역 대형 매장들을 여행하면서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224쪽) “놀라운 통찰력이다!”(274쪽) “이 책을 쓰기 위한 여정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미국인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보고 놀랐다.”(296쪽)
나는 그의 무지와 안이한 생각이 정말 놀랍다. “미국인이거나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미국인이 아니거나 미국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군이나 미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은 제3세계 독재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은 적어도 9.11 희생자의 수백 배는 된다.
그는 조지 오웰이 꽤 “문명화된 독일인들이 자신의 인격과는 상관없이 영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죽이려고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정작 브룩스와 오웰은 이른바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홀로코스트’에서 영국 제국주의가 단지 피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인도인 수천만 명을 굶어죽게 내버려둔 끔찍하고 엄연한 사실은 아나(알았나) 모르겠다.
“미국 사회는 혁명, 내란, 갈등이 일어날 사회구조가 전혀 아니다. 즉 내전이나 사회적 갈등 폭발의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참 좋겠다. 그래도 경찰,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에다 9.11 직후 만들어진 국가안보부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브룩스는 긍정 일변도다. 그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말한다. “미국은 전 세계의 주의력결핍 치료제와 항불안제 치료약의 90퍼센트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만큼 소비한다. 그리고 그런 약을 복용하는 중산층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기껏해야 “미국의 가정이 건강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단다.
월트 휘트먼을 빌려 대다수 미국인들은 “평화를 애호하는 데다 지구상에서 가장 천성이 좋은 사람들”이라 하는 건 좀 뻔뻔스럽다. 대다수 세계인은 미국을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로 정확히 보고 있다. “미국이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안정성 대신 기회를 주는 쪽으로 복지 체계를 설계한 이유”로 ‘천국 정신’을 드는 것은 졸렬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를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여서일까.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대충 얼버무린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 열망”이라는 식으로. 또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작가들은 미국 중산층 삶의 특징은 바로 물질적 갈망 이면에 숨겨진 신성한 의도라고 지적했다”거나 “사실 미국 문화는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매우 복잡하다”거나. ‘보이지 않는 손’은 뭘 모르거나 알면서도 숨기거나.
미국의 아동심리학자 데이빗 엘킨드는 브룩스가 아이들의 자발적 선택을 거듭 강조하는 “체계화된 스포츠 활동”의 다른 측면을 지적한다. “자녀를 스포츠 프로그램에 보내는 부모들도 그 운영 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재미있게 놀고 즐기는 것보다 이기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놀이의 힘』 108쪽)
데이비드 브룩스에게 미국은 “박애의 땅”이고, “일상에서 이상향을 꿈꾸는 초월적인” “부르주아 국가”이며, “영원한 혁명의 나라다.” 이런 생각은 그의 자유다. 하지만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도덕적 십자군”을 자처하며, “자기편은 선하고 상대방은 악하다는 생각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 착각까지 용납할 필요는 없다.
“인류 역사상 현재 미국 아이들은 가장 훌륭한 지도를 받는 세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이 광고의 천국인 점은 수긍한다. 미국은 “광고에 의해 움직이는 땅이다.” 그리고 거주이전의 자유는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일자리를 찾아서, 곤경에 처하거나 새로 이사 온 이웃이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다.”
브룩스는 미국에 적대적인 테러리스트들이 안쓰럽다. “그들에게는 미국을 따라잡을 어떤 실질적 전략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 미국이 이뤄낸 것 가운데 하나라는 “관대함”을 찾아보긴 어렵다. 그는 다소 오만해 보인다.
“세계화 반대 운동가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은 사라졌다. 자본주의의 승리가 분명해 대안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인용문을 통해 이민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조롱한다(316쪽).
“몇 년 안에 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친구네 집에서 노는 동안 영양가 있는 간식을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대 부모를 고소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세부적인 내용이 이어지긴 하지만, 이 책에서 접한 가장 괴상한 생각이다.
그 다음으로 수상쩍은 것은 “아메리카 은행에서 일을 하면서 그린피스 활동을 지원할 수도 있”고, “해외 무역을 하면서 반세계화 데모에 관심을 보일 수도 있다”는 유연하면서도 자유로운 “개방된 세계관”이다.
