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영자가 알립니다
장편소설 『달을 먹다』로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소설가 김진규 님의 칼럼 <김진규의 활자중독> 연재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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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親戚의 부인을 모시고 城안 冬柏꽃나무그늘에 와 있었읍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部分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 듯이 앉어계시고, 나는 풀밭위에 흥근한 落花가 안씨러워 줏어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았읍니다.
쉬임없이 그짓을 되풀이 하였읍니다.
그뒤 나는 年年히 抒情詩를 썼읍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 그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어줄이가 땅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주워모은 꽃들은 제절로 내손에서 땅우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詩를 쓸수가없읍니다.
「나의 詩」 - 서정주
‘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 마음으로 年年히 서정시를 썼다는 시인은 공교롭게도 이름조차 서정주다. 남성풍의 이름으로 학창 시절 내내 시달린 나에게는 부러움에 다름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내 이름을 싫어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좋아하지 않을 뿐. 어찌 되었든, 그럼 나는 어떤 마음으로 글을 쓰는 걸까? 그것도 근근이.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가 찢어졌다는 뱁새는 참새목 딱새과의 새로 몸길이가 황새보다 대략 1m 가량이 짧은 약 13cm다. 본명도 은근히 측은하다. 붉은머리오목눈이. 꼭 지나던 불량독수리에게 되우 두들겨 맞은 모습을 들키고 나서 받은 이름 같다.
내가 그 뱁새를 주목한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체격조건이 일치하는데다가, 아무리 내가 못났어도 남 흉내 내다 골병드는 일만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나름의 경계 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날로 느는 것이 시비였다. 책에 대한, 그리고 글쟁이들에 대한. 책을 읽을 적마다 저자의 의견에 말대꾸를 했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독후감이라는 핑계로 거침없이 뱉어냈다. 일종의 방향 전환이었다. 더 이상은 주눅 든 독자로서 지내지 않겠다는. 사실은 열등감과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자격지심이었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에 대한 시기심 같은 거 말이다.
깨금발을 하고 주방에 딸린 가로 세로 2:1 비율의 창문을 통해 동네를 내다보면, 바로 앞 여고 운동장 건너편에 이름을 잊은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우리 집과 마주한 두 동이 갑자기 내게 꽃으로 다가왔다. 창마다 하얗고 동글납작한 것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이 부시게 매달려 있었다. 처음엔 뭔가 했다. 알고 보니 안테나였다. 왼쪽을 향해 일제히 활짝 젖혀져 있는 접시 모양의 위성안테나들. 수도 없이 달려있는 그 물건들이 하루 중 어느 때 빛의 각도가 오묘하고도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면, 그렇게 꽃이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각도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경우, 상당하다.
과시용 각도. 설거지 후 삶은 행주의 각을 어떻게 잡아 너느냐의 문제. ‘난 참 반듯한 주부랍니다.’라는, 옆지기를 목표로 한 이미지 관리 차원의 작업.
물리적 각도. 주차할 때의 문제. 옆 차 주인에게까지 굳이 장수 축원―욕먹으면 오래는 산단다―받지 않으려면 신경 좀 써야 하지 않겠나 싶은 바퀴꺾기의 요령 혹은 기술.
얼짱 각도. 사진 공유의 문제. 웹상에 한 장 올리려면 그래도 좀 모양이 나는 것으로 골라야 할 것이니, 카메라의 위치는 45도 위, 턱 숙이기는 15도 아래 유지 필수.
역사적 각도. 석굴암 부처님 이마에 반짝이던 그 무엇인가의 의미. 수학여행 때 이불 속에서 오고갔던 수많은 전설들.
군사적 각도. 우리나라 위기상황 시 63빌딩 꼭대기에서 잠실 운동장 뚜껑을 향해 정확하게 빛 한 줄기 쏘면 로보트 태권브이가 짜~안 하고 나온다 하니, 아마도 오성장군만이 알리라, 일급 군사 기밀.
마지막으로 아파트 한 동을 흰 꽃들이 달덩이처럼 피어 붙은 잿빛 담장으로 탈바꿈시켜버리는 자연의 각도.
나도 각도를 달리 하고 싶어졌다. 허튼소리에 불과한 나의 시비에 품격을 얹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언어의 품격, 하면 그건 당연히 詩였다.
시(詩)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명사] 문학의 한 갈래. 자기의 정신생활이나 자연, 사회의 여러 현상에서 느낀 감동이나 생각을 운율을 지닌 간결한 언어로 나타낸 문학 형태. 형식에 따라 운율이나 자수(字數)에 제약이 있는 정형시와, 제약이 없는 자유시·산문시 등이 있고, 내용에 따라 서정시·서사시·극시로 구별되기도 함. 시가(詩歌).
하면, 세상에서 시는 무엇일까.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自畵像」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얼쑤!
