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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살아진다는 것 - 위화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살아간다. 당장 죽을 것 같다가도 한 자락 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살아봐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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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에서


『인생』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발레리 시의 한 구절이었다. 삶의 목표가 철저히 무너지고 짓밟힐 때, 절망이 두꺼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 왜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살아간다. 당장 죽을 것 같다가도 한 자락 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살아봐야겠다.’고 중얼거리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 넘어진 인간을 일으켜 세우는 데 반드시 거대한 힘이나 위대한 기적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생』은 온통 주름진 얼굴에 허리가 잔뜩 굽은 백발노인 ‘푸구이’가 자신의 삶을 차분히 돌아보며 들려주는 이야기다. 조곤조곤, 아주 담담하고 심상한 말투로.

영화 <인생>

“썩 꺼져!”
그러나 자전은 계속 같은 말을 했어.
“저랑 집에 가요.”
결국 나는 자전의 뺨을 두 대나 때렸다네. 자전의 머리는 땡땡이처럼 이리저리 몇 번이나 흔들렸지. 그렇게 맞고도 그녀는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말했어.
“당신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저도 일어나지 않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젊었을 때 난 정말 개 같은 놈이었다네. (본문 중에서)


스스로 인정했듯이, 젊은 시절 푸구이는 구제불능의 건달이었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기생집과 도박판을 오가며 흥청망청 돈을 써댔고 늘 기고만장했다. 위에 인용한 부분은 그의 아내 ‘자전’이 노름에 정신이 팔린 남편을 찾아와 조용히 설득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푸구이는 임신한 아내를 억지로 끌어냈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십 리가 넘는 밤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날은 바로 푸구이가 노름으로 가산을 완전히 탕진한 날이었다. 백 묘나 되는 전답도 모자라 대대로 살아온 저택까지 노름빚으로 날린 것이다. 그 충격으로 부모가 차례로 숨을 거두고, 그는 가족들과 초가집으로 이사를 간다. 개과천선(改過遷善). 이후 그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아침부터 밤까지 밭을 갈며 땀 흘리는 농민의 삶으로 거듭난다.

『인생』을 쓴 소설가, 위화(余華)
시간이 약간 흐른 뒤, 길게 연결된 들것이 들어왔는데 그 위에 누운 사람들은 모두 고양이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네. 들것을 옮겨온 군인들은 우리가 있는 곳 가까이에서 공터를 하나 찾아내 하나, 둘, 셋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을 뒤집었지. 그렇게 부상병들을 쓰레기처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완전히 신경을 꺼버렸다네. (중략) 날이 어두워지자 눈까지 내렸어. 그리고 꽤 오랫동안 포성이 멎었지. 우리는 참호 바깥에 누워 있는 부상자 수천 명의 비명을 듣고 있었는데,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했다네. 어쨌거나 그건 고통에 겨워 내는 소리였지. 나는 그 후로 두 번 다시 사람을 그토록 두려움에 떨게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네. (본문 중에서)

평화로운 시절은 길지 않았다. 국민당 군대에 징집된 푸구이는 공산당 무리와 대치한 가운데 겨울을 나게 된다. 책 속에 리얼하게 묘사된 전쟁의 참상 중에서도 부상병들에 대한 부분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쓰레기처럼 방치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부상자들. 눈이 흩뿌리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푸구이와 그의 동료 ‘춘성’은 참호에 몸을 숨긴 채 밤새도록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그들이 수천 구의 시체로 발견될 때까지. 그러나 아비규환의 한 가운데에서도 푸구이는 간신히 살아남아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당신, 푸구이 아니오?”
“내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죽이고 말 거야.”
현장(縣長)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말했어.
“푸구이, 나 춘성이에요.”
그 소리에 나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네. (본문 중에서)


푸구이와 자전 부부 사이엔 남매가 있었다. 어릴 적 열병으로 말을 못하게 된 딸 ‘펑샤’와 아들 ‘유칭’. 그러나 그의 어린 아들은 수술 도중 위독해진 그 마을의 현장(縣長) 부인에게 수혈을 하다가 피를 모조리 뽑혀 죽는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이 뒤집힌 푸구이. 그러나 현장을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전쟁 중에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 춘성이었다. 포로로 잡힌 푸구이가 귀향을 선택한 것과 달리, 춘성은 공산당 군대에 남아 출세를 했던 것이다. 결국 푸구이는 아들의 시신을 안고 조용히 돌아서며 말한다. “춘성, 자네는 나한테 목숨 하나를 빚진 거라네. 다음 생에서 꼭 돌려주게나.”

