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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헤어짐, 그 사이에서 마주친 책 세 권
'책 세 권'
삶은 변덕스러운 여자다. 그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가 싶으면 멀어지고, 웃음을 건네는가 싶으면 싸늘한 조소를 던지고, 절망에서 벗어나는가 싶으면 다시 어둠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도록 우리를 내몰고는 방관해버리는 그.
삶은 변덕스러운 여자다. 그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다가오는가 싶으면 멀어지고, 웃음을 건네는가 싶으면 싸늘한 조소를 던지고, 절망에서 벗어나는가 싶으면 다시 어둠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도록 우리를 내몰고는 방관해버리는 그. 그럼에도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런 몸부림이 생인지도 모르지만. 내게 묻는다면, 생은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이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눈물, 웃음, 질투, 몸부림, 성장이 뒤엉키듯 몸을 섞고 있다.
내 인생에 가장 특별한 일은 모두 만남과 연관된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부모와 만남, 제법 또렷이 남아 있는 동생과 만남, 이런 피할 수 없는 듯한 만남 외에도 운명적이라 할 만한 만남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는 때때로, 아니 가끔, 책이 있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는 열병에 빠져 있었다. 한 사람 생각으로 하루와 일주와 한 달을 채우고 마는 생활을 하던 터였다. 어쩌다가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종종 하듯이, 잘 다니던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제목에 끌려 앞부분을 읽다가 집으로 가지고 왔던 듯하다. 읽으면서 남자 주인공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느낌을 받았다. 아마 그가 나와 닮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특히 이 대목, 아, 내가 그런 건 아닌가 싶었다.
“니나,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세상에는 전부 다가 주어져 있는 1백퍼센트짜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몇 안 되지만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또 10퍼센트나 30퍼센트만 주어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며, 그들에 관해서는 말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일면에는 90퍼센트가 주어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90퍼센트입니다. 알겠습니까? 거의 다 주어진 셈이지요. 그런데 바로 제일 중요한 10퍼센트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이 대목을 읽고 내가 말하려는 책이 무엇인지 알아챈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다. 왜 이 문구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지…… 슈타인의 음울함과 지성과 우유부단함을 한편으로는 동경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한 것일까. 읽는 내내 슈타인과, 니나와 대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했어야만 하는지, 아마 그 의문을 가장 많이 던졌던 것 같다. 읽고 나서, 10년쯤 후 다시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한 손에 책을, 한 손에 연필을 들고 안락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자 처음 읽었을 때처럼 곧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일 때, 열병을 앓느라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때와는 아무래도 다른 눈으로 읽었는지, 처음 보는 듯 눈에 띄는 구절이 종종 있었다.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는 아래 대목도 흥미로웠다.
“독자는 오락을 요구하고 있어. 작가는 따라가기 쉬운 안이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저것, 그러고는 그것. 그렇게 해서 맨 끝에는 행복하건 불행하건 관계없이 하여간 둥근 결말이 있어야 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가야 돼.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어. 인생에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을 갖고 있지 않은데도. 결혼도 아니고 죽음도 다만 외관상 결말에 불과해.
생은 계속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그렇게도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고 모든 게 즉흥적으로 생산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은 거기서 작은 조각을 끌어내서 현실에는 있을 수 없고 모든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인 조그마한 알뜰스러운 설계도에 따라서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다 꾸며진 사진에 불과해.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루이제 린저는 이 소설에서 다소 특이한 이야기 전개 방식을 택한다. 언니와 동생 사이의 대화, 그 사이사이 등장하는 슈타인의 일기, 슈타인과 니나 사이의 편지, 니나의 소설, 회상 등을 복합하면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역시 소설이기에, 어느 정도의 인위성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우선 특별한 재주 없는 언니가 이 소설의 화자로서 이야기를 재구성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단순한 의문이 든다. 저자의 이야기를 하려고 넣어야 했던 장면들은 어떤가.
이 책이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수없이 많은 의문들’이었던 것 같다. 다시 보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니나와 슈타인이 던지는 ‘생’의 의문들에 잠시 책을 내려놓고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도대체 왜 인간은 고뇌를 통해서만 현명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나는 도대체 원하지도 않는데 현명해져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나 자신이 행복을 원하면서 나를 행복으로부터 쫓아낼 수는 없지 않아? 그리고 만약 그것이 운명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한낱 언어에 불과해. 왜냐하면 운명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 이외에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야.”
