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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처럼, 천사처럼

내가 시각 장애자나 청각 장애자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맑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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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하다’ 혹은 ‘순하다’라는 느낌과는 다르다.

정규 씨는 농아자다.

내가 시각 장애자나 청각 장애자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맑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하다’ 혹은 ‘순하다’라는 느낌과는 다르다. 보통 ‘착하다’와 ‘순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이해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한다거나, 혹은 위해한 자극이 주어질 때 이에 대한 반응 강도가 낮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지만, 이분들에게서 느끼는 ‘맑다’는 것은 좀 다르다.

이분들은 기본적으로 ‘이해’나 ‘타산’에 대해 우리네 일반인들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데, 내 급여가 다른 사람들보다 적다면 누구나 그 점에 대해 화를 내게 마련인데, 만약 그것을 참는다면 그 사람은 착하거나 아니면 턱없이 순한 사람이다. 혹은 동료들끼리의 술자리에서 매번 한 사람에게만 술값을 내게 하는데, 선선히 술값을 낸다면 역시 그 사람은 턱없이 순하거나 착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만약 누군가가 같은 일을 하면서도 급여를 적게 받고, 게다가 감사하는 마음까지 가진다면, 우리가 ‘그 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나쁜 점이나, 혹은 이 사람에 대해서 바보라는 보편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한’ 그 사람은 ‘맑다’.

정규 씨가 그랬다.

정규 씨는 태어날 때부터 듣지도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다. 언어란 개념이고 생각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음모나 욕심, 증오나 분노도 모두 언어로 구성되고, 또 그것은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 그러면 그 말은 다시 다른 말을 부르고 그것은 내 안에 욕심 덩어리로 똬리를 틀게 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맑다’. 내가 ‘그래서 맑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정규 씨가 우리 정상인들처럼 ‘말’로 이루어진 죄를 짓지 않아서 맑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규 씨는 병원에 올 때도 칠십 노인인 홀어머니의 손을 잡고 온다. 그는 나이가 내 또래이지만 욕심이 없다. 그렇다고 지능이 특별히 낮은 것도 아닌데 우리 정상인의 기준으로 보면 약간 바보스러운 데가 있다(아니 그렇게 보이는 데가 있다).

그것은 아마 어릴 때부터 밀림에서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아이처럼 우리 사회의 세속적인 개념들을 잘 익히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는 병원비를 3,000원 낼 때도 만 원짜리를 낸다. 거스름돈은 주면 받고 안 주면 그냥 ‘씨익’ 웃고 만다. 버스를 탈 때도 자장면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다. 모르긴 해도 껌을 한 통 사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지능이 낮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의사인 내가 판단하기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정규 씨는 어린 시절부터 영악하게 세상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이다.

그저께 그가 노모의 손을 잡고 병원에 왔다.

나는 정규 씨의 손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의 손은 거칠고 손등이 거북이 등가죽처럼 갈라진 데다 손바닥은 항상 벌겋게 부어 있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정규 씨는 동료들이 꺼리는 일을 도맡아 한다. 녹을 벗기는 독한 화공약품과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낡은 고철을 만지는 게 일이다 보니 그의 손은 하루도 습진이 떨어질 날이 없다. 열이 39도가 넘어 온몸이 펄펄 끓는 날에도 그는 새벽부터 회사에 나가서 하루 종일 일한다.

그런데도 그가 받는 급여는 다른 사람들보다 절반이나 적은데, 그것은 그가 말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월급날이 되면 동료들과 회식을 나가서 혼자 술값 밥값 다 계산하느라 월급의 3분의 1을 써버린다. 동료들이 월급날만 되면 정규 씨를 데리고 가서 회식을 하고서는 정규 씨에게 계산을 미루는 탓이다.

나이 마흔이 넘은 아들의 손을 잡고 독감 예방주사를 맞히러 온 노모가 그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의 노모는 올해 초에 위암 3기 진단을 받고 위를 3분의 2나 잘라냈다. 정규 씨는 회식자리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면 여윌 대로 여윈 노모를 생각했고, 그나마 남은 월급으로 매번 쇠꼬리를 사들고 왔다. 노모는 그런 정규 씨를 붙잡고 가슴을 쳤다. 그래서 지난달부터는 월급날이 되면 회사에 직접 가서 아들을 데리고 온다고 한다.

정규 씨도 안다. 어머니가 앞으로 얼마 사시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그러면 지난 40여 년과는 달리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또 나이가 들면 지금 일자리마저 없어질 것도 알고, 동료 직원들이나 회사에 밉보이면 회사에 오래 다니지 못할 것도 안다. 그래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동료들이 밥을 사라면 밥을 사고, 약품을 옮기라면 옮기고, 쇳가루를 안고 다니라면 그렇게 한다.

노모는 혼자 남을 정규 씨를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 같다. 반면 정규 씨는 혹시라도 자기가 노모를 부양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한다. 노모는 아들이 속없이 돈을 쓰고 온다고 가슴 아파하고, 자기가 죽으면 세상에 혼자 던져질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정규 씨는 자기가 일을 해야 노모가 치료도 받고, 보약도 드시면서 조금이라도 더 사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그들은 마치 밤에 노적가리를 옮기는 동화 속의 형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런 그들을 이용하고, 덤터기를 씌우려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때로는 바보처럼, 때로는 천사처럼, 누가 뭐라고 해도 입이 귀에 걸린 큰 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박경철 저 | 리더스북 | 2007년 12월

시골의사 박경철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이후 2년 만에 내놓는 에세이집. 작가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따로 쓴 몇 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작가 박경철은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다양한 일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면 당연히 외과의사를 하겠다고 할 만큼 ‘의사’로서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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