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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그 포근포근한 추억

하지감자를 아는가? 사시사철 감자를 먹을 수 있는 시절에, 그럼에도 늘 나의 진짜 감자가 그리운 나는 하지감자를 아는 사람하고 밤새워 감자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감자, 그 포근포근한 추억을 꺼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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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를 감자라 하지 않고 특별히 ‘하지감자’라고 했다. 아마 하지 무렵에 캐서 그럴 것이다. 요즘이야 강원도 감자, 제주도 감자 들이 사철 나오지만 내가 기억하는 감자는 오직 하지 무렵에만 나왔다. 그래서 나는 감자, 하면 어려서 먹던 그 하지감자만이 진짜 감자인 것만 같다. 슈퍼마켓 전등불 밑에 허옇게 쟁여져 있는 감자는 진짜 감자가 아닌 것만 같다. 무엇보다 슈퍼마켓 감자가 감자가 아닌 것 같은 이유는 감자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감자를 찌면 보실보실한 속살이 툭 터져서 진한 향기를 내뿜곤 하였다. 감자는 말 그대로 뜨거운 감자를 젓가락으로 쿡 찍어 호호 불며 먹어야 제 맛이 난다. 감자는 그렇게 먹는 것이다. 어디 기름에다 튀기고 ‘호이루’에 싸서 복잡하게 굽고 말 것도 없이 그냥 푹 쪄서 쿡 찍어 먹는 것이다!

젓가락으로 쿡 찍어 호호 불며 먹어야 제 맛이란다

감자씨는 대개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월 말이나 삼월 초에 흙에 묻는다. 겨우내 부엌 나무청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올망졸망 쭈글쭈글한 씨감자를 씨눈을 보호해가며 반으로 가른다. 그런 날 밖에는 춘설이라도 난분분 흩날리기가 십상이다.

씨감자를 가르는 날은 저녁에 혹 가르고 남은 씨감자가 밥상 한 귀퉁이에 오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저녁 밥상머리에 내놓은, 겨우내 물이 빠져서 쭈글쭈글한 씨감자 한 양재기. 밥풀 묻은 감자 한 양재기. 아이들은 저녁밥도 대충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감자 양재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럴 때 먹는 감자는 감자 특유의 포근포근한 맛은 없다. 대신 쫀득쫀득, 마치 약간 굳은 찹쌀떡 같은 맛이 난다.

다음날 아침, 재에 버무린 씨감자를 아버지는 미리 두엄 듬뿍 뿌려서 고랑을 내놓은 흙에 묻었다. 씨감자는 심는다 하지 않고 그렇게 묻는다고 한다. 흙을 쏙쏙 파고 반으로 가른 씨감자 한 쪽씩을 묻는 것이다. 그렇게 묻어두면 곡우가 지날 무렵에는 어느새 싹이 터 있다. 아이들은 그때쯤 가위바위보 놀이를 할 때 이런 노래를 부른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그냥 ‘짱깸뽀’ 했던 아이들이.

“감자가 싹이 터서 잎이 나서 감자감자 쑛, 감자감자 쑛.”

빨리 감자를 먹고 싶은 마음이 그런 주문을 외게 했을 것이다. 이윽고 온 천지에 찔레꽃 향기가 진동할 때쯤, 하루 종일 어디선가 뻐꾹새 소리 숨바꼭질할 때쯤, 감자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럴 때 또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하얀 꽃 피면 하얀 감자 캐보나 마나 하얀 감자, 자주 꽃 피면 자주 감자 캐보나 마나 자주 감자…….”

감자꽃 필 때쯤 또 온 산야에는 노란 원추리꽃, 까만 점 박힌 참나리꽃이 피어난다. 온 세상은 꽃과 초록의 향연으로 마냥 싱그럽다. 이제 조금 있으면 보리도 익어가리라. 보리가 익어가고 감자 뿌리에 조그맣고 동글동글한 감자알이 맺힐 것이다. 아, 햇보리에 감자밥. 한겨울 노란 서숙에 고구마 넣은 밥을 해 먹었듯이, 이제 보드라운 햇보리에 하얀 감자 넣은 감자밥을 먹게 될 것이다. 그리고 초록의 숲속을 헤매다니며 뜯어온 푸른 고사리 무침에 뽀얀 취나물을 감자밥에 비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이 설설 나는 찐 감자 대령이오

모든 뿌리채소가 그렇듯이 감자 또한 북을 주어야 한다. 튼튼한 열매 맺히라고 뿌리 쪽에 포실포실한 흙을 북돋아줘야 하는 것이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여자아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호미 들고 밭으로 간다. 아이들이 감자밭을 돌보는 동안 어른들은 고추 모종도 내야 하고 모내기 준비도 해야 한다.

보리가 까실까실 익어갈 때쯤, 아니 온 들에 보리타작하고 남은 보리 가시랭이 태우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질 때쯤 감자도 튼실하게 굵어간다. 어느 날, 저녁 늦게 들에서 돌아온 엄마가 문득 말씀하신다.