내가 이 책이 주는 불편함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국내용’이어서다. 이 책은 미국 독자를 위한 책이다. 하여 이 책의 한국어판 기획자와 편집자가 제목부터 브룩스의 전작『보보스』와 연계를 꾀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적절한가는 약간 회의적이다. 그래서 원서 출간 4년 만에 ‘뒤늦게’ 번역된 것인지도. 『보보스』는 원서가 나온 이듬해 1월, 그러니까 8개월 만에 우리말로 옮겨졌다.
브룩스가 인도하는 미국 중산층 세계로의 유람이 신나진 않아도 지루할 겨를은 없다. 제8장 「일: 도전을 즐기는 기업가정신」이 평범한 경제경영서 수준이고, 제9장 「무엇이 파라다이스를 현실로 만드는가」가 간추린 미국 서부개척사라는 아쉬움은 있다. 이 책을 읽은 계기가 된 ‘미국을 말하는 책들’을 다룬 대목은 기대 이하였다.
오히려 책을 읽으며 새롭게 발견한 브룩스의 ‘잡지론’이 더 좋았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은 반들반들 윤기 나는 잡지를 만드는 편집자들이다.” 미국 잡지들의 발간 목적은 “더 낫고 더 심오한 사람이 되게끔 도와주는” 데 있다. “사실 광택 나는 잡지들이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잡지들은 열망을 이야기한다.
애국시민 데이비드 브룩스는 미국을 예찬한다. “이 책은 애국심에 의해 쓰이기는 했지만, 10대들의 맹목적인 사랑 같은 감정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래된 친구가 느끼는 우정에 더 가깝다.” 그에게 미국 전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교외 지대는 신천지다. 활력이 넘친다. 그가 묘사한 역동적인 미국 교외의 모습은 일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일본의 교육학자 사토 마나부는 『교육 개혁을 디자인한다』(손우정 옮김, 공감, 2001)에서 이지메 현상이 증가하는 주된 배경으로 대도시 교외와 신흥 주택지 거주자들의 익명성과 고립을 꼽았다. 그런 지역은 경제 불황의 영향으로 신중간층의 몰락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종류 책에 대한 난독증이 호전된 건 아니다. 그렇다고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에 유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미국(인) 관련서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우리 독자들이 겁난다. 미국 사람들에게 나 같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므로. “그는 당신 같은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쓴다.”(112쪽)
『보보스-디지털 시대의 엘리트Bobos in Paradise: The new upper Class and how they got there』(형선호 옮김, 동방미디어, 2001)는 2001년 베스트셀러다. 내가 헌책방에서 구입한 2002년 4월 20일 발행된 『보보스』는 1판 21쇄다. ‘보보(Bobo)’는 1960년대의 반문화와 1980년대의 성취적인 가치를 놀랍도록 잘 결합한 1990년대의 새로운 엘리트 계층인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 Bohemian)’을 말한다.
“이 계층은 역사상 어느 집단보다 더 큰 서가를 갖고 있는 그룹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서가를 들여다보라. 꽂혀있는 가죽 장정의 그 모든 책들이 성공과 풍요는 헛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엘리트에 반대하면서 자란 엘리트이다. 그들은 풍요로우면서도 물질주의에 반대한다. 그들은 무언가를 팔면서 삶을 영위할 수도 있지만 자신들이 팔리는 것은 싫어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반기득권적이지만, 이제는 자신들이 새로운 기득권 계층이 되었음을 감지하고 있다.”
일련의 관찰에서 시작된 『보보스』의 대부분은 “새로운 도덕적 규범과 예절에 관한 설명이다.” 브룩스는 <뉴욕타임스> 결혼 소식 지면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지난 세기말 <뉴욕타임스> 웨딩 섹션은 다시금 지면이 느는 추세였다. 보보 자본주의 세상에서 근로자는 죽어라고 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창조자다.
“그들은 이런 저런 것들을 실험하고 꿈꾼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탐구하고 능가하려 한다. 그리고 회사가 만일 그들을 지겹게 하거나 억압하면, 그들은 나가 버리고 만다. 그것은 특권의 궁극적인 표시이다.” 그들에겐 자기계발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것은 고상한 자기중심주의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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