그날은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렸다네. 펑샤는 죽은 뒤 그 작은 병실에 누워 있었지. 그런데 그 방을 보는 순간 도저히 못 들어 가겠더라구. 십여 년 전 유칭도 바로 그 방에서 죽었거든. 나는 눈 속에 우두커니 서서 얼시(펑샤의 남편)가 병실 안에서 펑샤를 하염없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 가슴이 너무 아파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네. 눈꽃이 휘날려 병실 문이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어. (본문 중에서)

딸 펑샤는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뒀다. 뒤이어 아내 자전도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난다. 워낙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을 견디느라 영양실조에 걸렸던 그녀에게 딸의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운명’이라고 할 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여신이 푸구이에게 가혹한 시련만 내려준 것은 아니었다. 비록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지만, 그에겐 아내가 남기고 간 선물이 있었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오래도록 그가 삶을 견딜 만하게 해주었다. 자전은 죽기 전에 푸구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인다.


“내 한평생도 이제 다 끝나가네요.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나도 마음이 흡족해요. 나는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다음 생에서도 우리 같이 살아요.”
다음 생에서도 내 아내가 되고 싶다는 말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지. (본문 중에서)


『월인천강지곡』에 보면, “내 生生애 그딧 가시 다(아래아)외아지라”라는 문장이 나온다. 훗날 석가의 아내가 된 야수다라가 석가에게 꽃을 바치며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계속 그대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야수다라의 꽃’은 부부의 인연을 뜻한다. 푸구이 노인이 회상하듯이, 그의 아내 자전은 시집와서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낸 날이 없었다. 젊은 시절엔 방탕하기 짝이 없는 남편 때문에 속을 썩이고, 남편이 가산을 탕진한 후에는 전쟁 통에 끊임없이 마음을 졸여야 했으며, 이후에는 극심한 사회 혼란과 가난으로 고된 노동과 궁핍의 나날을 보내야 했고, 급기야 자식들마저 앞세워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보다 기구한 팔자도 찾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말한다. 다음 생에도 당신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인생』『허삼관 매혈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 작가, 위화의 장편소설이다. 공리가 주연하고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가 199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내에 번역된 초판본의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 그러나 원래 제목은 ‘활착(活着)’이다. 아무래도 느낌이 좀 다르다.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교수는 신문 칼럼을 통해 ‘활착’이라는 제목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제목이 바뀐 것에 대해 불만이 크다. ‘활착’이란 원래 “옮겨 심거나 접목한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는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부제가 은근히 따라다닌다. 하지만 나는 그 부제 역시 그리 탐탁지 않다. (중략) 그렇다. 위화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인생은 제법 살아가는 수준도 못 된다. 우리는 그저 살아질 뿐이다. 모름지기 생물의 활착이란 그런 것이다.
- 2008. 6. 28. 조선일보, <최재천의 행복한 책베개> 중에서

이 소설에서 나는 사람이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과 세상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에 관해 썼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 저자 서문 중에서

푸구이 노인은 지금 늙은 소를 이끌고 밭을 갈고 있다. 미소를 띤 거무스름한 그의 얼굴에는 주름마다 진흙이 들어차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옛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하는 노인의 모습은 투박하지만 생기가 넘친다. 그것은 사뭇 감동적인 장면이다. 일제시대와 공산당 혁명, 문화대혁명 등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그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견뎌낸 한 위대한 개인의 뒷모습.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여 인생은,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묵묵히 버티고 견뎌내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살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 남진우,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 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중에서


인생
위화 저/백원담 역 | 푸른숲 | 2007년 06월

《인생》은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해방 전후부터 약 40년간의 중국 역사를 가혹하다는 의식조차 없이 묵묵히 살아낸 중국 민초들의 삶을 ‘생명과 죽음’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기꺼이 인정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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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저/<백원담> 역12,600원(10% + 5%)

《인생》은 망나니 같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농부로 전락한 푸구이라는 인물이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혼자 남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해방 전후부터 약 40년간의 중국 역사를 가혹하다는 의식조차 없이 묵묵히 살아낸 중국 민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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