“감자가 들었을라나 어쨌을라나, 내일은 학교 갔다 와서 감자 한 소쿠리 캐와봐라.” 바야흐로 모내기철이 다가와 품앗이꾼들 반찬을 할 만한가 어떤가 시험 삼아 캐와보라는 것이다. 드디어, 감자 먹을 때가 돌아온 것이다.

학교 갔다 와서 소쿠리를 들고 득달같이 감자밭으로 간다. 아직은 청청한 감잣대를 뽑아 던지고 나는 감자를 캔다. 그해의 첫 감자, 뽀얗게 살찐 감자가 주렁주렁하다. 그 쭈글쭈글하던 씨감자가 어떻게 그리도 잘생기게 변신을 했는지, 흙이 부리는 조화속이 그러 감탄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아직 많이 캐서는 안 된다. 딱 먹을 만큼만 캐야 한다.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은 한번 캐기 시작하면 한없이 캐고 싶어진다. 주절이 주절이 딸려나오는 감자 가족들.

가시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 감자를 집에 가져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일단 소쿠리째로 물에 씻어서 돌확에 들들 문대야 한다. 그러면 껍질이 맨들맨들하게 벗겨진다. 그것을 그냥 푹 찐다. 오리지널 찐 감자다. 김 설설 나는 찐 감자는 모내기하는 어른들의 훌륭한 새참이다.

엄마는 장에 가서 비린 것을 사온다. 주로 갈치다. 감자 넣고 조린 갈치조림은 단연 일철의 논두렁에서 인기 만점의 반찬이다. 비린 것 없으면 햇고사리 넣고 조려도 되고, 햇고추 넣고 조려도 된다. 그냥 왕멸치 몇 개 넣고 조리기도 한다. 조그만 새끼감자에 마늘종을 넣고 물엿을 조금 넣고 쫀득쫀득하게 조리면 만드는 도중에 다 먹어버릴 정도로 맛있다.


여름 한철의 따뜻한 끼니 혹은 주전부리

감자는 모내기철이 얼추 끝나갈 무렵에 본격적으로 수확을 한다. 그래서 감자를 심었던 논은 가장 늦게 모가 심어진다. 감자꽃이 지고 푸르던 감잣대가 시들시들 녹아내릴 때쯤, 감잣대를 뽑고 감자를 캔다. 미리 많이 캐다 먹어버려서 감자밭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다. 겨울 한철의 고구마가 그랬듯이 이제 감자는 여름 한철의 식량이 되고 간식이 되어줄 것이다.

한여름에는 거의 날마다 감자를 찐다. 대바구리(바구니가 아니라)에 담긴 보리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몫. 엄마와 딸들은 언제나 점심으로 열무김치에 감자를 먹는다. 해가 중천에 떠서 도무지 서쪽으로 이동할 생각을 안 하는 무더운 날에 엄마는 감자돈부범벅을 한다. 감나무 밑 화덕에 솥을 걸고 일단 감자와 돈부(*동부콩.)를 섞어 푹푹 찐다. 그것을 사카린도 조금 넣어서 절구에 넣고 치댄다. 감자와 붉은 돈부가 어우러진 기막힌 맛이라니. 하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좀 다린다. 그래도 감자범벅이 없는 한여름은 심심하다. 팥소 없는 찐빵이다.

여름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면 집집마다 감자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여름 내내 서늘하다고 딴에는 생각하고 부려놓은 헛청[虛廳]의 감자가 검은 진물을 흘리며 썩어가는 것이다. 감자 썩는 냄새에 코를 싸쥐면서도 아이들은 언제나 감자광에 가서 여름을 나곤 했다. 선풍기도 없고 더위를 쫓을 것이라곤 부채밖에 없는데, 그나마 부채는 어른들 몫이고 아이들은 그저 책받침 하나 주워들고 감자광에 모여앉아 여름방학 숙제를 하는 것이다.

그런 여름날에 내 기억의 저장고 속에 각인된 썩은 감자 냄새, 흙과 어둠과 서늘한 기운 속에서 나는 썩은 감자 냄새. 내게 고향의 냄새는 바로 그 썩은 감자 냄새다. 썩은 감자라 하여 그냥 버리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 썩은 감자떡이라고 말할 수 있다. 썩은 감자떡은 독특한 풍미가 있다.

엄마는 썩은 감자를 들들 갈아 물에 담가놓는다. 그러면 검은 전분이 밑으로 가라앉는다. 그 전분에 사카린과 소금을 조금 치고 베보자기에 싸서 푹 찌면 그것이 감자떡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썩은 냄새가 그렇게 황홀한 냄새로 변신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감자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사시사철 감자가 아닌 하지감자 이야기 말이다. 하지감자를 아는가? 사시사철 감자를 먹을 수 있는 시절에, 그럼에도 늘 나의 진짜 감자가 그리운 나는 하지감자를 아는 사람하고 밤새워 감자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감자, 그 포근포근한 추억을 꺼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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