물론, 처음 읽을 때도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느낀, ‘사랑의 아픔’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시선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내리려 했던 섬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배가 멎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릴 때 그 선객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섬을 바라보면서도 선장에게 항로를 섬 쪽으로 돌려달라고 하기 위해서 종을 흔들지 않는다. 눈에 안 보이는 팔이 그를 붙들고 있고 그는 그것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배는 계속해서 가고 섬은 대해의 한가운데에 그냥 떠 있다. 그 섬에는 다시는 어떤 배고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이다.”
새로 읽으면서, 끝까지 두 주인공과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거리 조절 없이 끝까지 접사로만 촬영한 영화를 본다면, 구토를 일으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일을 지나치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인생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영화 아닐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번역가로 일하는 지금 읽어 보니 전혜린의 번역이 그다지 읽기에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학적 표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읽기에 거슬리는 표현이 종종, 그러나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문장을 만지고 싶은 욕구를 참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로 언급하려는 이 책을 읽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팬택에 다니던 때였다. 당시 나는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했고, 자주 회의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나였나, 이것이 내가 자신 있다 외친 믿음이었나. 나를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있기가 힘들었다. 뭔가,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던 때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지 몇 년이 된 그 친구는, 한국 태생이었으나 갓난아기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인이 되어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을 둘러보고 싶어서 한국에 와 있었다. 그러다가 한 자그마한 영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팬택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직원들 들으라고 개설해둔 영어 회화 선생으로 오게 되었다. 내가 그 친구를 만난 것이 바로 그곳이었다. 동갑에, 이래저래 말이 통한 우리는 곧 친해졌고 몇 달 후에는 그 친구가 내 집에서 서너 달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내게 읽어 보았느냐면서 책을 하나 꺼내보였다. 『데미안』이었다. (물론 영문판이었지만) 내가 예전에 읽어보기는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친구는 다시 읽어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대답하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 사이의 묘한 우정, 이끌림,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상징들……. 아마 나는 떨렸던 것 같다. 무언가 내면을 건드렸는데, 나는 가볍게 떠는 것 외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던 듯하다. 당시로서는 받아들이지 못할 내용도 제법 있었던 것 같다. 읽을 때는 무심코 지나쳐버렸지만, 지금 와서 보면 그럴 만도 했겠다 싶다. 한 종교의 틀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던, 그러면서 자신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던 일종의 집착이 나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으니.
그러고 나서 친구와 한참동안 진지하고 격렬하게 논의했다. 내용은 다분히 종교적이었다. 추측하건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고, 그 자유 의지로 저지른 죄에 영원한 벌을 내리는 신의 기이한 측면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싶다. 회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신앙의 고리를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나는, 친구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면서 나 자신이 점점 회의의 늪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허둥댈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불쾌하고 불안한 상태, 대화가 끝나고 나서도 그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상당 기간, 목에 무엇이 걸린 듯 갑갑한 상태가 이어졌고 더 이상 ?딜 수 없어진 나는 그때까지 내가 믿은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기로 결심했다. 신앙뿐 아니라, 그때까지 내가 믿어온 많은 가르침을 내던졌다. 내던지기 전에는 두려워서 벌벌 떨었는데, 막상 던지고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가벼워진 듯했다. 그 후로, 내가 믿던 종교의 경전도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른 종교의 경전도 읽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내 갈증을 채워줄 만하다 싶은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리하여 하나의 문이 닫히고 새로운 문이 열리기 전까지, 나는 공기는 희박하고 끝은 보이지 않는 복도에서 더듬거렸다.
다시 읽어보니 흥미로운 구절이 몇 개 눈에 띈다. 헤세가 과연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묻고 싶어지는.
“미친 사람이 플라톤을 연상시키는 생각을 내놓을 수 있고, 헤른후트파 학교의 신앙심 깊은 조그만 학생이 영지파나 조로아스터에서 나타나는 심오한 신화적 연관을 창조적으로 숙고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들은 세계가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몰라. 한 그루 나무거나 돌인 거지. 기껏해야 동물이고. 그 사실을 모르는 한에서는 말야. 그러나 이런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질 때, 그때 그는 인간이 되지.”
그러나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어떻게 그 인식의 첫 불꽃이 희미하게 밝혀지는가?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말이다. 비슷한 구절이 또 있다.
