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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못한 약속

분례 할머니는 정말 그렇게 가셨다. 20대에 재취로 시집 와서 평생 일만 하고 고생하시다가 처음으로 소원을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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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북적대던 절에서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할 때, 그 많은 연등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힐 때 분례 할머니는 그렇게 소원대로 떠나셨다.

분례 할머니는 심한 기관지 천식환자다. 기관지 천식이 오래되어 폐가 나빠진 데다 그 때문에 심장까지 나빠져 심부전도 앓고 있었다. 기관지 천식에 심장 천식까지 동시에 앓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뇌경색의 후유증에 고혈압,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전에는 대상포진까지 앓으셔서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지독한 병들을 한꺼번에 지고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분이었다.

분례 할머니는 임동이라는 동네에 사셨다. 안동댐이 건설되기 전에 그 인근에 사시다가 살던 집이 수몰되면서 임동 어디로 옮겨 살게 된 것이다. 할머니가 병원에 나오시는 날은 거꾸로 상태가 좋은 날이었다.

할머니는 안동댐의 영향으로 안동 지역의 습도가 높아지고, 아침저녁으로 안개 끼는 일이 많아지면서 천식이 악화되었다. 날이 따뜻한 늦봄에서 초여름이 되면 증상이 좀 나아지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할머니가 차를 타고 병원에 나오시는 때는 날씨가 따뜻해진 늦봄 무렵이다. 상태가 안 좋으면 벽에 기대앉아서 숨을 쌕쌕거리며 몰아쉬고, 그야말로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병원은 엄두도 내지 못하신다.

의사 입장에서는 그런 할머니에게 입원 치료와 대학병원 전원을 간곡히 말씀드리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여의치 않은 일이다. 할머니는 아들이 3형제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가끔 할머니 약을 대신 타 가는 이웃 할머니 말로는 아들 3형제 모두 할머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은 할머니를 한 번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적상 아들이 셋이나 있어서 생활보호 대상자나 의료보호 대상자로 지정받지 못한다는 말도 했다.

요사이 이런 일들이 많다. 자식이 있어도 짐승만도 못하게 굴어서, 노인들이 그야말로 길거리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아가는 분들이 허다하다. 이분들은 기초생활수급자처럼 무료 시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정부 보조금도 한 푼 받지 못한다. 아들딸 하나 없는 노인은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밥을 주고 재워주는 시설에 들어갈 수 있지만 불효자식들이 줄줄이 있는 노인은 무료급식을 타기 위해 한 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한다.

분례 할머니가 그랬다. 할머니는 병원비를 받지 않아도 안 오신다. 아니, 못 오신다. 이웃들이 할머니에게 먹을거리나 땔감을 나눠주어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지만 늦봄에서 여름철이 아니면 그나마 나물을 뜯어다 파는 일도, 남의 집 일도 하지 못한다.

다행히 근처 작은 사찰에서 할머니를 어느 정도 보살펴주는 눈치였다. 일전에 할머니가 응급차를 타고 종합병원에 실려 가서 한 달 동안 입원해 있었는데, 그곳 사찰에 다니는 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치료비를 마련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도 몸이 좀 나을 때는 사찰 주방 일을 조금씩 도우면서 절밥으로 끼니를 해결하신다고 했다.

할머니는 병원에 오시면 의자에 앉기 전에 내게 늘 “성불하이소.”라는 인사를 하면서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시곤 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으신 할머니의 눈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간절한 신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랄까,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듯 할머니는 만나는 인연마다 ‘성불’을 기원하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할머니와 마주 앉으면 묘한 풍경이 연출된다. 할머니는 작은 염주처럼 생긴 나무 팔찌를 양손에 걸고 있고, 나는 왼손 넷째 손가락에 묵주 반지를 끼고 있다. 더구나 할머니가 거친 숨으로 연신 ‘성불’을 외며 합장하는 내 등 뒤쪽으로는 고모 수녀님이 주신 아기 예수님의 작은 고상이 놓여 있다. 나는 때로 이 묘한 부조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작은 감사를 느끼곤 했다.

그런 분례 할머니가 초파일을 일주일 앞두고 이웃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오셨다. 증상이 좀 나아서 움직일 만하다는 뜻이다. 할머니는 나중에 증세가 악화될 때를 대비해 약을 많이 타 가신다. 지금은 증상이 나쁘지 않은데도 베로텍 스프레이라는 기관지 응급 확장제와 이뇨제, 강심제 등의 심장약을 듬뿍 타 가서 집에 모아두시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할머니는 이틀 동안 연달아 오셔서 두 달치 약을 처방받아 가셨다. 그럴 때는 의료보험공단에 환자가 약을 분실했다는 허위 아닌 허위 소견을 붙여서 두 달치씩 약을 드리곤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그날따라 생기가 넘쳐 보였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물어보자 며칠 후면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그렇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나중에 당신이 죽으면 절에서 사십구재를 지내줄 거라고, 그래서 죽더라도 꼭 하늘에 오색 연등이 넘실거리는 초파일에 죽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애기처럼 발갛게 흥분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요즘 절에 머무르며 부처님 오신 날에 쓸 나물을 다듬고 있는데, 그게 그렇게 좋다고 하셨다.

“원장님요, 초파일에 우리 절에 한번 오시요. 내 절밥 맛있게 비벼 드릴 테니 꼭 한번 놀러오시요.”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은 일부러 돈 주고 사찰 음식을 사 먹기도 하는데, 더욱이 부처님 오신 날에 먹는 절밥은 얼마나 맛나겠는가? 그래서 정말 시간을 내서 절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마음먹고 그 사찰의 이름과 위치까지 자세하게 챙겨두었다.

그러나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며칠 후 이웃 할머니가 병원에 오셨는데 분례 할머니 약을 같이 달라고 하지 않기에 여쭈어보았다.

“분례 할머니 약은 안 타 가셔도 돼요?”

그러자 할머니는 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할마이, 초파일 저녁에 휙 가버렸어. 절 사람들이 밤에 연등행렬 나갔다가 와보니 부처처럼 벽에 기댄 채로 그냥 가버렸댔어. 그 할마이 원대로 된 기야. 만날 초파일에 죽었으면 해싸더니 진짜 그래 가버렸어.”

분례 할머니는 정말 그렇게 가셨다. 20대에 재취로 시집 와서 평생 일만 하고 고생하시다가 처음으로 소원을 이룬 셈이다. 종일 북적대던 절에서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할 때, 그 많은 연등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힐 때 분례 할머니는 그렇게 소원대로 떠나셨다.

남은 자에 대한 원망도, 떠난 자에 대한 그리움도 없이 부처님 손을 잡고 그렇게 훨훨 이 세상을 떠나셨다.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박경철 저 | 리더스북 | 2007년 12월

시골의사 박경철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이후 2년 만에 내놓는 에세이집. 작가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따로 쓴 몇 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작가 박경철은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다양한 일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면 당연히 외과의사를 하겠다고 할 만큼 ‘의사’로서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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