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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그래픽 노블 - 『왓치맨』
슈퍼히어로의 활약이나 내면을 그리는 것을 뛰어넘어 권력과 ‘영웅’의 관계를 치밀하게 파고든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최고의 그래픽 노블이라는 평가가 결코 과찬이 아님을, 『왓치맨』은 증명한다.
타임지 선정 ‘1923년 이후 발간된 100대 소설’에 포함된 유일한 그래픽 노블 『왓치맨』을 읽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면이 주로 9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고, 칸마다 유려한 컬러 그림과 함께 지문과 대사가 빽빽하게 들어가 있다. 내용이 간단한 것도 아니다. 슈퍼히어로들의 연쇄적인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가 전개되는 한편, 『왓치맨』 속 인물들이 읽고 있는 만화 속의 만화 『검은 수송선』의 이야기도 진행된다. 그리고 슈퍼히어로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왓치맨』은 전형적인 슈퍼히어로만화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슈퍼히어로 만화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앨런 무어가 쓰고 데이브 기본스가 그린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닥터 맨해튼을 제외하고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또한 뭔가 엄청난 계기로 히어로가 된 경우도 많지 않다. 그보다 악당들을 물리치는, 복면을 쓴 누군가의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 접하고는 나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 는 욕망으로 히어로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단지 유명해지고 싶어서, 혹은 내부의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서. 방사선 실험을 통해 시공간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게 된 닥터 맨해튼을 제외하고, 『왓치맨』에 등장하는 모든 히어로는 우리들이 현실에서 보는 정치인, 운동선수, 연예인 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단지 스스로 ‘자경단’이 되기를 원했고, 스스로 일종의 ‘연예인’이 되기를 자처한 조금은 ‘이상한’ 인간들이다.
『왓치맨』의 배경은 80년대 중반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80년대와는 조금 다르다. 현실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던 닉슨이지만 『왓치맨』에서는 3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고쳐 5선의 장기 집권을 하고 있고, 닥터 맨해튼의 도움으로 베트남전에서도 승리했다. 『왓치맨』의 80년대는 여전히 미소냉전 시기이기는 하지만, 히어로의 존재로 인해 모든 상황이 조금씩 뒤틀려 있는 패러럴 월드다.
그렇다면 『왓치맨』의 세계에서,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히어로들의 위치는 어떤 것일까? 다른 슈퍼히어로 만화들과는 다르게, 적어도 그들은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대중이 추앙하는 슈퍼히어로는 아니다. 아니 권력 자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초월적인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그들은 람보처럼 권력의 일부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코미디언은 적극적으로 권력에 기생하여 살아가고, 닥터 맨해튼 역시 미국의 전략무기로서 존재한다. 적극적으로 정부에 협조하지 않았던 히어로들은, 허가 없이 범죄와 싸우는 히어로들을 불법으로 금지하는 킨 법령 이후 모두 은퇴하게 된다. 은퇴를 거부하고, 홀로 악과 싸우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악당’ 로어셰크를 제외하고.
『왓치맨』은 은퇴하여 홀로 살아가던 코미디언을 누군가 살해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로어셰크는 코미디언의 살인이 우발적이거나 개인적인 원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어서 닥터 맨해튼이 음모에 빠져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태가 일어나자, 은퇴했던 히어로들이 뭉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뭔가 대단한 스펙터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에 빠지면서 더욱 혼돈에 빠진다. 그들은 결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사소한 악을 아무리 물리쳐봐야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왓치맨』의 세계에서, 아니 이 현실에서 슈퍼히어로라는 존재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왓치맨』을 보는 것은, 주로 일본 망가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게 무척 낯선 경험이다. 일본 만화의 구성과 연출 그리고 이야기 패턴에 길들여져 있다면, 미국의 코믹스 즉 그래픽 노블은 너무나 복잡하고 무거워 보인다. 실제로 『왓치맨』은 그래픽 노블 중에서도 가장 심오한 만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 그래픽 노블의 매력은 일본 망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그림’이라는 요소는, 일본 망가와 상당히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컬러로 그려진 그래픽 노블은 화려하면서도 박력 있고, 때로는 현대의 팝 아트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럴 경우는 없겠지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왓치맨』은 가치가 있다. 또한 슈퍼히어로의 활약이나 내면을 그리는 것을 뛰어넘어 권력과 ‘영웅’의 관계를 치밀하게 파고든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최고의 그래픽 노블이라는 평가가 결코 과찬이 아님을, 『왓치맨』은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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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무어> 글/<데이브 기본즈> 그림/<정지욱> 역12,6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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