“그때 마치 봄의 폭풍인 듯 어둡고, 무거운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형언할 수 없이 불안과 체험의 새로운 느낌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별들이 내 앞에서 번쩍거리다가 꺼졌다. 최초의, 아주 잊힌 유년으로까지, 실로 전생과 생성의 초기 단계까지 이르는 기억들이, 콸콸 흘러 나를 스쳐 흘러갔다. 나의 온 생애를, 가장 비밀스러운 것까지 되풀이하는 듯한 기억들은 어제 오늘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계속 나아갔고, 미래를 비추었고, 나를 오늘로부터 낚아채어, 새로운 삶의 형식들 속으로 넣었다. 그 새로운 삶의 영상들은 엄청나게 환하고 눈부셨으나 그 중 어느 것도 나중에는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시적인 표현인가, 꿈인가, 아니면 사실의 기술인가? 『싯다르타』를 비롯해, 학생 때 즐겨 읽은 헤세의 저작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헤세와 신비주의』라는 저작도 있군.
『데미안』과 친구가 문을 닫는 데까지 나를 인도했다면, 다음 문을 열게 해준 것은 『내면으로의 여행』과 한 영혼의 스승이었다. 빛도 공기도 적은 복도를 더듬거리며 한 발짝씩 내딛고 있던 당시 내가 읽은 책은 여럿이었고 제각기 내 의문에 답을 제시해주었지만,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 삶의 의미와 목적, 천국과 지옥, 영혼, 세상의 종교들에 관한 온갖 질문의 답이 있었다. 답이라고 해서 돌덩이처럼 단단한 것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말랑하고 부드러운 점토와 같았다. 아니, 차라리 흐르는 물이었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흐르지만 그 무엇과도 같은 형상이 될 수 있는 물. 그 물은 시원하면서 따스했고, 강렬하면서도 감미로웠다. 그 물을 나도 모르게 자꾸만 손을 뻗어 마시게 되었다.
『내면으로의 여행』을 반복해 읽으면서, 그 안에서 이야기를 건네는 노인을 만나고 싶다는 갈증이 자꾸만 커졌고, 몇 달 후 실제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이 열렸다. 그 후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과거의 세상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와는 달리, 더 아프고 쓸쓸한 날이 많았다. 이제 방황이 끝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난 더 헤맸고 부딪혔고 찢겼다. 엉뚱한 길로 접어든 것은 아닌지 후회할 만한 나날도 많고 아쉬운 순간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영혼에 각인된 영상은 점점 명료해졌고, 나는 더 가벼워지고 더 즐거워졌으며 몇 걸음쯤 떨어져서, 어지러워 구토가 나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번역이라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도 그렇게 열린 새로운 문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99년 여름, 그러니까 내게 새로운 문이 열린 ? 6개월이 채 안 되던 때였다. 여전히 팬택에서 근무하던 시기였는데, 대만에서 명상 캠프와 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갔다가 뜻하지 않게 반 강제로 통역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같이 갔던 사람에게서, 소질이 있으니 번역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처음 공동으로 번역한 책이 나왔고, 2000년 말에는 내 이름이 옮긴이로 찍힌 책이 출간되었다. 돌아보면 번역의 ‘ㅂ’도 몰랐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은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가로 전향한 셈이다.
이야기하자면 좋은 책은 많이 있다.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세계의 위인들을 두루 모은 위인전집이다. 그때 그것이 왜 재미있다고 느꼈는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새 동네로 이사하고 나서 도무지 같이 놀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내게 자발적인 읽기의 시작점은 그 위인전이었다.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전집이었던 것 같다. 그밖에 최근에 읽거나 번역한 작품 중에도 의미 있는 것이 여럿 있지만, 내게 가장 특별한 책을 꼽으라면 앞서 말한 세 권이면 될 것 같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이 뭘까, 가끔 생각해본다.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책은 어떤 것일까, 돌아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생’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흥미와 사건 위주로 전개되는 소설이나 걸쭉한 입담으로 한 권을 채운 에세이나 지식 자랑에 여념이 없는 책에는 잘 손이 가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좀 더 치열한,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은 대화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밤새도록 차를 마시며 저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듯, ‘통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모든 성인에게는 과거가,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 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인 듯하다. 우리는 종종 되돌릴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듯 자신과 남을 책망하며 끝없이 괴롭히느라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생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고 모두에게 과거와 미래가 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갚지 못할 빚이 없고 되돌아가지 못할 길도 없으며 돌아올 수 없는 강 역시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결 사뿐사뿐 걸어가면서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우리를 괴롭히는 이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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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옮긴이 김우열은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공돌이'로 손전화를 설계하다가 어떤 힘에 이끌린 듯 출판 번역계로 발을 디딘다. 번역 지망생을 위한 사이트 ‘주간 번역가’를 운영하고, 출판번역가 모임 '바른번역' 부대표 겸 번역 아카데미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7월, 『나도 번역 한번 해볼까?』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옮긴 책으로는 『시크릿』『부의 비밀』『성공의 문을 여는 마스터키』『죽음의 신비』『평전 마키아벨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