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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터넷 소설? - 『퇴마록』

인터넷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 작품도 이제는 다시 보고 싶은 책의 범주에 들어가겠군요. 이우혁의 『퇴마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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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소설 분야에서의 등단은 인터넷을 통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인터넷 소설가인 ‘귀여니’의 사례가 대표적인 케이스이고, 로맨스 소설이나 무협지, 판타지 등의 분야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작가가 인터넷을 거칩니다. 수필이나 기타 분야에서도 ‘시골의사’ 박경철 같은 분들의 사례는 인터넷 등단이라는 새로운 문을 통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인터넷 이전의 PC통신 시절, 하이텔 한구석의 게시판에서 폭발적인 조회수로 인기를 모은 한 연재 컨텐츠는 마침내 출판의 기회를 얻으면서 한국 최초의 인터넷 소설로 자리매김합니다. 말 그대로 조회수라는 대중의 선택과 검증을 거친 이 컨텐츠는 검증받은 만큼이나 성공적인 출판 데뷔를 마칩니다. 그 첫 출간이 1993년이었고 2001년, 근 8년에 걸친 소설은 총 4부 15권의 장정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인터넷 소설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 작품도 이제는 다시 보고 싶은 책의 범주에 들어가겠군요. 이우혁의 『퇴마록』입니다.

‘퇴마록’은 한자 제목 그대로 마를 물리치는 이야기를 그린 퓨전 소설입니다. 주인공 퇴마사들은 단순한 잡귀와 악한 술법들에 맞서는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해결부터 시작하여 전 지구를 덮는 말세의 예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스토리를 넘나들며 이른바 ‘절대악’이라 불릴 만한 개념에 맞섭니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 있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구도에 개입하는 소재들의 다양화와 캐릭터의 입체화를 통해 흥미진진함을 만들어 냅니다. 당장 주인공 퇴마사들의 이력부터가 다채롭습니다. 주연급인 이현암은 무공을 익히는 무술인으로 검법과 권법, 기공을 사용합니다. 동료 박신부는 파문당한 카톨릭 사제로, 기도력이라는 개념을 활용합니다. 어린 소년으로 등장하는 장준후라는 캐릭터는 도술과 법술, 부적 등을 사용하여 악에 맞서고, 여성 캐릭터 현승희는 몸속에 사랑과 분노의 화신인 애염명왕 라가라쟈를 봉인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주인공의 구성은 차용과 변용을 적절히 활용한 사례입니다. 판타지 소설에 익숙한 독자분들이라면 금방 눈치 채시겠지만,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주인공의 동료들의 구성, 이른바 파티Party 개념이 일반 서양 중세 기반의 판타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싸움의 맨 앞에 나서는 전사(이현암),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마법사(장준후), 팀원의 체력과 보호를 책임지는 힐러(박신부), 그 힘의 끝을 알 수 없지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현승희)가 구성하는 팀은 『반지의 제왕』과 같은 대중적인 서양 판타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판타지 소설의 기본 뼈대로부터 가져온 설정입니다.

이 설정은 퇴마록에서 보다 동양적, 한국적 요소로 변주됩니다. 단순히 육체파로 묘사되는 일반 판타지의 전사 자리는 내공과 외공을 겸비한 동양 무술의 대가로 바뀌고, 거기에 더불어 이현암이 사용하는 단검 ‘월향’에는 한맺힌 귀신이 빙의되어 귀검으로 활약합니다. 마법사의 자리를 차지하는 장준후는 아예 빙의, 도깨비 술수, 부적 태우기 등 완전한 동양식 도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존 판타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요소들이 융합되면서 (심지어 카톨릭 사제의 힘이 부적술과 시너지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독자들은 동양의 전설들이 현대에 새롭게 재구성되는 새로운 재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퇴마록』의 강점은 이렇게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수집된 자료의 매끄러운 엮음에서 비롯됩니다. 위의 네 주인공에 포함되는 전설만 벌써 몇 가지인지 모르겠습니다. 동양 무술, 기공, 도술, 밀교, 가톨릭, 힌두교, 무속신앙에 이어 퇴마사들의 적들부터는 더 많은 전 세계의 전승들이 폭발합니다.

퇴마사의 적들은 거의 전 세계 종교를 싹쓸이해서 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리스트교의 전통적 악마인 아스타로트와 사탄은 기본이고, 동유럽의 뱀파이어와 이슬람교의 아싸신, 십자군 시대의 오리엔트 전설에서 차용한 진(지니라고도 합니다), 바티칸의 세븐 가디언, 메소포타미아의 토착종교, 부두교 호웅간, 북미 인디언 토템신앙, 게르만 신화, 가톨릭 엑소시즘 등 포괄하는 분야만 해도 책 한 권이 따로 나올 정도입니다. (『퇴마록 해설집』이라는 책도 나와 있습니다.)

단순히 다양한 세계의 설화를 망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퇴마록은 이들을 모두 긍정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뱀파이어와 대적하는 도술사의 부적 공격이 먹혀들고, 사자후의 내공력으로 악령을 밀어내는 모습들은 판타지 독자가 기대하는 역동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면서 단순 선악구도로 머무를 수 있는 소설의 갈등 구조를 다채롭게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퓨전을 통해 만들어 낸 재미는 회가 갈수록 그 스케일을 키워 나가면서 완결을 만들어 나가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스토리가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하여 또 하나의 재미 포인트를 창출해 냅니다.

『퇴마록』의 1부인 「국내편」에서는 주요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형태로 나열됩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연재되던 양식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형태로,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간의 연계는 주인공이나 몇몇 소재 외에는 전무합니다. 애초에 출판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게시판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올려보자는 의도였음을 느낄 수 있는 구성입니다.

하지만 이 구성은 서서히 연계를 갖춰 가기 시작합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간혹 회상 등의 과거 사건을 다루면서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설명과 사건의 정황을 풀어나가기 시작하고, 아예 2부 「해외편」부터는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존재해 오던 거대한 악의 실체를 드러내면서 장편소설로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최근 인기를 끄는 몇몇 미국 드라마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처음에 한두 편의 에피소드로 시작했다가 반응이 좋으면 그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며 장편으로의 뼈대를 갖추고, 본격적으로 호흡이 긴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처음 단편의 강렬한 인상으로 독자들에게 손쉽게 인지도를 얻은 『퇴마록』은 서서히 긴 호흡을 통해 장구한 인류의 설화가 만들어낸 흔적들을 하나하나 상상력으로 꿰어 붙이며 새로운 형태의 판타지를 완성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판타지는 판타지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성을 갖는다는 또 다른 특징을 보유합니다. 자동소총과 폭발 무기가 난무하는 현대 세계 속에서 고대의 전설에서나 볼 법한 각종 술법들이 총출동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새로운 퓨전 소설의 가능성이었을 것입니다.

『퇴마록』은 처음 PC통신 게시판에 연재될 당시부터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단지 무협으로만 흘러갈 줄 알았던 1편의 게시물이 총 15권의 장편소설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로부터 이른바 인터넷 소설이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이른바 퓨전 판타지라는 장르가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했던 인터넷 판타지 소설의 시초는 그 원류로서 갖는 지위만큼이나 강력한 재미를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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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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