상것에 불과했다는 자신의 내력을 질러버렸는데도 듣는 이의 귀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설사 ‘애비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렇게 고백했대도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인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절쑤!
또한 전혀 불쾌하지 않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는 그랬다. 반항성을 부추기는 선동가이기도 하고, 그 혹은 그녀의 책갈피에 몰래 찔러 넣는 가슴 떨리는 쪽지이기도 하고, 잊었거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제법 담담한 그리움이기도 하고, 내 살아온 날이 이러했노라, 못 말리는 고백이기도 하고, 신을 향한 진실한 경배이기도 하고, 시종일관 지루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제발 이젠 네 삶 좀 돌아봐, 생각 많은 이의 잠언이기도 하고.
오랜 빙하기(氷下期)의 얼음장을 뚫고 연연히 목숨 이어 그 거룩한 씨를 몸지녀 오느라고 뱀은 도사리는 긴 짐승 냉혈(冷血)이 좋아져야 했던 것이다.
몇만년 날이 풀리고, 흙을 구경한 파충(爬蟲)들은 구석진 한지에서 풀려나온 털 가진 짐승들을 발견하고 쪽쪽이 역량을 다하여 취식하며 취식당했다.
어느날, 흙굴 속서 털사람이 털곰과 털숲 업쓸고 있을 때, 그 넘편 골짜기 양지밭에선 긴긴 물건이 암사람의 알몸에 붙어있었다.
얼음 땅, 이혈(異血) 다스운 피를 맛본 냉혈은 다음 날도 또 다음 꽃 나절도 암사람의 몸에 감겨 애무 흡혈(吸血)하고 있었으나 천하, 욕(慾)을 이루 끝 새키지 못한 숫뱀은 마침내 요독을 악으로 다하여 알! 앙! 그 예쁜 알몸을 물어 죽여버리고야 말았다.
암살진 피부는 대대손손 지상에 살아 징글맞게 미끈덩한 눈물겨운 그 압축(壓縮)의 황홀을. 내밀히 기어오르게 하려 하여도 냉혈 그는 능청맞은 몸짓으로 천연 미끄러 빠져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오랜 세상, 그리하여 뱀과 사람과의 꽃다운 이야기는 인간사는 사회 어델 가나 끊일 줄 몰라 하더니, 오늘도 암살과 숫살은 원인 모를 열에 떠 거리와 공원으로 기어나갔다가 뱀 한 마리씩을 짓니까려 뭉개고야 숨들이 가빠 돌아왔다.
내 마음 미치게 불질러 놓고 슬슬 빠져나간 배반자야. 내 암살 꼬여내어 징그런 짓 배워준 소름칠 이것아. 소름칠 이눔아.
이들 짐승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인정은 오늘 없어도, 내일날 그들의 욕정장(欲情場)에 능구리는 또아리 틀어 그 몸짓과 의상은 꽃구리를 닮아 갈지이니.
이는 다만 또 다음 빙하기를 남몰래 예약해둔 뱀과 사람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뜻함일지니라.
「正本 文化史大系」 - 신동엽
그리고 신동엽의 시처럼 징글징글하게 처절한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시였다.
나는 시를 ‘읽는’ 일에 미쳐갔다. 한데 막상 시를 밝히다 보니 반전이 일어났다. 시는 진실로 거룩했다. 시비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마음이 착해지고 정돈되기 시작했다. 시는 신의 영역에 존재하므로 시비 따위가 통할 리 없음이었다.
시인 황도제 님에 의하면 시를 쓰는 궁극적 이유는 일 단계가 자기만족이요, 이 단계는 자기구원이며, 마지막 삼 단계가 타인구원이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시에만 해당될까.
선천적인 우울이 있었고 그 위에 햇우울, 그리고 친한 척하던 옛우울이 있었다. 하여 우울만이 더께로 내려앉은 내면이 얼마나 불투명하고 무거웠는지는 나, 자신만이 안다.
앙리 드 몽테를랑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나 자신만을 관찰할 때면 불안해진다. 남과 나를 비교할 때는 안심이 된다.
나도 그랬다. 나보다 잘났거나 혹은 나보다 못하거나, 적어도 나 같은 것을 가리는 데 몰두했다. 하지만 안심은 아니었다. 나보다 나은 이들을 끌어내리는 작업이 바로 시비였으니까. 미안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시비를 걷어내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게 되면서 나는 편안해졌고, 더 이상 내가 밉지도 않았다. 더불어 문자배열 작업까지 수월해졌으니 자기만족의 일단계가 마무리된 것이다.
이제는 나를 용서하고 싶다. 두루두루, 너그러이. 그러니 지금의 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쓰는 셈이다.
ps
그렇다면 다음은 타인구원일까? 아니, 나는 소설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